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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6)—폭파영웅 조성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12 10:41:15 ] 클릭: [ ]

동북민주련군이 다시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하자 안도의 숨을 쉰 동북 국민당군총사령인 두률명은 1947년 1월 30일에 4개 사단의 병력을 모아 두번째로 림강을 공격했다.

국민당 52군 195사는 자기의 전투력과 현대화한 무기를 믿고 단독으로 근거지에 깊숙이 들어왔다. 고려성자(高丽城子)까지 들어온 195사 주변에 다른 국민당부대가 따라 서지 못한 기회를 빌어 민주련군 제3종대 7사, 8사, 9사가 힘을 합쳐 고립된 195사를 공격했다. 아군전사들은 령하 30도의 엄한을 무릅쓰고 달려와 2월 5일에 고려성자를 포위공격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적은 중형무기를 동원해 겨우 길을 터치고 도주하였다. 이때 전투상황을 모르는 국민당군 207사 3퇀이 고려성자부근에 밀고들어왔다.

민주련군 제3종대 장병들은 신속히 머리를 돌려 207사 3퇀을 전부 소멸했다.

고려성자 포위섬멸전에서 아군은 2,000여명의 국민당정규군을 소멸함으로써 림강에 대한 국민당군의 제2차공격을 무산시켰다.

국민당군의 련속되는 실패는 작전지휘가 무능한탓이라고 판단한 두률명은 2월 16일에 자기가 직접 5개 사단을 지휘해 세번째로 림강을 공격하였다. 그는 한개 사단의 병력이면 민주련군이 쉽게 소멸하지 못할줄 알고 림시로 편성한 21사를 미끼로 내세웠다.

적정을 손금보듯한 아군은 적지원군이 당도하기전에 신속히 림시로 편성한 국민당군 21사를 전멸시키고 머리를 돌려 공격해오는 국민당군 91사 272퇀을 소멸했다. 1947년 2월 22일, 민주련군 3종대의 7사, 8사, 9사는 4종대 10사와 함께 국민당군 91사와 195사를 공격해 적을 격퇴하고 적 부사장인 하세웅(何世雄) 소장을 격살하였다.

림강보위전이 한창일때 남만의 기타 부대와의 협동을 강화하기 위해 료녕군구에서는 리홍광지대를 료녕군구 독립4사로 확대 편성하였다. 조선인 왕자인이 계속 사장을 맡고 방호산이 정치위원을 맡은 독립 4사는 근 8,000명 규모에 달했다.독립 4사는 남만의 야전군 3종대와 4종대에 배합해 휘남(辉南)부근에서 적을 견제하면서 싸웠다. 그들은 대장원을 습격해 적 한개퇀을 소멸했으며 금천(金川)현성을 해방하였다.

림강을 보위하고있는 아군은 적을 각개 섬멸하면서 점차 주동을 쟁취하기 시작했으며 부분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3종대와 배합해 싸우던 독립4사는 1947년 3월 3일부터 휘남의 고립된 적을 소멸하기 위한 전투를 진행했다. 심양으로부터 길림으로 통하는 철도선에 위치한 휘남은 크지 않은 도시다. 독립4사 1퇀, 2퇀, 3퇀이 야전군 3종대 8사 22퇀의 지원을 받으며 휘남을 공격하였다. 국민당 60군 21사의 한개 퇀과 보안대가 휘남을 지키고있었는데 놈들은 남산고지에 주요 방어진을 구축하고있었다.

심양의 78세 고령인 최창수로인은 당시 독립4사 중기반 반장으로 휘남해방전투에 참가했었다.

《3월 3일 휘남전투가 있었는데 적들은 포대에 주변에 2메터 깊이의 구뎅이를 빙 둘러 파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서 이렇게 거꾸로 박아놓아 록시를 만들었으며 철조망을 비롯한 장애물을 다섯겹으로 해놓았습니다. 작은 포대는 몇개 안되는데 이걸 점령해야 우리가 공격할수있었습니다. 3월 3일에 공격이 시작되고 적의 포대를 까부시는 임무는 조성두가 많았습니다. 한개 폭발소조가 갔는데 다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눈이 이렇게 많이 왔습니다. 포대는 위치가 높아서 눈길을 헤치고 장애물을 건너 그곳에 접근하기란 무척 힘들었습니다.》

최창수, 78세 심양 (원 리홍광지대 중기반장 ).

사단 참모장 로철용과 3퇀 퇀장 조관이 친히 전연진지에서 남산고지를 공격하는 3퇀 1영의 전투를 지휘했다. 대형포가 없었기에 아군의 첫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휘부에서는 폭파조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영 3련 련장 주재덕과 지도원 강응천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진에 다가가서 조성두를 조장으로 하는 폭파조를 파견했다. 3퇀의 황석정위는 조성두의 손을 잡고 무슨 요구가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인민을 위해 몸 바쳐 싸우는데 무슨 요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 조성두는 30근이나 되는 폭약을 안고 돌진했다.

전진도중 지뢰수들이 하나하나 쓰러졌다. 이리저리 몸을 숨기며 전진하던 조성두도 그만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가슴을 쥐여뜯으며 애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휘부에서 다음 폭파수를 파견하려는 순간, 조성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흰눈우에 검붉은 피자국을 남기며 적진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 보루와 50메터 거리를 두었을 때 그는 다시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더욱 맹렬하게 엄호사격하였으며 지뢰수들은 앞다투어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다. 이때 조성두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후의 힘을 모은 조성두는 적 보루앞 철조망에 다가가 기대인 뒤 뒤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비장한 각오를 한 그는 손을 흔들어 사랑하는 전우들과 작별했던것이다.

그는 단호히 도화선을 당겼다. 《꽝-》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적보루가 폭파되고 겁에 질린 놈들은 사격할 엄두도 못했다. 멸적의 영웅 조성두는 육탄으로 아군의 앞길을 열어놓았고 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끝내 남산고지를 점령하였다.

(최창수 로인) 《…올라가다가 몇사람이 희생되고 조성두용사도 마지막 못가고 부상했습니다. 도중에 자기가 희생하면서 작약이 이렇게 되였는데 부대에서 만든건데 그걸 터졌습니다. 터지니 장애물이 파괴되여 올라가게 되였고 국민당놈도 질겁을 하고 하여 신속히 돌격하였습니다. 남산포대를 점령하자 돌격나팔이 울리면서 전사들이 일시에 돌격해 전투가 오래걸리지 않아 휘남을 해방했습니다.》

휘남해방전투에서 독립 4사를 비롯한 아군 부대는 국민당정예군 1000여명을 소멸했다. 하지만 독립4사는 조성두용사를 비롯한 40여명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후 전사들은 조성두용사의 흩어진 몸을 하나하나 찾아맞추고 기타 렬사들과 함께 휘남현대장원에다 안장했다. 렬사릉원에 가면 지금도 조성두 용사의 무덤과 무덤앞에 세운 비석을 찾아볼수있다. 비석에는 폭파영웅 조선두라는 글발이 새겨져있다.

림강보위전에서 제일처음 육탄으로 적의 보루를 폭파한 조성두 용사는 경상도사람이였다. 일제통치시기 강제징병에 끌려갔던 그는 부대가 남경부근에 주둔하던 기간 가만히 도주하여 신사군을 찾아갔다. 항일전쟁승리후 조성두는 신사군의 조선의용군을 따라 동북으로 진출했으며 조선의용군 제1지대에 편입되여 남만에 남아 투쟁했던것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모범을 보여준 훌륭한 전사였다.

조성두가 희생된후 독립 4사 사장인 왕자인이 직접 《지뢰수 조성두 용사》라는 가서를 쓰고 선전대의 유명한 음악가 정진옥이 작곡을 해서 이 노래가 널리 불리워지게 하였다.

휘남교외의 혁명렬사릉원.

렬사릉원의 폭파영웅 조성두묘.

제3차림강보위전에 배합하기 위해 북만 민주련군주력은 두번째로 송화강이남 작전을 개시하였다. 민주련군은 국민당 전초기지인 덕혜(德惠)부근 성자가(城子街)를 신속히 포위하였다. 국민당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지원군을 소멸하는 민주련군의 기동령활한 운동전에 겁을 먹고 누구도 성자가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자가를 수비하던 신 1군 89퇀은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지게 되자 전부 민주련군에 투항해버렸다. 민주련군은 다시 덕혜를 포위공격하였고 구태와 농안의 국민당군은 혼비백산하여 급급히 철수해버렸다.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가 덕혜와 농안을 공격하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길남군분구 72퇀은 24시내에 길림이남의 쌍하진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적 지원군을 막으라는 임무를 맡았다. 명령을 받은 송무선부퇀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눈길을 헤치며 쌍하진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국민당 60군 182사와 지방보안대가 수비하고있었고 철교에 100여명 보초가 있었다. 감쪽같이 철교에 접근한후 72퇀 1련과 9련이 공격을 개시했다. 전사들은 철교를 지키는 100여명 적을 몰아내고 그뒤를 따르던 공병은 다리에 작약을 설치해놓고 철교를 폭파해버렸다. 30분도 안되여 철교폭파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72퇀은 신속히 자리를 떴다.

한편 전략적 요새인 덕혜를 지원하기 위해 두률명은 급급히 진명인이 거느린 71군 87사와 89사를 덕혜로 이동시켰고 또 소풍만 저수지의 물을 풀어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판단한 민주련군은 덕혜공격을 그만두고 송화강이북으로 철수하였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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