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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9)—각지 청년회결성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17 12:44:35 ] 클릭: [ ]

1926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벌전쟁은 불과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두려움 모르는 북벌군장병들은 파죽지세로 호남, 강서전역을 휩쓸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로동자와 농민들이 일떠나 도와나섰다. 그리하여 이해 년말까지 북벌군은 수배나 더 많은 군벌부대를 전승하고 광서, 광동으로부터 호남, 호북, 강서지역을 통제하게 되였다.

 
중국혁명에 몸담고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은 북벌전쟁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유망한 청년들을 더 많이 단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남아있던 의렬단단장 김원봉은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휘하에 집결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자 그는 기타 의렬단간부들과 함께 황포군교 무한분교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무한에 거주하고있던 조선교민들속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찾았으며 무한의 여러 혁명단체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군내에 있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왔다.

무한의 중남재경대학(中南财经大学) 원계성(袁继成) 교수는 당시 무한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원계성 교수) 《황포군관학교가 가장 일찍 무한에 정치과를 설치하려 할 때 한편으로는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이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에서 전국을 상대로 학생들을 모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무한에 조선혁명청년회가 있었는데 청년회를 주도로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한국청년들이 무한에 오게 되였습니다. 후에 무한군교, 무한분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명칭을 바꾼 중앙군관학교 무한분교에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무한에는 일찍부터 조선교민들이 중약과 인삼 장사를 하면서 살고있었다. 20년대부터 조선교민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자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군인으로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조선청년과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과 군인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혁명청년회(留鄂革命青年会)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조선혁명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포함되였다. 이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义杓), 리검운(李检云), 오세진(吴世振), 리우각(李愚悫), 로세방(劳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事政治学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陈公木), 진갑수(陈甲秀), 사검인(史剑仁), 안동만(安东晚), 류광세(刘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学)과 남호학병단(南湖学兵团),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네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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