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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41)—불굴의 투사 김산①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9-07 12:45:20 ] 클릭: [ ]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겹겹한 적의 봉쇄를 뚫고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온 미국 기자부부가 있었다. 《중국의 붉은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와 그의 부인 헬렌이였다. 해방후 헬렌의 유명한 저서 《아리랑》이 출판됨에 따라 비운의 조선혁명가 한사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니 그가 바로 김산이다.

1936년 삼엄한 경계선을 넘어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들어온 스노부부는 비밀리에 초대되여 모택동을 만났다. 그리하여 스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붉은별》을 쓰게 되였고 헬렌은 조선혁명가 김산을 만나 님웨일즈라는 필명으로 그후 《아리랑》을 펴내게 되였던것이다. 《아리랑》 영문판이 출판되자 곧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로 번역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련속이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력사도 실패의 력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력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있다. 력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되는 피억압자뿐이다....》

이는 책에서 적고있는 김산의 마음속 고백이였다. 위험천만한 백색테로하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항쟁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김산, 그는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피압박자들의 승리를 확신한 공산주의자였다.

한국 동녘출판사에서 출판한 님웨일즈의 《아리랑》.

《아리랑》의 저자 님웨일드(본명은 헬렌).

섬북에 있을 때의 조선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

김산의 원명은 장지락(張志樂)이다. 그는 1905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平安北道) 룡천군(龍川郡) 하장동(河張洞)의 한 자작농 가정의 셋째로 태여났다. 그는 일찍 장명(張明), 한산(寒山), 장북성(張北星), 장지학(張志鶴) 등 여러가지 변성명을 하고 혁명과 지하투쟁에 참가하였다.

어린 시절 김산은 둘째형의 도움으로 기독교회에서 꾸리는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그는 많은 평양시민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또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탄압을 목격하였다. 하느님만 믿는 기독교 교의로는 투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없다고 판단한 김산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으며 불타는 구지욕으로 진리를 터득하려 하였다.

1919년 여름, 김산은 일본에 가서 도꾜제국대학에서 고학하였다. 그는 매일 신문을 배달하고 인력거를 끄는것으로 학비를 마련하였다. 이시기 그는 일본에서 맑스주의를 접촉하게 되였고 드디어 쏘련 모스크바에 가서 구국의 길을 찾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구두방을 운영하여 돈을 번 둘째형의 도움으로 중국의 할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쏘련 국내전쟁이 끝나지 않았기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가 없었다.

김산은 다시 할빈을 떠나 동북의 조선독립군을 찾아갔다. 료녕성 삼원포에 도착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운영하는 신형의 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와 전술, 무기, 력사를 배웠다. 1920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한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김산은 시골에만 파묻혀있을수 없다고 판단하고 상해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협회가 있어 《독립신문》을 출간하였는데 김산은 신문사에 취직하였다. 그뒤 림시정부에 실망을 느낀 김산은 의학으로 사람들을 구할 념원을 안고 북경협화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북경에서 김산은 공산주의리론을 학습함과 더불어 많은 진보적 인사들을 만났으며 실천적 혁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 상해에서 출간한 독립신문

《불멸의 발자취》 취재팀은 김산의 행적을 따라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였다.취재팀은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와 함께 향산공원에 가서 김산의 활동지들을 찾아보았다.

(최룡수 교수):《향산공원은 중국혁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입니다. 리대소가 북평에 있었던 20년대에 리대소는 조선혁명자 김일학, 김상지 등 7명을 이곳에 파견해 비밀활동을 진행했습니다. 30년대에는 김산이 향산기슭 마을에서 당원훈련반을 조직하였습니다. 졸업생중에는 조진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진중은 항일전쟁시기 조선인 박일우가 현장을 지냈던 평서지구 공산당현위서기로 있었고 해방후 문화혁명시기에는 하북성인대 상임위원회 부주임까지 지냈습니다. 1932년, 최용철이라는 조선인이 향산자유원의 보안대 대장을 하면서 항일사업하였는데 후에 그는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사하였습니다. 리철부의 한족부인 장수암도 20년대에 여기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향산 저 골짜기에서 〈12.9〉학생운동의 학생간부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습니다.》

일찍 중국공산주의동맹의 창시인인 시존통(施存通)을 알게 된 김산은 1923년 중국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당시 북경에는 800여명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중 약 300명이 류학생들이였다.

김산은 동료들과 더불어 《혁명》간행물을 발간하였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들인 리대소, 구추백 등과 사귀면서 맑스주의리론을 학습하였다. 리대소는 《혁명》잡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산도 장북성이란 이름으로 맑스주의리론저서들을 번역하여 잡지에 발표하였다. 《혁명》잡지는 공산주의를 동정하는 사람들과 무정부주의자, 좌익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북경의 조기 공산주의선전간행물로 되였다. 그 창간호는 800부 인쇄되여 만주, 조선, 시베리아, 미국, 희랍 등 각지 조선인들에게 배포되였다. 이시기 김산은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실제적인 행동을 중시하는 김산은 만강의 열정을 안고 당시 중국혁명의 요람이였던 광주로 갔다.

북경 협화병원 학원부

조선혁명가들이 많이 집중되였던 광주 황포군관학교 옛터

광주봉기 렬사기념탑

광주봉기에 관련한 김산의 회억자료

취재진은 김산의 행적을 따라 광주에 도착하였다. 어둠에 싸인 공항에는 보슬비가 내렸고 열대에 가까운 남방이라지만 역시 추웠다. 광주의 2월은 가장 추운 때라고 한다. 번화한 거리에 이따금씩 조선음식점간판이 보였다. 개혁개방에 따라 광주에도 많은 조선족이 모여산다는 표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의 일부 사람들은 엄청난 공장과 회사를 가지고있고 많은 부를 창조하고있다. 지금으로부터 근 80년전인 20년대, 혁명의 열의를 안고 투쟁에 뛰여든 우리의 주인공 김산은 오늘의 광주에 어떤 자취를 남겨놓았을까? 우리는 강한 호기심에 휩싸여있었다.

김산은 광주에서 의렬단 단장 김약산, 공산주의리론가 김규광 등과 더불어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부의 령도성원으로 활동했고 광주의 모든 조선혁명가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조선혁명청년련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김산은 대회에서 조직위원으로 선출되고 1927년에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다. 김산은 또한 김규광(김성숙)과 함께 조선혁명청년련맹의 기관신문지인 《혁명행동》을 출간하였으며 김규광이 주필을 맡고 김산이 부주필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산대학에서 경제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권립 교수) :《1926년 광주에는 800여명이나 되는 우리 민족 혁명가들이 활동하고있었습니다. 김산은 그들을 묶어세우기 위해 조선혁명청년련맹을 조직했고 6명밖에 안되는 우리민족 당원들로 K.K라는 지하당조직을 건립하여 청년련맹을 이끌었습니다. 김산은 중산대학 법과에 입학하여 법률과 철학도 배우고 영어, 독일어, 로어까지 배웠습니다.》

김산은 김규광, 박진, 오성륜을 비롯한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김산이 《아리랑》에서 회억한데 의하면 그는 주로 모스크바홍군대학 포병과를 졸업한 양달부와 함께 사하전투에 참가하였고 쏘베트정부 설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봉기지휘부에서는 김산을 엽정의 수행통역으로 임명하였지만 양달부가 한어를 잘하지 못했기에 그의 통역도 겸하게 되였다. 그들은 사하전투에서 30여명 적을 격살하고 2,000여명을 항복시키는 전과를 올린후 군벌 리제심의 12사단 지휘부 공격임무를 맡았다.

양달부는 포를 조준하여 첫방에 리제심의 저택 지붕을 까부셨고 두번째는 적 지휘부 근처를 포격하였으며 세번째에 정확하게 적 지휘부청사 2층을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10일 저녁까지 광주시의 주요거점을 전부 점령하게 되였다.

12월 11일 새벽, 광주쏘베트정부가 광주시공안국에서 설립되였다. 김산과 최용건을 비롯한 7,8명 조선혁명가들도 설립대회에 참가하였다. 김규광은 쏘베트정부에서 반혁명을 진압하는 사업을 맡았고 김산은 로동대중에게 무기를 내주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쏘베트림시정부의 수립을 경축하는 시민들의 환호소리가 멈춰지기도 전에 적의 포성이 다시 울렸다. 재정비를 거친 적들은 광주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치렬한 전투에서 봉기지도자인 장태뢰도 전사하였다. 200여명 조선혁명자들도 적과의 싸움에서 희생되였다. 13일, 김산이 주석을 맡은 조선청년련맹회의가 중산대학에서 열렸다. 그들은 봉기실패후의 출로를 연구한후 일부 혁명자들을 남겨 지하투쟁을 견지하게 하고 일부는 부대와 함께 철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사품치는 주강의 물결은 혁명자들의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생존자들은 비 내리는 거리를 빠져나와 새로운 항쟁의 길로 계속 달렸다. 김산은 교도단을 따라 더없는 영광과 아픔을 안겨준 광주를 떠났다. 그는 군관교도단 전사들과 함께 대과령, 번우진, 화현을 거쳐 1928년 1월 9일에 팽배가 이끄는 해륙풍농민근거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광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광동에 모여든 수많은 반동군벌들은 병력을 집중하여 다시 해륙풍으로 추격해왔다. 김산과 해륙풍 근거지의 군민들은 새로운 전투를 맞이하게 되였다. 더욱 치렬한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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