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불멸의 발자취(32)—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 사적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29 06:09:15 ] 클릭: [ ]

강남의 명산 무이산(武夷山) 서쪽기슭의 풍요한 평지에 위치한 서금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였고 중국공산당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국민당은 수십만 병력을 끌어모아 서금을 중심으로 한 쏘베트지역을 포위토벌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홍군과 광범한 로농대중을 령도하여 적의 포위토벌에 대항하는 한편 쏘베트지역내에서 활발한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땅 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분여하고 농민들을 압박, 착취하던 악패지주들을 제거하였다. 쏘베트지역 인민들은 드높은 열성으로 생산에 뛰여 들었고 홍군을 도와 적의 공격을 물리쳤던것이다.

우리는 서금시 선전부의 도움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우선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유적지로 가보았다. 차는 323번 국도와 326번 국도가 사귀는 곳으로 빠져 쏘베트정부 설립지였던 엽평(叶坪)으로 달렸다.

서금은 강서성동남부의 주요 도시로서 강서, 복건, 광동 3성을 이어주고있었다. 고대에는 서금을 양주역(杨州域)이라고 불렀고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을 통일한 다음 구강군(九江郡)에 귀속시켰다. 그후 953년,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서금은 1994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서금시구역을 벗어나 동으로 약 3킬로메터 가니 엽평향 엽평촌 마을이 나타났다. 중화쏘베트 제1차전국대표대회 유적지는 바로 엽평촌마을에 있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여 국내외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있었다.

중앙쏘베트정부가 수립되였던 서금의 엽평촌.

유적지는 잘 보수되여있었다. 정원에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에 고풍적인 건물이 눈에 띄였다. 흰 바람벽에 조그마한 창이 한줄로 배렬되여있었고 깃을 쳐든 검은 기와는 건물의 위엄을 보태주었다. 현지 대지주가 사당으로 사용하던 이 건물은 사씨사당(谢氏祠堂)이라고 하였는데 객가인(客家人)의 전통적인 3진원(三进院) 구조였다.

사당은 2층이였는데 건물은 중심부분의 빈 공간을 둘러싸고 축조되여있었다. 1931년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 이곳에서 제1차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던것이다. 대회에서는 쏘베트림시중앙정부를 수립하고 모택동을 정부주석으로 선거하였다.

쏘베트림시중앙정부 수립은 모택동과 주덕이 거느린 홍군이 국민당반동파들의 3차례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친 토대우에서 이룩되였다. 당시 상해의 중국공산당중앙은 홍군으로 하여금 대도시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모택동은 현실을 정시하고 적의 예봉을 피해 약한 적을 각개 섬멸하는 전략전술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홍군 1군단과 3군단은 장사와 남창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복건서부로 진격하였다.

1930년말부터 1931년중순까지 홍군주력부대는 적을 깊이 유인하고 각기 포위, 섬멸하는 령활한 전술로 국민당 반동파들의 세차레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홍군의 사기는 전례없이 높았고 근거지도 많이 확대되였다. 그리하여 로동자, 농민들을 대표로 하는 쏘베트중앙정부를 수립할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였던것이다.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던 사씨사당강당 정면벽에는 붉은기와 모택동, 주덕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강당에는 수십명이 앉을수 있는 나무 걸상이 있었는데 서서 방청하는 사람까지 합쳐 수백명 정도를 용납할수 있었다. 강당량켠에는 널판자로 막은 작은 칸들이 있었으며 칸마다 천으로 문을 대체하고있었다. 방에는 침대 하나와 책상, 걸상 하나씩 놓을수 있는 정도였다. 칸마다 조그마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외교인민위원회, 군사인민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로동인민위원회이라고 씌여진 명칭을 보아 당시 림시중앙정부 어느 부서의 집무실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이 시기 상해한인지부에서 파견되여 온 조선혁명가 최정무(崔政武)가 조선인대표로 이 정부수립대회에 출석해 연설까지 하였다.

 

1차 쏘베트대회에 출석한 최정무.

최정무(1910--??) 일가는 일찍부터 로씨야우쑤리스크에 이주하였고 최정무도 그곳에서 태여났다. 로씨야 10월 혁명이후 자유와 해방을 받은 최정무일가는 토지를 분여받았고 최정무는 우쑤리스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에게 짓밟히는 조선과 일제수탈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생각하니 자기만 편히 지낼수 없었다. 그리하여 16살나던 1926년, 최정무는 혁명의 열의를 안고 중국 상해로 왔다. 그는 상해에서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군관학교의 기술주임 교관이였던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장개석이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자 최정무는 학교병원에 몸을 숨겨 적들의 탄압을 피했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그는 도보로 상해 당조직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인 서금에 와서 홍군군사기계수리소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홍군 후방정치부 주임이였던 모택담(毛泽覃)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고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모택담은 모택동의 셋째 동생이였다.

(권립 교수): 《중화로농쏘베트 제1차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열렸습니다. 조선족홍군전사 최정무가 조선족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가했고 대회에서 발언했습니다. 그는 형제민족대표들과 함께 모택동동지를 주석으로 하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성원들을 선거하였습니다.》

1931년 11월 7일, 전국 쏘베트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소집되자 최정무는 600여명 대표의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가했고 또 발언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였다. 나어린 최정무는 몹시 격동되였고 또 많이 긴장되여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하였던 말을 죄다 잊어버리고 대회축사를 하였든지 자기 결심을 발표했든지 기억에도 남지 않는 말을 하였다고 훗날 이야기하였다. 최정무가 연설대에서 내려오자 주석대에 앉았던 모택동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모택동은 최정무의 손을 잡고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자상히 물어보았다 한다.

서금시 엽평향 사씨사당에서 소집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는 중화쏘베트 림시중앙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중화쏘베트공화국 헌법대강》을 반포하였다. 대회는 또 여러 가지 법령과 조례를 반포하고 모택동, 주덕, 주은래, 항영, 류소기 등 63명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다.

대회가 있은후 회의가 있었던 사씨사당 강당을 15개 작은 칸으로 나누어 림시정부 각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후 최정무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학교 사무장사업을 하다가 홍군 1방면군 제22군의 부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1년 4월 국민당의 제2차포위토벌이 시작될 때 최정무는 련 지도원으로 임명되여 전선에서 적과 싸웠다. 1933년,적의 제4차포위토벌을 물리치는 전투에서 최정무는 적탄에 바른쪽 발목을 맞고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치료를 받아 탄알을 뽑았지만 그는 지팽이를 짚고다닐수밖에 없었고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였다. 당에서는 그를 병원에 남아 당총지부 서기 겸 지도원으로 사업하게 하였다.

1934년 10월 홍군은 장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병원에는 200여명 중상자들이 있었다. 최정무는 100여명 의료일군들과 함께 중상자들을 일반인 가정에 숨겨두고 대부대를 따라 감주로 떠났다. 100여명이 한데 몰려 움직일수 없었기때문에 다시 소분대로 나누어 행동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흩어지고말았다.

최정무는 호북의 농민으로 위장하고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는 먼길을 도보로 걸어 1936년 상해에 도착하였지만 려운형선생과 기타 조선혁명자들을 찾지 못했다. 1937년 《7.7》사변이후 최정무는 무한, 개봉 등지를 다니며 공산당부대를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섬북으로 가던 길에 국민당군의 강제징병에 끌려가게 되였다. 국민당부대에서 그는 국민당통신부대 두목을 설득하여 수십명 통신병을 이끌고 태항산의 팔로군을 찾아갔다. 팔로군을 찾은 최정무는 무정(武亭)이 거느린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는 1931년 11월부터 1933년 4월까지 엽평에서 사무를 보았다. 후에 변절자가 나타나 중앙정부위치가 적들에게 폭로되였기때문에 사주패(沙洲坝)로 자리를 옮겼다.

대회가 개최되였던 강당주변의 위층방에는 당시 쏘베트 주요 지도자들의 거처로 사용되였다. 강당에 서 있노라니 간소하고도 열렬했던 당시 대회모습을 그려볼수 있었다. 더우기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대회에 참가하였다니 같은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였다.

모택동이 기거하였던 집.

사적지의 해묵은 나무.

총알모양의 홍군렬사기념탑

사씨사당 주변에는 또 단층집 몇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기념관전시물들이 진렬되여있었다. 단층과 2층으로 된 집들은 모두 검은 기와에 귤색회칠을 해놓아 더욱 정겹게 보였다. 일조가 강한 남방이여서 그런지 집마다 모두 창과 문이 매우 작은것이 인상적이였다. 정원은 매우 컸다. 푸른 잔디가 깔려있고 거대한 고목이 무성한 정원은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정원오른쪽으로 조약돌을 깐 유보도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니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홍군광장이였다. 광장 가운데는 포탄모양으로 만든 십여메터 높이의 붉은 기념탑이 세워져있었다. 홍군선렬기념탑(红军先烈纪念塔)이였다. 기념탑맞은편에는 조그마한 홍군검열대(红军检閱臺)가 설치되여있었는데 당시 주요 지도자들이 홍군들을 광장에 모여놓고 연설을 하거나 부대훈련을 검열하기도 하였다.

검열대는 또 공연무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검열대로부터 기념탑까지 검은 숱을 바른 돌로 선렬들의 발자취를 따라 (蹋着先烈的足跡)》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당시의 기념탑은 국민당에게 파괴되였고 이 탑은 후에 복원된것이다.

/ 김성룡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