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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와 연변대학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연변일보 ] 발표시간: [ 2011-04-04 10:05:07 ] 클릭: [ ]

주덕해동지는 중국조선족간부의 걸출한 대표이며 연변대학의 겸직 교장으로서 또 우수한 정치가이며 교육가이기도 하다.

주덕해동지의 일생은 교육과 갈라놓을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민족대학의 개척자

1949년 연변대학이 설립되였으며 주덕해는 3월에 연변대학 겸직 교장을 맡았고 1951년 6월 25일에 국가정무원에 의해 정식으로 연변대학 교장에 임명되였다. 주덕해는 연변대학 교장으로 임명된뒤 연변대학을 위해 많은 사업을 해왔다. 연변대학의 발전전략, 교정의 건설계획, 기반시설의 건설과 경비의 투입 등과 같은 연변대학의 중대한 사무에 대해 그의 직접적인 참여하에 결책을 내렸다.

주덕해는 한 교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과 요구는 전망성 있는 전략발전사상을 갖추는것으로서 이는 학교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진하는 중요한 의거와 선결적 조건이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덕해교장은 연길시 주변지역을 전부 답사하면서 반복적인 비교와 검토를 거쳐 나중에 학교부지를 연변대학의 지금 위치로 선정했으며 당시 몇십헥타르에 달하는 학교건설용지를 확정했다.

그는 직접 자금을 조달하여 원 관동군사령부 낡은 건물을 개조하고 동시에 교수용 건물을 축조했다. 1951년에는 또 면적이 30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사무청사를 건조한 뒤 화학청사, 숙사 등을 륙속 건설하였다. 지금의 학교부지는 마침 산세를 타고 있어 들쭉날쭉하게 층차를 이룬 대학교 건물축조를 위해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현재 연변대학의 새로운 학교구역이 전부 완공되였는데 기세가 드넓은 건축구도, 민족적 풍격과 정취가 독특한 건축, 새로운 학교구역과 낡은 학교구역의 조화는 각계 방문객들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있다. 우리는 당시 주덕해교장의 부지선택이 매우 중요하여 연변대학의 새로운 학교구역의 확건을 위해 드넗은 공간을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한다.

1951년 주덕해는 림민호, 로기순 등과 함께 직접적인 답사를 거쳐 연변병원의 건설용지를 선정하였다. 1953년 청명절이 지난 뒤 연변병원 새청사 건설공사가 착공되였으며 주덕해교장이 애쓴 보람으로 길림성정부에서 동북화페 17억 8000만원의 자금을 조달하고 연변전원공서에서 40억 4000만원(당년의 동북화페 1만원은 지금의 인민페 1원과 맞먹음)의 자금을 조달하여 공사가 12월에 준공되여 건축면적이 1만 1260평방메터에 달하는 3층짜리 병원용 건물을 건설했다.

그뒤 주덕해는 또 림민호, 로순기와 함께 의학원 부지를 연변병원북쪽으로 선정하였으며 부지총면적이 14만 7720평방메터에 달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의학원의 기본건설을 위해 주덕해교장은 직접 뛰여다니면서 정부의 자금지원을 쟁취하여 도합 건축면적이 1만 5649평방메터에 달하는 교수용건물을 신축하였다.

연후에 또 국가자금을 쟁취하여 2만평방메터에 달하는 교수과학연구용 건물과 교직원 숙사를 축조했다. 1952년초 주덕해교장은 직접 룡정에 가서 농학원의 학교부지를 말발굽산아래로 선택하였다. 그뒤 그는 또 자금을 쟁취하여 농학원을 위해 10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학교건물을 건설하였다. 1958년 농학원의 교수용 건물은 1만여평방메터로 확대되여 당시 교수수요를 기본상 만족시켰다.

교수시험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덕해교장은 또 말발굽산 아래 원 일제침략시기 벼시험기지의 18.9헥타르를 농학원에 넘겨주어 교수기지로 만들게 했다. 후날 그는 또 주변 몇백헥타르의 농지를 농학원에 넘겨 다종경영의 실험농장으로 만들게 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전신 연변예술학교도 주덕해교장이 전국정협 제3기 제2차회의에서 제안하고 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건립한것이다. 예술학원의 건립과 발전, 장대는 지방을 위해 많은 예술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연변이 《가무의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명성을 가질수 있도록 하였다.

주덕해교장은 시대를 앞서가는 의식으로 개방성을 연변대학의 주요 학교운영리념으로 삼았다. 1949년 3월 20일에 학교가 개학하였다. 7월달 그는 두개 대표단을 조직해 각기 조선과 동북3성에 시찰보냈다. 조선시찰단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하고 200여책의 조선문교과서를 갖고왔는데 조선언어문학, 력사문화면의 교재가 있었을뿐만아니라 쏘련대학교과서를 번역한 사회과학, 자연과학 면의 교재도 있었다. 이 교재들은 연변대학 건교초기부터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학교운영특색을 부각하고 선진적인 교육경험을 학습하는데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연변대학은 국내 50여개 대학교들과 협력교류관계를 구축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변대학은 국내외 140여개 대학교 또는 과학연구소와 협력교류관계를 구축해 대외교류에서 륭성발전하는 경상이 나타났다. 《물 마실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말라》는것은 주덕해교장의 개방적인 학교운영리념이다. 이같은 학교운영리념이 있었기에 연변대학은 오늘과 같은 성과를 거둘수 있었고 연변대학의 특색있는 학과우세를 형성하고 대외교류를 확대하는데서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을수 있었다.

거현애생(举贤爱生)리념의 실천자

기나긴 교육과정에서 주덕해는 《학교를 운영함에 있어서 교원을 주체로 하고 교육에서 학생을 근본으로 한다》는 교육리념을 수립하고 이같은 리념을 높이 받들고 인심을 감동시키는 많은 사적을 수없이 엮어갔다.

주덕해는 교육을 중시하고 인재를 존중하였다. 낡은 사회를 겪은 지식분자를 어떻게 대하고 사용할것인가에 대해 주덕해는 한가지 원칙을 견지했다. 즉 지식분자가 나라를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기만 하면 그는 정치면에서 충분하게 신임하였고 사업과 생활면에서 지지하고 관심해주었다. 이는 주덕해의 드높은 정책관념 특히 당의 지식분자정책에 깊은 중시를 돌리고 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주덕해와 로기순박사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바로 좋은 실례로 된다.

로기순박사는 그당시 아주 귀중한 의학인재였다. 주덕해는 연변에 와서 사업한지 얼마 안되여 로기순을 직접 방문하였다. 두사람은 연변의 의학치료와 교육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로부터 두터운 우의를 쌓게 되였다.

1957년 1월, 로기순박사가 암진단을 받고 입원치료를 받는동안 주덕해는 여러번 그를 찾아가 문안하고 신심을 갖고 병마를 이겨내라고 고무격려했으며 친히 절인 고추를 갖다주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술을 마시면서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7년 6월 7일, 로기순박사는 별세하였다. 6월 8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위원회는 17명으로 구성된 로기순박사 장례위원회를 설립하고 주덕해가 직접 장례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6월 9일 오후, 로기순박사추도회가 성황리에 거행되였다. 주덕해가 직접 추도사를 읽었다. 로기순의 유체를 묘지로 호송할 때 주덕해 등 주당위와 주정부의 지도자들은 애도의 뜻을 표하는 마음으로 몸소 령구를 메였다. 주덕해의 이같은 행동은 지식분자를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그의 위대한 품격을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학교의 교원대오건설을 강화하기 위해 주덕해교장은 선후로 교원들을 전국의 대학교에 연수보냈으며 자기가 직접 사람을 파견하고 편지를 써서 심양, 할빈, 목단강 등 곳으로부터 많은 인재를 끌어들였다. 주덕해교장은 또 대담하게 쏘련과 일본의 지식분자들을 담임교원으로 임직시켰다. 이는 교원대오건설에서의 주덕해교장의 원견있는 통찰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주덕해의 관심하에 구조가 기본상 합리하고 업무자질이 량호한 교원후진이 초보적으로 건립되여 향후 연변대학의 교원대오건설을 위해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특히 지적하고싶은것은 해방후에 있은 여러차의 정치운동과정에 주덕해는 박규찬, 김유훈, 오창 등 연변대학의 많은 간부와 전문가들을 보호해주었으며 연변대학의 쾌속발전을 위해 귀중한 불씨를 남겨놓았다.

주덕해는 교원들을 아주 존중하였을뿐만아니라 학생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950년, 주덕해는 북경에서 전국정협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기간 그는 중국인민대학 정치경제학부에 파견되여 연수받고있는 김지운을 특별 초청해 그의 생활과 학습정황을 료해하였다. 그는 담화를 통해 김지운이 전쟁기간에 다리를 다쳐 생활형편이 아주 어렵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주덕해는 줄곧 이를 마음속에 명기하고 북경에서 돌아온후 부교장 림민호와 토의한수 김지운의 안해를 북경에 보내 그의 생활을 돌봐주게 함으로써 김지운이 뒤근심 없이 학업을 순조롭게 마치도록 하였다.

그당시 연변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북경 여러 대학교에서 학문을 연구하고있었는데 주덕해는 북경에 갈적마다 꼭꼭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학습, 생활정황을 료해하고 제때에 어려움을 해결해줌으로써 더욱 좋은 환경에서 학습할수 있도록 하였다.

1957년, 연변대학의 김장욱선생이 구쏘련 모스크바에 가서 제6회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때 북경에서 회의를 하고있던 주덕해교장은 직접 그를 회견하였다. 김장욱의 복장이 조금 낡은것을 본 주덕해교장은 50원을 주고 그에게 일부 옷견지들을 사주었다. 이에 김장욱선생은 깊이 감동받았으며 학생들에 대한 주덕해교장의 관심을 절절하게 느꼈다.

지방경제건설과 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추동자

대학교는 지방경제건설과 사회발전을 위한 중요한 사명을 짊어지고있다. 주덕해교장은 《연변에 립각하여 지방경제건설과 사회발전을 위해 복무하자》는 교육리념을 견지하여 연변대학의 학술과 과학연구 우세를 지방경제와 사회발전을 추동하는 강유력한 보조추진기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연변은 동북변경 특히는 장백산 고한산악지구에 자리잡고있으며 케산병, 케신벡병 등 돌림병은 치사률이 아주 높다. 주덕해는 돌림병으로 일부 마을의 사람들이 몽땅 죽어 집집이 텅텅 빈 비참한 정경을 목격하고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주덕해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1952년 6월, 연변병원 진단학 전문가 정규창 등 교수와 방역소 일부 인원들은 연변위생예방퇴치소, 연변위생예방퇴치팀을 설립하였다. 1952년 10월, 그들은 케산병예방퇴치를 위주로 한 지방성질병 조사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주덕해는 사업진전에 대해 여러번 문의했고 지방성질병구역 대중들의 건강에 관심을 돌렸으며 관련 부문에서 지방성질병을 이르키는 유인에 근거하여 종합적인 예방퇴치대책을 세울것을 요구하였다. 몇년간의 예방과 치료를 거쳐 그리고 연변의 많은 마을들에서 우물을 깊게 파고 주택조건을 개선하고 음식조합에 중시를 돌리고 량호한 위생습관을 양성한 보람으로 1962년 연변은 기본상에서 케산병과 같은 지방성질병을 통제하였다.

일찍 1949년, 주덕해동지는 연변에서 임직초기 연변의 산과 물을 시찰하면서 모아산남쪽의 황산을 연변에서 가장 큰 과수원으로 건설하고 모아산 북쪽의 산비탈을 푸른나무가 우거진 원림으로 개조하려는 전망계획을 세웠다. 일련의 준비사업을 끝낸후 주덕해동지는 신중하게 고려한후 《만무과원》건설임무를 기술력량이 아주 튼튼한 연변농학원에 시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연변농학원 사생들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북쪽은 모아산으로부터 남쪽은 룡정과 화룡이 린접한 벽암산까지의 과수원을 한데 련결한 20여리 길이의 과수농장이 건설되였다. 진정 아시아 최대의 《만무과원》을 건설하였다. 지금 《만무과원》의 사과배는 연변의 주요산업으로 되였다.

20세기 50년대초, 주덕해는 당시의 연변 농업생산과 인민생활의 상황에 근거하여 연변황소양식문제에 대한 중임을 농학원의 장병진 등 선생들한테 맡겼다. 주교장의 중임을 떠맡은 김병진선생은 주교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50년대부터 그는 늘 광범한 농촌에 내려가 과학조사를 진행하고 대량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1986년 12월, 김병진과 연구팀 성원들은 끝내 부림소로 고기소로도 쓸수 있는 《새 품종》연구과제를 완수하였으며 길림성 과학기술진보 2등상,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획득하였다. 현임 연변대학 농학원 원장 엄창국교수를 골간으로 한 과학연구팀은 선배들이 물려준 계주봉을 받아 주덕해교장의 지시에 좇아 계속 《연변황소 새 품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분투하였다. 고심한 연구끝에 그들은 중대한 과학연구성과를 거두었으며 연변황소의 새 계렬품종-연황우를 육성해내여 길림성 과학기술성과 1등상을 따냈다.

주덕해교장탄신 100돐을 기념하는 오늘날, 우리는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사심없이 기여한 그의 위대한 품성을 잊을수 없으며 그가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귀중한 정신적재부를 잊을수 없으며 민족교육을 발전시키고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전수하기 위해 기울인 크나큰 공로를 잊을수 없다.

우리는 주덕해교장의 유지를 받들고 그의 교육사상과 학교운영리념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구진, 지선, 융합》(求真, 至善,融合)의 교훈을 엄수하여 연변대학을 민족특색이 선명하고 수준높은 대학으로 건설하면서 로교장의 명복을 빌것이다.

/김병민 (연변대학 현임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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