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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정채금할머니 비암산에 살아오신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3-26 17:50:24 ] 클릭: [ ]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1)

 

이 기획을 내면서:

 

올해는 공화국창건 60성상을 맞는 뜻깊은 한해다. 건국60년간 중국 조선족은 형제민족 인민들과 함께 자기의 피와 땀, 의지와 지혜, 창조력과 개척정신으로 새 중국 건설과 개혁개방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 벅찬 려정 여러 시기에 걸쳐 제반  분야에서 우수한 인물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오늘부터 본지는 년말까지 조선족 사회 각계의 인물 60인(주: 일부는 고인의 가족대표를 통해) 을 만나본다.

 

□ 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인물의 분투려정을 통해 공화국 건설과 발전에 대한 우리 민족의 빛나는 기여를 되돌아보며


□ 중국 조선족성원으로서의 분투경력을 통해  중국 조선족의 자랑찬 발전사를  되돌아보며


□ 인물들의 감수를 통해 60년 발전행정중의 경험과 교훈을 되새기면서 나라와 민족의 진로를 고민해 본다.

 

본지는 《인민일보》 네트워크중심《인민넷》과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을 공동 주최해 지방 소수민족 당보와 국가급 당기관지의 합작으로 추진하며 길림신문사발전연구회에서 이번 보도를 후원하였다. 이번 기획보도에 대한 독자 여러 분들의 관심과 주목을 부탁드린다.

 

오늘 첫 기사로 공화국의 한 보통 녀 공민인 올해 91세의 정채금할머니로부터 고진감래의 감수를 들어본다.

 

◇ 이주.. 가족 생리별…민며느리--- 건국전 풍상고초를 다 겪은 한 조선족녀인


공화국 설립 60년을 겪어온  한 보통 중국공민 그녀의 절실한 감수


《백성이 잘먹고 잘사자면 나라제도가 좋아야 하지유!》

 

 

마을 로인협회 독보활동에도 빠짐없이 참가하며 세상사를 관심하고있는 정채금할머니는 신문읽기를 견지하고 있다.

 

비암산아래 첫동네 해란촌(화룡시동성진)에 정채금이라는 91세나는 장수할머니가 살고계신다. 근 한세기를 바로 여기 비암산일대에서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의 경위를 듣고저 할머니를 찾아떠났다.

 

 《아무것도 해놓은 일 없는 로백성한테 무슨 들을 말이 있어 찾아왔느냐》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하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정채금할머니는 정신이 포만되고 기억이 또렷했으며 표달이 분명했다.

 

나라 없는 쓰디쓴 기억 .. 가난때문에 온 가족이 산산이 흩어지고

 

할머니의 고향은 조선 온성 어대지라고 한다. 세살적(1921년)에 《쌀이 많이 나는》중국으로《쌍개지팡살이》를 오는 부모님등에 업혀 비암산 약수동일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지팡살이》란 땅이 없는 농민들들이 땅을 가진자의 머슴살이를 한다는 말이다. 그때 쌍씨 성을 가진 한족지주의 소작지으러 두호동네로 오게 되였던것이다.

 

《그땐 10단밭을 농사지어 가을에 7단을 지주에게 주고 일군은 3단을 먹게 됐는데 한해농사 지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어요. 》할머니는 저도 몰래 후- 한숨을 짓는다.

 

몇년이 지났을가 엄마가 세상뜨게 되자 자식들을 남의 집에 보낼가봐 제일 걱정이 컸던 엄마는 자기가 죽으면 상문[傷門 점술에서, 팔문(八門)의 하나. 길(吉)한 문(門)이다]을 놓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상문을 놓으면 자식들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던것이다. 

 

엄마가 돌아간 뒤 유언대로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유골을 가운데 놓고 하루 삼시 물 떠놓고 울면서 제사를 지냈다.

 

밭에 나가 김을 매고 돌아오는 오빠는 눈물로 울고섰는 두 누이동생을 보고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아 괴로와하더니 그만 미쳐버리고말았다.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여 산으로 뛰쳐나간 오빠를 붙잡아오면 아버지는 병을 치료해주느라고 오빠의 온몸에 뻘겋게 뜸질을 하군 하였다.

 

그럴수록 오빠는 기를 쓰고 산으로 도주하군 하였다. 아버지는 결김에 새총을 들어 상문을 쏘아 한방에 허물어버렸다.

 

《오빠는 겨울철이면 멀쩡하다가 호박꽃이 필 때면 병이 도지군 했습니다. 큰언니는 워낙 회령에서 못나오고 둘째언니는 온다 간다 소리 없이 어디론가 시집을 가고 오빠는 오빠대로 정처없이 떠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하루 아버지마저 내지(조선)에 가서 돈을 벌어다 고무신이랑 치마랑 사다준다면서 뒤집 어금이네랑 같이 살라 하고는 어디론가 떠나가고말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열살도 안되는 채금이는 눈에 눈물이 글썽한채 부모형제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진 마음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한적한 산간 두호동네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둘째언니가 친정으로 온다고 왔다. 집은 휑뎅그레 비여있고 어린동생만이 남의 집에 얹혀있었다.

 

죽기살기로 둘째언니의 옷섭을 붙잡고 울며 따라가니 언니네 사촌시형네 집으로 갔다. 언니도 오갈데 없는 처지인데 동생마저 붙어있어 눈치살이가 만만치 않았다.

 

 《채금아, 아버지가 지금 집에 와 계신다는데 래일 집으로 가렴.》 언니의 말을 곧이 들은 채금이는 투도장터로 오는 장군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금이가 마중나와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너네 아버지가 저 아주머니네 집에 자주 놀러오군 한단다. 저 아주머니 따라 가면 너네 아버지를 만날수 있다는구나. 》

 

어금이가 가리키는 그 아주머니를 쳐다보니 추하기 짝이 없는 《곰보딱지》였다. 그 아주머니는 옷도 여러벌 보자기에 싸갖고 와서 채금이에게 어서 입고 아버지 만나러 가자고 하였다.

 

더는 누구 말도 믿고싶지 않은 채금이는 싫다고 발버둥질치는데 한쪽에서는 우격다짐으로 빨간 양말에 새옷을 입혀갖고 길을 떠났다.

 

흰눈이 푸실푸실 떨어지는데《곰보딱지》 아주머니가 앞장서고 목이 하얀 깜장개가 뒤쫓고 북신(지푸라기에 천을 감은 신)을 신은 채금이가 멀거니 뒤따르며 해질녘까지 걷고걸었다.  

 

아주머니따라 웬 집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모여 왁작거렸다. 무슨 판국인지 채금이한테 작은 저녁상이 단독으로 차려졌다.

 

접시에 삶은 닭알까지 받쳐올랐는데 채금이는 부끄러워 먹지 못하였고 고양이가 발로 닭알을 긁어내리고있었다. 그날 그집에서는 채금이를 민며느리로 들였던것이다.

 

그런줄 모르고 채금이는 아버지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하다가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집 주인아버지가 참 마음씨 좋은분이였어요〈메이대데》라고 불렀는데 내가 울다가 잠이 들면 덮개를 푹 씌워 꾹꾹 눌러놓고는 〈에쿠! 너도 제 어시를 잃고 이게 무슨 신세냐!〉하며 척척 다독여주었지요…. 》

 

그 삭막한 세월속에서 불쌍한 자신을 사랑의 손길로 쓰담으어주시던 《메이대데》를 떠올리며 할머니는 한동안 서럽게 흐느꼈다.

 

채금이가 그 집에서 얼마동안 살았는지 열세살나는 해에《곰보딱지》아주머니가 아버지한테로 데려다주었다.《내지》로 돈벌이 간다던 아버지는 10촌오라버니를 따라 비암산에 와 오빠와 함께 남의집 머슴살이를 살고있었던것이다.

 

얼마나 애타게 찾아헤매던 아버지품이던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눈물이 마르도록 그리워하던 부모님곁으로 오고보니 정말 꿈만 같았다. 동생이 들어오는것을 본 오빠는 달려나와 얼싸안고 빙빙 돌았다. 딸 하나 양육할 힘이 없었던 아버지는 딸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민며느리로 들여보낼수박에 없었던것이다.

 

그때 민며느리를 들이면 3년 석달 키워줘야 한다는 법이 있어 아마도 그 기간동안을 《곰보딱지》아주머니집에 살았는가본다. 그런줄 모르고 어린 채금이는  부모형제가 하도 그리워 홰보끈을 풀어 목을 매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채금이가 아버지곁에서 1년을 푼히 살고 섣달 한달만 지나면 열다섯살을 잡게 되는데 또 아버지곁을 떠나야 했다. 시집에서는 유동(덕신)에 남의집살이를 들여보냈던 열다섯살 이상인 신랑을 데려다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녀자 나이 15세만 되면 무조건 일본아마공장 민공으로 잡혀갔기때문이였다.

 

동지달 추운 겨울날 채금이는 아버지를 붙잡고 눈뿌리 아프도록 울고 또 울었다. 갈길은 가야 하기에 자기를 태우러 온 마차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떠나는 딸에게 멀미를 하지 말라고 입에 돈을 넣어주며 《하늘도 무심쿠나!》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것이였다.

 

아버지는 비암산자락에 서서 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저어 바래주었다. 멀리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비암산은 오래도록 자기를 바래주고있었다.

 

그때로부터 채금이마음에 아버지는 비암산, 비암산은 아버지였다. 비암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그 탄식소리가 귀전을 떠나지 않고있었다.그때를 다시 돌이키는 이 순간에도 아버지의  그 목소리가 귀가에 들리는듯싶다고 한다.


 
남편의 얼굴도 모르고 시집이라고 가니 또 그《곰보딱지》아주머니집에 들어서자 저도몰래 목놓아 울어버렸다. 《곰보딱지》아주머니가  달래주며 옆에 끼고 첫날밤을 잤다.

 

그랬어도 열여섯살을 잡는해에 어느덧 첫 아들이 생겨났다.

 

입이 하나 더 불었으니 먹고살기 위해  뱀이 욱실대고 승냥이 울음소리 귀를 때리는 산판장에 가 밥짓기를 하고 큰쇠톱으로 녀자 둘이 마주하고 통나무대가리를  켜고 정어리기름짜는 일(자칫하면 기름가마에 빠져 목숨을 잃기 쉽상)이며 가릴새 없었다.

 

나무겉이불을 베개만큼씩 패서 장에 이고나가 한단에 20전씩 하루 6단씩 팔아서는 그날 그날 쌀을 사먹으며 연명해나갔다.

 

열아홉살 되는 해에는 해란강이 범람하는바람에 누렇게 익어가던 벼가 하루새에 밀대놓이를 하고만다.

 

그해 농사지으며 선전 먹은 빚이 130원이 되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 이듬해 정월 스무날 또 둘째아들까지 태여났다. 10촌 오라버니도 친척라고 찾아가니 먼저 남의 집 빚부터 갚으라고 돈을 선대해주었다. 그리고는 소수레 하나에 130원 값을 쳐주면서 농사라도 지어먹고 살라고 보살펴주었다.

 

몇년이 지나도 그 빚을 갚지 못하고있는데 안주인이 찾아와 《장부보러도 오지 않느냐. 리자가 붙어 이젠 520원이 되였다》고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사는 형편을 돌아보고는 어쩔수 돌아나가면서도 한마디 던지고 갔다.

 

《아들대에 가서 받아도 받아내겠지.》

 

정수리를 호되게 얻어맞은듯 머리가 뗑해났다. 어떻게 아들대에까지 빚을 물려준단말인가? 남편은 손바닥이 곪아 몇개월을 일을 못하고있고 두아이는 배가 고파 발버둥치고….그녀는 방축건설장에 가 100여근씩 되는 모래함을 하루에 30함씩 이고다녔다. 그래도 십장이 떼고 대장이 떼고 하면  한함에 3전씩 하는 삯값이 1전 오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난 허물이70년이 지난 오늘에도 할머니 머리에 허옇게 똬리를 틀고있었다.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녀는 돈이 될만한 일이면 뭐든지 해야 했었다. 송평장마당에 나가 무우시라기를 삶아 똬리를 지어 한근에 2전씩 팔기도 하고 아예 함박집(숙사)에 1전씩 넘겨팔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래도 돈이 되더란다.

 

그러나 일단 일본 감시원에게 잡히는 날에는 몽땅 빼앗겨 쓰레기더미에 버려지게 된다. 어떻게 몇해를 벌었던지 끝내 10촌오라버니앞으로 520원을 갖춰갖고 갔다. 너무나 뜻밖이였던 10촌오라버니는 혀를 끌끌 차며 20원을 장사밑천으로 되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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