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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19)—토지개혁 상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07 15:08:20 ] 클릭: [ ]

길림군구 군사자료를 보면 1946년 상반기 동북전역에 분포된 150만 조선족주민가운데 70만이 길림성에 살았고 약 60만이 연변지역에 집거해있었다. 이는 연변지역 총인구수의 80%를 점했다. 그리고 군구부대에는 조선족 간부와 전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례하면 길동부대 2만명중 1만 2000명이 조선족으로서 64%를 점했고 기타 부대에도 10%내지 30%를 점했다. 이처럼 당시 동만근거지의 80% 인구를 차지한 60만 조선족군민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공산당을 따라나섰고 공고한 동만근거지를 건설하는데 적극 기여했던것이다.

연변지역이 동만근거지의 정치, 군사 중심으로 변하게 된후 길림성 당위원회와 정부는 더욱 공고한 근거지를 창건해 전선을 유력하게 지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토비숙청을 기본적으로 완수한후 우선 일제통치시기 일제를 등에 업고 광범한 농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했던 주구들을 철저히 청산함으로써 농민들의 열성을 불러일으켰고 성세호대한 토지개혁을 진행해 생산을 크게 발전시켰다. 주구청산과 토지개혁, 정권건설과 전선지원 사업에서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우리 민족 학원들이 동원되여 많은 일을 했다.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제9기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상장.

동북군정대학에서 학습했던 제9기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인 조남기상장은 당시 우리 당의 사업을 이렇게 소개했다.

《민주혁명시기 공산당은 주로 3가지 큰일을 틀어쥐였습니다. 하나는 토지개혁인데 농사짓는 사람마다 자기 땅이 있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큰 사업이고 혁명입니다. 말하자면 토지혁명입니다. 다음, 기층정권을 건립하는 사업이였습니다. 처음엔 정권이 없었습니다. 향정부, 구정부, 구라고했는데 지금의 향에 버금가는 행정단위였습니다. 정권수립 사업이였습니다. 세번째는 전선지원입니다.

토지개혁후 생산을 발전시키고 전선지원을 힘있게 추진했습니다. 사람마다 다투어 참군하고 전쟁에 참가하는 이런 세가지 임무였습니다. 종합하면 토지개혁, 정권수립, 전선지원 세가지 일이였습니다. 전선지원을 본다면 세가지 형식입니다. 참군하는것으로 직접 전선에 나가고 또는 담가대, 의료대를 조직해 전선에 나갔습니다. 제1선에서 싸우지는 않고… 세번째 형식은 농사짓고 신을 만들고, 지금처럼 신을 만드는것이 아닙니다. 헝겊신을 만들고 쌀을 생산해 모두 전선에 보냈습니다. 이면에서 조선족은 특수한 기여가 있습니다.》

동북에 들어온 공산당은 처음에는 항일전쟁시기부터 해방구에서 실시해오던 감조감식투쟁을 진행하였고 지주와 부농을 타격하고 빈곤한 농민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고 토비들을 숙청하면서 광범한 빈고농민들의 리익을 대변해주었다.

1946년 상반기, 할빈에 도착한 공산당동북국에서는 《7.7》회의를 열고 토비숙청과 더불어 동북의 광범한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하기로 했다. 감조감식투쟁과는 달리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사람마다 농사 지을 밭이 있게 할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토비숙청을 비교적 일찍 완수하고 비교적 공고한 동만근거지를 창건한 연변지역에서 남먼저 성세호대한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였다.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수만명 간부들이 농촌공작대를 조직해 농촌에 내려가 군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제통치시기의 부일배거나 지주들을 청산하고 토지를 빈고농에게 나누어주었다.

 

노래와 공연으로 토지개혁을 선전하는 공작대원들.

추위를 무릅쓰고 땅을 나누고있는 농민들.

흑룡강에서의 토지개혁 한장면.

연변의 사학자 박창욱교수가 소개한데 의하면 일제통치시기 동북의 토지는 대부분 《동양척식회사》 《동아권업회사》 《만주척식회사》를 비롯한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경제적 략탈기구거나 친일주구 그리고 대지주들의 수중에 장악되였다. 그리고 이른바 개척지, 국유지, 군용지와 같은 공유지가 많았다. 때문에 가난한 농민은 한해동안 뼈 빠지게 농사를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연변지역에서의 토지개혁은 1946년 7월부터 본격 진행되였고 1948년 4월에 기본적으로 끝났다. 이를 위해 조선족간부 500여명을 포함한 800명 간부들이 농촌공작대로 농촌에 내려갔다. 그들은 군중을 발동해 일제주구와 대지주를 찾아내 투쟁하였고 남아도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동북군정대학에서 공부한 조남기장군도 당시 토지개혁공작대에 참가했다고 이야기했다.

《동북군정대학 1,300여명 가운데 토지공작대로 다섯을 뽑았는데 내가 뽑혔습니다. 길림군구 토지공작대로 되였습니다. 어디로 갔는가하면 룡정인데 그때는 연길현이라고 했습니다. 평안구가 바로 지금의 동성입니다. 모아산 넘어 있습니다. 거기서 토지개혁을 했습니다. 나는 거기서 3개 마을을 책임졌습니다. 그때 한마을에 7, 8명 정도 토지개혁공작대가 있어 땅을 평균으로 나누었습니다. 빈하중농에게는 좋은 토지를 주고 부농에게는 조금 나쁜 땅을 주었습니다. 나는 또 두가지 일을 겸해 했습니다. 하나는 야학을 꾸려 저녁에 공산당정책을 학습하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김시룡과 같은 농업선줄군을 양성했습니다.》

1946년 10월에 연길시 서광장에서 일제주구들을 청산하는 대회가 열렸다. 장시기 일제와 부일배들의 압박과 수탈을 받아오던 수천명 군중이 광장에 모여 놈들의 죄장을 소리높이 성토하였다. 연길현 하동의 김신숙녀성은 《9.18》사변후 일제를 도와 연길현 해란구에서 1,700여명 반일간부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하동자위단의 죄를 공소하였다.

최남순을 단장으로 하는 친일조직인 하동자위단은 왜놈을 이끌고 마반산, 하동, 소영자 등지에서 전대미문의 《해란강참사》를 빚어냈다. 연길에 내려온 농촌공작대는 김신숙의 남편 김학군이 남긴 유서에 따라 하동자위단의 죄를 알게 되였고 조사를 거쳐 최남순을 비롯한 18명 부일배들을 체포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투어 부일배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장을 성토했으며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놈들의 죄장을 성토하는 대회는 사흘동안 지속되였고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은 마침내 쌓이고 쌓였던 원을 풀게 되였다. 대회가 있은후 공작대는 인민의 념원에 따라 최남순을 비롯한 부일배들을 사형에 처했다.

주구청산운동은 토지개혁을 힘있게 추진하였으며 자기의 향토를 지키고 동북을 해방하는 싸움에 나서도록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을 고무해주었다.

연길시 서광장에서 진행된 투쟁대회(46년 10월).

일제를 추종하면서 많은 혁명자들을 학살한 주구들의 죄행을 공소하는 김신숙.

주구들의 죄행에 큰 분노를 느끼며 함께 공노하는 군중.

당시 연변 5개 현의 인구는 71만에 달했는데 그가운데 조선족인구가 81.9%를 점했다. 토지개혁에서 55만 조선족농민이 18만 2천여 헥타르의 토지를 분여받았는데 이는 인구당 평균 4.5무에서 7무의 토지를 분여받은셈이다. 뿐만 아니라 가옥, 가축, 농기구, 량곡, 의복도 분여받았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아침 밝아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가세

      지주토지 한간토지를

      우리네 손으로

      분배하였다네

그렇다. 땅은 농민의 명줄이다. 연변의 대다수 조선족농민은 화전민으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그때로부터 피와 땀으로 밭을 일구고 수전을 개간했으나 결국 소유권이 없어 대대손손 소작농, 고농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공산당이 오자 그들은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를 분여받아 이 땅의 주인으로 되였다. 이는 조선족농민이 오매에도 바라던 념원이 아닐수 없었다. 땅을 분여받은 조선족농민들은 밭머리에 처자를 데리고 가서 땅 없어 받았던 설음과 땅의 주인된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흘리다가는 또 노래를 불렀다.

토지개혁으로 신세를 고친 로동모범 전복순

당시 연길에 살고있던 전복순(全福顺)네 집은 과거 일곱식구였는데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 겨우 연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1933년에 항일유격대에 량식을 보내주었다는 죄로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전복순은 14살 나던 해에 토지분배위원으로 선정되였다. 그는 신이 없어 맨발로 아직 녹지 않은 논밭을 뛰여다니며 땅을 재이면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고 자기도 1,200평 언덕밭을 분여받았다. 그는 자기의 땅을 애지중지 가꾸었고 부지런히 일해 풍작을 거두었다. 풍작을 거둔 그는 가장 좋은 곡식을 골라 전선에 보내 로력모범으로 되였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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