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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6)—홍색간부퇀 참모장 양림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31 08:26:33 ] 클릭: [ ]

1933년 중화민족은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되였다. 1934년 5월 31일,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남경정부를 협박하여 이른바 굴욕의 《당고협정(唐沽协定)》을 체결하였다. 드넓은 화북도 동북과 마찬가지로 일제에게 먹혀버릴 위기를 맞게 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외적의 침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홍군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였다.

그는 남창에 사령부를 앉히고 직접 중앙쏘베트지역에 대한 제5차 토벌을 지휘하였다. 장개석의 이러한 정책은 전국인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편 1934년 10월, 왕명의 좌경모험주의의 그릇된 령도로 하여 중앙혁명근거지는 막강한 적의 공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력홍군의 대이동을 시작하게 되였다. 제5차반포위토벌전의 실패로 하여 홍군 제1방면군의 주력은 장정을 시작하고 부분적인 홍군부대를 남겨 유격전쟁을 견지하도록 하였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중국로농홍군 주력부대는 장강남북 쏘베트지역으로부터 대규모의 이동작전을 개시하여 수많은 난관을 뚫고 승리적으로 섬북혁명근거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진감한 위대한 2만 5천리 장정이다.

중국로농홍군의 장정에는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참가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이 양림과 무정이다.

(권립 교수) 《중앙쏘베트구역의 조선족동지들은 2만 5천리 장정이 시작되자 모두 세계를 진감한 이 장정의 길에 올라섰습니다.》

답사팀은 서금에서 홍군장정길의 첫 산으로 불리우는 운석산(云石山)을 답사하였다.

서금에 도착한 첫날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참가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 엽평과 조선혁명가 양림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제2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 사주패유적지를 답사한 다음 오후 시간을 내여 홍군장정의 운석산유적지에 가보았다.

목적지는 서금시서부에서 19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운석산은 홍군이 장정을 시작한 첫 출발지로서 사주패를 떠난 모택동, 장문천(張聞天)을 비롯한 당과 정부 지도자가 한동안 사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다.

운석산으로 가는 길 한구간은 보수중이여서 도로상황은 좋지 않았다. 광동에서 오는 많은 화물차들이 길이 막혀 《거부기 걸음》을 하고있었지만 우리 차는 먼지를 일구며 다른 편으로 달려 쉽게 빠져 나올수 있었다. 길을 보수하느라 이곳저곳 파놓았는데 진붉은 토색이 퍽 인상깊었다. 동북의 검은 흑토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안내를 맡은 선전부의 뢰우정씨가 《이곳 홍토는 동북의 흑토보다 토질이 떨어지고 영양성분도 적다》고 알려주었다.

드넓은 벌을 지나면서 불현듯 홍군이 무엇때문에 이곳에 중앙쏘베트지역을 개척해놓았는지 짐작이 갔다. 지형적인 우세가 있었던것이다. 서금은 강남의 《중원》이라고 할수 있다. 북으로는 장강을 건너 화북대지와 이어져있고 동서로 무이산과 정강산이 있었다. 또 남으로는 광동과 잇닿아 쉽게 광동으로 남하할수 있었다.

남북으로 자유로이 진출할수 있고 적의 예봉을 피해 쉽게 동서산속으로 피할수 있는 장점을 가진 참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라고 생각되였다. 이러한 지역은 유격전과 운동전을 전개할수 있는 적성지였다. 홍군은 공격시 감강평원(贛江平原)으로 신속히 공격할수 있고 적의 력량이 강하면 쉽게 정강산이나 무이산쪽으로 철수할수 있었다. 또 강과 호수가 많은 구릉지대에 의지해 적과 유격전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강기슭의 넓은 벌을 지나 조금 더 달리니 조그마한 산들이 나타났고 얼마 안되여 운석산에 이르렀다. 산은 높지 않았고 우거진 나무숲사이로 회색돌들이 삐죽삐죽 보였다. 이곳 지질구조는 아주 특이하였다. 산은 대체로 돌로 이루어졌는데 돌들은 모두 뾰족뾰족 모가 나있었다.

홍군 장정길의 첫 산으로 불리우는 운석산.

운석산 옛터에 대한 안내문.

1934년, 중앙쏘베트지역은 국민당의 제5차포위토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였다. 국민당은 동북을 강점하고 상해를 공격하는 일본침략자들과는 계속 타협하면서도 50만 대군을 풀어 홍군을 토벌하였다. 당시 중국의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쏘련혁명의 성공경험을 공식적으로 답습하는 공산당중앙지도부의 좌경로선(左傾路線)으로 하여 홍군은 처절한 실패를 보게 되였던것이다.

홍군주력부대는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우세한 적을 정면으로 대항하여야 하였다. 서금으로 통하는 길목인 광창(廣昌) 보위전에서 홍군은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적은 사면으로 중앙혁명근거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폭격과 공격이 심했기때문에 중앙쏘베트정부는 계속 사주패에서 사무를 볼수 없게 되여 1934년 7월에 중앙정치국과 중앙 쏘베트 정부, 중앙군사위원회를 비롯한 핵심 기관이 모두 운석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3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주력홍군은 운석산에서 출발하여 장정을 시작하였던것이다.

운산고사

운석산에는 운산고사(雲山古寺)라는 옛 절이 있었다. 산밑에서는 괴석과 나무에 가리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불꼬불한 돌계단을 따라 산을 오르면 산정의 평지에 진한 귤색 회칠을 한 절이 보인다. 절은 규모가 퍽 작아 정원과 찌그러진 단층 방들이 있을뿐이였다. 운산고사주변 나무숲에는 돌로 된 걸상, 탁상 등이 있었다. 산에 오르는 가파른 돌길에는 두개의 석문이 있었다. 《한사람이 막아서면 만명도 지날수 없다》는듯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리고 산정에는 돌로 만든 여러 개의 수비진지가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적이 공격해 오기전에 홍군은 이미 장정을 떠났기때문에 이곳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권립 교수) 《장정이 시작되자 중앙근거지 홍군대학과 기타 세개 홍군군사학교의 장병들로 홍색간부퇀을 편성했는데 조선족혁명가 양림이 이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34년 10월, 제5차 반포위 토벌전의 실패로 중앙홍군과 중앙령도기관의 지도자들은 운석산으로부터 장정을 시작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중앙직속 홍색간부퇀(紅色幹部團)의 참모장으로 장정길을 떠났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1만 6000여명 홍군을 중앙쏘베트지역에 남겨 투쟁을 견지하게 하고 제1방면군 5개 군단과 중앙기관 간부, 공장로동자, 일부 민부 도합 8만 6000여명이 장정을 시작하였다. 팽덕회의 홍군 제3군단이 우익을 맡고 림표가 거느린 홍군 제1군단이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5군단이 후위를 맡고 중앙기관은 엽검영을 사령원으로 하는 중앙종대를 편성하였다. 양림의 홍색간부퇀은 중앙종대에 소속되였다.

중앙기관은 운석산으로부터 출발하였고 기타 홍군주력은 서금, 우도(于都), 장정(长汀), 녕화(宁化)로부터 출발하였다.

장정에 나선 양림은 간부퇀 참모장으로서 줄곧 당중앙을 따라 행동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

홍군주력부대는 국민당의 세겹의 포위를 뚫고 12월 1일에는 네번째 천험인 상강(湘江)을 돌파하게 되였다. 모택동은 적이 미리 포위권을 만들어놓은 상강을 건너 홍군 제2, 제6군단과 회합하려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적 병력이 약한 서부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의견은 접수되지 않았고 홍군은 흥안(興安), 전주(全州)사이로 상강을 건느게 되였다. 상강에서 홍군은 적과의 치렬한 혈전을 전개하였고 홍군의 수만 우수한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중순,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드디어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홍군은 제2, 6군단과의 회합계획을 포기하고 적의 병력이 약한 귀주성으로 진격하였다. 1935년 1월에 홍군은 준의(遵義)를 점령하고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준의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때로부터 모택동은 다시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게 되였고 그의 정확한 전략, 전술에 따라 홍군은 겹겹한 적의 포위를 뚫고 승리적으로 진군할수 있게 되였다.

귀주성까지 도착하자 홍군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투원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당과 홍군의 중견간부들로 이루어진 홍색간부퇀마저 전투에 투입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양림은 정위 송임궁(宋任窮)과 함께 퇀장인 진갱(陳賡)을 도와 장병들을 거느리고 력차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중견간부들로 이루어진만큼 간부퇀의 전투력은 막강하였다. 그들은 늘 관건적인 시각에 관건적인 위치에 나타나 적들에게 치명타를 안기며 홍군의 불리한 국면을 돌려세웠다.

(권립 교수) 《준의회의가 끝나자 홍군은 적수를 네번 건느는 대규모적인 치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양림이 거느린 간부퇀은 앞장서 이 전투에 뛰여들었습니다. 구성의 로압산근거지를 쟁탈하는 투쟁을 간부퇀에서 맡았을 때였습니다. 양림은 퇀장이였던 징갱과 함께 전사들을 거느리고 용맹히 돌진하여 적진을 돌파하고 3000여명을 포로함으로써 훙군장정이래의 첫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계속해서 양림은 운남, 사천, 귀주를 우회하면서 수십배나 되는 적과 격전하였습니다.》

준의회의후 홍군은 기동령활한 운동전을 펼쳤다. 적수하를 네번 건너면서 홍군의 이동의도를 은페하고 적의 계획을 파탄시킨후 남쪽으로 오강(乌江)을 건너 적 병력이 적은 귀주성내로 진격하였다.

1935년 4월 29일, 중앙에서는 금사강(金沙江)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였다.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와 총참모장 류백승(劉伯承)이 직접 간부퇀에 찾아와 전투임무를 하달하였다. 당중앙 총서기 장문천(張聞天)은 간부퇀 장병들을 모아놓고 금사강도강작전의 중요성을 설명하고나서 5월 1일전으로 꼭 나루터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양림은 직접 한개 련을 거느리고 간부퇀의 앞장에 서서 돌진하였다. 부대는 더위를 무릅쓰고 일주야에 180리길을 달려 교평(絞平)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양림은 나루터부근의 적정을 정찰한후 소규모 병력으로 나루터를 기습할 계획을 내놓았다. 홍군전사들은 감쪽같이 보초병을 제거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적 60여명을 전부 생포하였다.

(권립 교수) 《5.1절전야 나루터에 도착한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비호처럼 적진에 뛰여들어 나루터에 있던 적들을 생포하고 금사강나루터를 번개같이 점령했습니다. 5월 1일, 날이 밝자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금사강 나루터를 확보하기 위해 적의 중요한 거점인 통안진을 강점하라고 홍색간부퇀에 명령하였습니다. 양림은 한 개 영을 거느리고 화염삼고지를 점령하려 떠났습니다. 화염산만 점령하면 통안주의 적들이 금사강나루터로 올수 없기때문에 양림은 앞장서 결사적으로 돌진해 끝내 화염산고지를 피로 점령하고 통안주까지 내밀어서 중앙홍군으로 하여금 금사강을 건느도록 담보했습니다.》

교평나루터를 확보한 다음 양림은 명령을 받고 통안진(通安鎭)으로 갔다. 그는 간부퇀정찰부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세를 점한후 통안진을 공격하였다. 치렬한 전투를 거쳐 5월 1일 황혼무렵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600여명 적을 포로하고 통안진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서 홍군은 12명 사상자밖에 내지 않았다. 군사위원회에서는 교평나루터 기습작전과 통안진공격전에서 공을 세운 간부퇀을 표창하였다.

금사강을 건넌 홍군은 수십만 적을 뒷전에 내치고 곧추 서북으로 진격하였다. 홍군은 가는 곳마다 정확한 군중정책과 민족정책을 선전하였기때문에 소수민족을 포함한 많은 인민의 지원을 받아 대도하에 도착하였다. 영웅적 홍군전사들은 강철의 의지로 시간과 공간을 줄이면서 주동을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로정교(瀘定橋)를 탈취하고 승리적으로 대도하(大渡河) 천험을 돌파하였으며 만년설이 뒤덮힌 협금산(夾金山)을 넘어 1935년 6월에 무공(懋功)에서 홍군 제4방면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금사강을 건넌 양림은 부대와 함께 도보로 설산과 초지를 지나 1935년 10월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여 새로운 전투를 시작하였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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