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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0)—중국공산당 한인지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25 10:47:54 ] 클릭: [ ]

20세기 20년대말, 중국은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되였다. 공산당을 제치고 중국 정계를 독주하던 국민당은 심각한 파벌투쟁을 겪으면서 중국을 다시 전쟁속으로 이끌어갔다.

장개석은 국민당내의 실력자인 왕정위, 호한민(胡汉民)과 치렬한 파쟁을 진행하는 한편 새롭게 나타난 계서, 서북, 섬서 군벌들과의 치렬한 혼전을 치렀다. 장개석이 동북 장학량의 힘을 빌어 당생지(唐生智), 리종인, 풍옥상, 염석산의 공격을 막아낸 전쟁을 중국력사에서는 중원대전(中原大战)이라고 한다.

1930년까지 지속된 중원대전에 쌍방은 100여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3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전투에 능한 풍옥상의 서북군은 전장에서 수차 장개석부대를 타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장개석은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등에 업고 또 강소, 절강 지역의 매판자산계급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막강한 군력과 재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리간, 매수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와해시켰고 동북의 장학량을 자기쪽에 끌어들여 혼전의 승권을 잡게 되였다.

국민당 파벌투쟁과 군벌혼전으로 중국 전역의 천백만 인민이 도탄속에서 허덕이게 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통하여 전국의 혁명투쟁정세는 다소 호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피어린 투쟁속에서 탄생한 중국 로농홍군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농촌토지혁명을 전개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은 상악감(湘鄂赢)근거지, 악예환(鄂豫皖)근거지, 상악서(湘鄂西)근거지, 해륙풍(海陆豊)근거지, 악동(鄂洞)근거지를 비롯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해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또한 중국의 주요 도시에 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하고 로동자, 학생, 상인들을 발동해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권립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국민당반동파의 백색테로에 무장으로 항쟁할데 관한 우리 당의 방침에 따라 무장투쟁을 진행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많은 우리 민족 혁명가들이 남창봉기, 광주봉기, 해륙풍보위전투에 참가하였고 봉기가 실패한후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상해에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상해에 모였다. 이들은 계속 민족독립의 방략을 연구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은 1917년경에 시작되였다. 혁명선각자인 신규식이 조선사회당(朝鲜社会党)을 조직하고 당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1917년 9월에 개최된 세계사회당대회에 요구하였다. 이듬해 려운형(吕运亨), 조동우(赵东祐) 등이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한 신한청년당(新韩青年党)을 조직하였다.

몽양 려운형(1886~1947).

1919년에는 조선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쏘련으로부터 상해에 왔다. 그는 려운형 등과 함께 1920년 고려공산당(高丽共产党)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인공산주의자들 사이에도 파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국민당반동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수차 고려공산당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하였다.

외부적인 탄압과 내부적인 모순이 극대화되여 고려공산당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감안한 국제공산당에서는 일국일당(一国一党) 원칙을 제기하였다. 이른바 일국일당제란 한 나라에는 꼭 한개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집단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려운형, 안연흠(安然钦), 김원식(金元植), 현창건(玄昌健), 홍남표(洪南杓) 등이 상해의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이들은 1927년 9월에 중국인 3명을 포함해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韩人支部)로 되였다. 한인지부는 상해지부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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