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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3)—남창봉기 하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소 ] 발표시간: [ 2011-08-22 10:26:18 ] 클릭: [ ]

 1927년 8월 1일, 중외를 진감한 남창봉기가 시작되였다. 3만여명 혁명군인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국민당반동파를 반대하는 첫 총성을 울렸다. 200여명 조선혈열청년들도 이 위대한 전투에 참가해 피흘리며 싸웠다. 이때로부터 암흑기의 중국인민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였으며 혁명의 불씨는 중국대지 방방곡곡에서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급촉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봉기지휘부인 강서대려사에 대기하고있던 주은래가 수화기를 들었다. 하룡의 전화였다. 하룡은 봉기군내의 한 병사가 사사로이 적지휘부로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시각 변절자가 나타났다는것은 봉기계획이 루설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할것인가?

이때 장밤을 적장교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차렸던 주덕에게서 소식이 전해왔다. 적장교들의 반응을 보아서는 봉기계획이 루설된 낌새가 보인다고 하였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주은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봉기를 두시간 앞당겨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즉각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8월 1일 새벽 두시, 남창의 혁명군인들이 국민당반동파들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 장병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진격하였다.하룡부대가 장강로(章江路) 입구에 위치한 적 주배덕의 본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다. 주배덕의 본부에는 한개 경비단이 수비하고있었다. 사전에 변절자의 밀고를 받았기때문에 적들은 본부로 통하는 길목에 수비진을 쳐놓았다.

공격부대가 돌진해왔을 때 적들은 고루(鼓楼)의 옛 성루에 의지해 완강히 사수하고있었다. 하룡과 류백승(刘伯承)은 적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한편 일부 부대를 나누어 주변의 높은 성루에 올라 우로부터 고루의 적을 제압하게 하였다. 전사들은 사다리를 놓고 빗발치는 적탄을 무릅쓰고 12메터나 되는 성루로 올랐다. 이 공격부대에는 조선족 전사 강석필(姜锡弼), 김래준(金来俊), 홍범기 등이 있었다. 강석필은 동북 훈춘유격대에서 싸우던 독립군투사였다.

고루 옛성루 전적지의 옛건물

(권립 교수) 《강서성 구강으로부터 남창에 온 하룡장군의 제20군에도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 제5방면군을 맹공격할 때 적이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맹사격을 들이댔습니다. 12메터 높이나 되는 옛성루를 점령해야만 적을 진압할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강석필과 홍범기 등은 전우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무릎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끝내 옛성루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화력으로 적의 기세를 누르고 부대의 공격을 엄호함으로써 적의 지휘부를 짓부실수 있게 했습니다.》

조선인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앞장서 싸웠다. 강석필과 홍범기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루를 점령하였으며 기타 병사들은 높은 층집의 지붕에 올라갔다. 봉기군전사들이 사처에서 적 지휘부를 포위하고 우로부터 집중사격을 하자 적은 독안에 든 쥐신세로 되였다. 세시간 남짓이 저항하던 적들은 드디여 투항하고 주배덕은 도주해버렸다.

하룡부대의 조선인 전사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 등이 두려움 없이 싸워 적지휘부를 점령했다.  적 지휘부는 남창시 장강로(章江路) 67번지에 위치해있었다. 지금의 남창시 장강로 67번지에는 강서성 가무극원(歌舞剧院) 종업원사택이 있었다. 검푸른 벽돌로 축조된 3층 낡은 층집이 몇채 있었지만 모두 후에 건설된 건물이였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휘부길목을 지켰다는 고루도 언녕 없어졌다는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눈앞의 전적지를 보면서 머리에 치렬했던 그때 전투장면과 두려움 없이 싸웠던 우리 민족 전사들을 생각해보았다. 자랑찬 그들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기념되지 못하고있는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장강로를 떠나 다른 한 전적지 송백항(松柏巷)으로 가보았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 찾아보니 뾰족한 삼각모양으로 된 천주교교회당 건물이 나타났다. 교회당인것만큼 주소로 될만한 번지수가 명확히 밝혀있지 않았는데 주변의 가옥의 번지수를 보아 송백항 01-11번이였다.

교회당건물은 가운데가 4층정도 높았고 량쪽 날개부분 건물이 2층 정도였다. 가운데 아치형문이 있었고 문위로 원형창이 세개 있었다. 가운데 창이 컸고 량켠의 창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연분홍 칠을 한 교회당건물은 해빛아래 유난히 빛났다. 남창봉기에서 가장 치렬했던 전투가 바로 이 교회당주변에서 진행되였던것이다. 지금 보이는 이 교회당은 옛 건물을 보수한것이였다. 조선인투사 방월성(方月星)이 용감히 싸웠던 송백항 전적지에는 그래도 교회당이라는 표적이 남아있어 다행으로 느껴졌다.

 

송백항 천주교회당 전적지.

봉기군이 적 지휘부를 공략하자 적들은 혼란속에 빠졌다.

엽정부대는 두길로 나누어 송백항부근의 적과 공원(贡院)의 적을 공격하였다. 송백항부근의 전투는 매우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공격임무를 맡은 엽정부대 71퇀 전사들은 탄우를 무릅쓰고 돌진하였다. 제6군 57퇀의 적들은 천주교회당에 화력거점을 만들고 왕강히 사수하였다. 적은 중형무기를 집중하여 봉기군의 공격을 제압하였다.

비발치는 적탄으로 봉기군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후속부대가 당도하여 천주교회당을 포위했지만 적의 화력이 막강하여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었다. 계속 대치하고만 있을수 없었다. 이때 봉기군전사들이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몇몇 전사들이 나섰다. 조선인혁명가 방월성도 가슴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결사대는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계속 돌진하는 희생정신으로 전진하였다.

(권립 교수) 《적 제6군 57퇀을 소멸하는 전투는 너무도 치렬하였습니다. 적들은 송백향의 견고한 건물인 천주교회당을 거점으로 수많은 중기관총과 경기관총을 집중하여 미친듯이 사격하였습니다. 결사대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우리 민족 투사 방월성이 결사대에 참가했습니다. 결사대는 비발치는 총탄을 무릎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피로써 적진을 까부셨습니다.》

봉기군결사대가 혈로를 뚫고 전진하자 기타 전사들도 공격나팔소리와 함께 돌진하였다.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된 적들은 다투어 총을 놓고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송백항 천주교회당 공격전도 봉기군의 승리로 끝났다.

엽정부대의 72퇀은 공원부근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공원(贡院)은 옛날 향시(乡试)를 보던 곳이다. 옛날 서생들은 3년에 한번씩 공원에 와서 향시를 보고 향시에 합격되면 다시 과거를 보러 떠났던것이다. 남창의 공원은 지금 두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