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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28)—피의 교훈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25 08:29:53 ] 클릭: [ ]

광주답사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코스로 중산대학에 보았다. 20-30년대 수많은 조선인혁명자들이 중산대학에서 리론학습을 하면서 혁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광주답사를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지금의 중산대학과 20년대의 중산대학 위치는 판이하게 달랐다.

 오늘의 광주시 중산대학.

  령남대학 자리

중산대학은 주강이북의 시중심부근에 위치하였다. 문명로에 위치한 로신기념관이 중산대학 강당자리였다면 중산대학은 부근인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중산대학은 시중심을 벗어나 주강이남인 신항서로(新港西路) 령남로(岭南路) 부근으로 옮겼다. 이곳은 20년대 령남대학(岭南大学) 있던 곳이다. 지금은 령남대학도 중산대학에 합병되여 령남학원(岭南学院)으로 남아있을 뿐 이였다.

광주봉기는 3일만인 12 13일에 실패하고말았지만 아무런 후원도 없는 상황에서 령남대학부근에서 17일까지 5일간 전투를 견지한 봉기군부대가 있었다. 부대에는 60여명 조선용사들이 있었다.

 (권립교수): 《다른 한곳은 령남대학부근의 진지에서였습니다. 200여명의 봉기군이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고 몇배나 되는 적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그중에는 박영동지가 거느린 조선족소분대 60여명이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엽검영교도퇀 2 5련의 조선족전사들이였습니다.》 

광주봉기 첫날이였던 12 11 저녁, 주강이남으로 도주한 두목들을 추격하고 그곳의 리복림(李福林)부대를 제거하기 위해 봉기군은 돌격대를 조직하였다 

리복림부대는 비록 토비출신의 오합지졸이여서 전투력이 강하지 않았지만 수는 수천명에 달했다. 봉기지휘부에서는 전투경험이 결핍한 로동자적위대만으로는 임무를 완수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규군가운데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소분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쓸만한 정규군부대가 워낙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예부대를 편성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군사기술이 뛰여난 교도퇀의 조선인장병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2 5련의 박영이 조선인전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로동자적위대와 함께 도강돌격대를 편성하였다. 

12 박영은 돌격대 200여명을 거느리고 주강이남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령남대학부근에서 적과 치렬한 격전을 벌였다. 돌격대는 유리한 진지를 점령하고 우세한 적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13일이 되자 수많은 적의 정규군이 도착하였다. 전투력이 강한 설악(薛岳) 부대가 도착하여 리복림부대와 합세해 공격해왔다. 게다가 일본, 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함포가 주강을 차단하였다. 뒤에는 사품치는 주강이 가로막히고 적은 세면으로 포위 공격해왔다. 그러나 돌격대원들은 박영 지휘하에 침착하게 적과 싸웠다. 강이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들은 지휘부와의 련결이 끊어졌고 철수명령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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