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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04 10:09:39 ] 클릭: [ ]

북경 해전구에 자리잡고있는 동물원은 북경의 중요한 유원지의 하나로서 매일과 같이 수천명의 관광자들이 이곳에 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동물원서북쪽에는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옛 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삼패자화원(三贝子花园)이 바로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소집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작은 호수를 사이두고 2층 양옥이 남아있는데 규모가 제법 컸다. 이 건물이 바로 삼패자화원의 주건물인 창관루(畅观楼)이다. 흰 대리석기둥과 2층 베란다를 보아도 건물의 비범함을 짐작할수 있다. 정원에는 여러가지 화초가 만발하였고 가담가담 금빛 기와에 붉은 벽으로 된 옛 집들이 있어 더욱 화려하고 고풍적으로 보였다. 북경 관광지남(指南)에 의하면 이곳은 만생원(万牲园)이라고 하였는데 현지인들이 삼패자화원이라고 불렀다.   

패자(贝子)는 만청 작위이다. 만족어로 고산패자(固山贝子)의 약칭인데 타고난 귀족이라는 뜻이다. 청나라의 작위를 본다면 친왕(亲王), 군왕(郡王)의 아들을 패륵(贝勒)으로 봉하는 경우가 많은데 패륵의 아들을 패자로 봉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삼패자란 패륵의 세번째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기재에 의하면 광서(光绪) 32년인 1906년 청나라 대신들인 재택(载泽) 등이 외국에 나갔다가 코끼리, 사자 등 기이한 동물들을 가져다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초 동물원이 이루어졌고 이름도 만생원이라고 불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삼패자 화원은 북경에 오는 많은 관광자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되였고 화원의 창관루는 한때 청조의 자희태후까지 머물던 곳으로 대뜸 북경의 명루로 되였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인 혁명자들이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를 소집하였던것이다.

북경군사통일주비회의 개최지 창관루.

(권립 교수) 《1919년 5.4운동이 발발했습니다. 5.4운동때의 큰 별인 리대소선생의 신변에는 김일하 등 한패의 우리 민족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리대소선생의 신변에서 맑스주의를 배우고 지하활동에도 종사했습니다. 그때로부터 특히 1920년에 연변에 대한 일제의 경신년토벌이 있은후에 보다 많은 우리 민족 반일인사들이 북경에 모였고 또 신채호선생의 대동단결의 호소에 맞추어 대단결, 대통일을 주장하는 반일인사들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박용만 선생입니다. 박용만선생은 구라파와 아메리카 렬강들의 힘에 의거해 민족해방을 얻자는 소극적인 외교론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민족적인 무장주의를 주장했고 대통일을 주장했습니다. 1921년 4월 27일 북경에서 군사통일기획준비위원회를 열게 되였습니다.》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9인이 주최하에 국내 국민회(国民会), 하와이의 독립단(独立团), 북간도국민회(北间岛国民会), 서간도군정서(西间岛军政署), 국내 로동회(劳动会), 국내 통일회(统一会), 로씨야 연해주의 국민의회(国民议会)의 찬동을 얻고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적 통일을 합의하였고 무장항쟁을 주장하였다.

회의는 중국 동북에서의 독립군부대를 통합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며 국경지역에서 일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또한 박용만의 제의로 대회는 상해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광범위한 민족련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3.1운동이후 일제통치하에 시달리고있는 조선의 독립에 관련해 여러가지 그릇된 투쟁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내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통일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이른바 자치론자들이 나타났다. 한편 리승만을 위수로 한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 강대국에 의한 독립을 꾀하는 외교로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경 군사통일회의 주요 창도자의 한사람이며 독립운동지도자의 한사람인 단재 신채호가 리승만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을 제기하였다. 

《아(我)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향하여 리승만, 정한경 등 대미위임통치 청원 및 매국, 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 이렇게 시작되는 단재 신채호의 《성토문》에는 김원봉, 김창숙, 오성륜, 최용덕을 비롯한 50여명이 서명하였다.

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상해림시정부의 시책을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출범한 이 회의는 중국관내 조선민족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로써 더욱 많은 반일투사들이 강대국에 의지하는것이 아니라 전 민족의 단결과 무장투쟁을 거쳐 일제를 타도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게 되였던것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불절(不绝)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착취(剥削)치 못하는 리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는 단재(丹斋) 신채호(申采浩1880--1936년)가 1922년, 의렬단 단장 김원봉의 부탁으로 기초한 의렬단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의 일부이다. 문학가이며 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조선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에 뛰여난 그는 일찍부터 리동휘, 신정과 더불어 충청남도 세 수재로 불리웠다. 1898년 그는 서울 성균관으로 들어가 박사로 되였으며 6년간의 고심한 연구를 거쳐 조선근대 저명한 학자로 된다. 

(권립 교수) 《신채호선생은 20여세에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였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반일사상 계몽운동에 뛰여들었습니다. 1910년 4월에 청도회의에 참가한후 해삼위에 가서 신문을 꾸리면서 반일계몽운동을 하다가 1915년에 북경에 도착한후에 13년동안 무서운 빈곤과 굶주림을 이겨내면서 반일사상 계몽운동을 했습니다.》

1905년부터 신채호는 선후하여 <황성일보>, <대한매일신보>의 론설기자로 활약하면서 민족주의를 선양하였다. 국내에서 독립협회, 신민회 등 진보조직에 몸을 담고 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던 그는 1910년 4월 중국 청도에 온다. 청도에서 그는 신민회가 조직한 청도회의에 참가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방과 더불어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던것이다.

신채호는 청도회의의 결의에 따라 중국 동북에 독립군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힘썼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로씨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상해의 신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신정의 동제사에 몸을 담고 신정을 도와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길을 찾아보려는 신채호의 발상으로 시작한 박달학원에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정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신채호는 동북의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료녕성 환인현으로 간다. 이번 행차에 그는 환인현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였고 백두산에도 올랐다. 유적지 답사와 민족사자료 수집활동은 그가 후에 조선민족의 력사를 재검토하고 서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으며 그의 력사관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게 되였던것이다.

동북에서 신채호는 또 대종교의 교주인 라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고 동창학교(东昌学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그후 단재 신채호는 리상설, 신정, 박은식, 류동렬, 조성환, 리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韩革命党)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후 북경에서 력사연구와 문학창작에 몰두한다.

(권립 교수) 《단재 신채호는 북경에서 있는 기간 <동방(东方)> 잡지를 꾸려서 전문 일제의 침략죄행을 폭로하였고 또 많은 반일 문학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주의 력사관에 날카롭게 맞서서 우리 민족의 독립력사관을 피력했으며 조선사 총론을 비롯해 많은 력사저작을 남겨 우리 민족 해방투쟁에 력사학적 뒤받침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신채호는 또한 조선민족 각 반일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면서 대동단결을 위해 민족 유일당 조직 촉진회까지 건립하게 됩니다.》

1915년 북경에 도착한 신채호는 숭문문(崇文门)밖 보타암(普陀庵)에 거주하면서 북경도서관을 다니며 <조선사>의 집필을 구상하였고 또 북경의 권위 신문들인 <중화보>, <중화시보(中华时报)>에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시 <중화시보>의 가장 열정적인 투고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무렵 그는 또한 북경대학의 리석증(李石曾), 채원배(蔡元培)를 비롯한 중국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 신문화운동의 주요 인물들이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명희와 깊은 교분을 맺게 된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년)가 바로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의 저자이다. 당시 남양군도에서 3년간 방황하던 홍명희는 북경에 온후 신채호의 숙소를 자주 다니면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1916년 봄, 신채호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한다. 작품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 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소설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1915년부터 근 13년간 주로 북경에서 활동하였기때문에 북경에는 신채호선생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기재된 지점만 하여도 보타암, 금십방(锦什坊), 석등암(石灯庵), 관음사(观音寺), 초두호동(炒豆胡同) 등이 있다. 답사팀이 신채호선생의 유가족인 리덕남녀사를 만난것은 2003년 10월 16일, 보타암에서였다.

신채호 유가족 리덕남 녀사와 함께.

10월에 들어서면서 북경의 날씨는 한결 맑았다.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의 안내에 따라 신채호선생이 북경에서 가장 먼저 머물렀던 곳인 보타암에서 리덕남녀사를 만난것은 오전 10시경이였다. 회색 양복을 단정히 입고 옅은 갈색 안경을 건 녀사는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리덕남녀사가 바로 신채호선생과 박자혜(朴慈惠) 사이에서 낳은 장남 신수범(申秀凡)의 부인이다. 신채호선생의 손자인 신상원(申尚原), 손녀 신지원(申智媛)의 어머니로서 리덕남녀사는 현재 신채호연구와 기념활동을 위해 열심히 사업하고있었다.

보타암은 북경시 숭문구(崇文区) 동변문(东便门) 남쪽에 위치해있다. 지금은 사찰건물이 없고 우물가에 3메터 남짓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을뿐이다. 리덕남녀사와 답사팀이 비석을 둘러싸고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신채호선생과 관련되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문은 다만 이곳이 옛날 보타암이 있던 곳이라는것만을 증명해주고있다.

덧없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현지인들은 옛날 이곳에 암자가 하나 있었다는 아득한 기억만 더듬는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단재 신채호가 활동했던 곳이였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관련 사학자들의 발길도 잘 닿지 않고있는 현실이다. 빛나는 력사와 선각자들의 발자취는 덧없는 세월속에 망각되여 침묵만 지키고 있다. 다만 가을 바람에 설레이는 해묵은 버느나무만이 긴 가지를 흐느적거리며 뭔가를 속삭이는것 같았다.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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