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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7)—사간방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18 11:46:27 ] 클릭: [ ]

민주련군주력이 덕혜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자 두률명은 부하 장교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이른바 《덕혜승리》라는 거짓 소식을 조작해내고 덕혜전투에서 민주련군 10만을 소멸했다고 떠들었다. 오래동안 승전소식을 듣지 못했던 장개석은 이 소식을 접하자 크게 기뻐하며 두률명을 제치고 직접 손립인(孙立人)과 진명인(陈明仁)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동북국민당군 총사령인 두률명이 아니라 직접 국민당의 통수인 장개석으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은 손립인과 진명인은 통수의 총애를 느끼고 각자 신 1군과 71군을 거느리고 송화강이북으로 추격해왔다. 이를 안 두률명은 급급히 철군명령을 내렸지만 오만해진 손립인과 진명인을 단속할수 없었다. 두률명은 할수 없이 직접 덕혜에 달려가 두군장에게 상황판단을 설명해주고 이른바 《덕혜승리》소식은 거짓임을 알려주었다.

두률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기회를 기다리던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는 세번째로 송화강을 넘어 공격해왔다. 3월 12일 새벽, 감쪽같이 곽가툰(郭家屯)에 나타난 민주련군 1종대는 덕혜로부터 농안으로 철수하려던 국민당 71군 88사 전부와 87사 일부를 물 샐틈없이 포위하여 전부 소멸했다. 진명인은 아우성치는 부하들을 버리고 기차를 타고 사평으로 도주하였고 두률명도 요행 아군선봉부대의 공격을 피해 장춘으로 도주했다. 급해난 두률명은 심양에 있던 마지막 밑천인 신 6군과 13군을 북만으로 이동시켰다.

국민당군 주력을 분산, 소멸하고 림강보위전을 지원한다는 공격목적을 달성한 민주련군 주력은 송화강의 물이 풀리기전에 다시 강북으로 철수했다.

눈보라치는 엄한을 무릅쓰고 송화강을 넘나들며 싸우는 민주련군장병들.

길림시부근의 사간방마을.

오늘의 사간방 촌당지부.

동만과 길림, 장춘부근의 각 부대의 전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1947년 2월에 길림군구에서는 동만독립사(东满独立师)와 독립 3사를 편성했다. 장춘쟁탈전의 조선족퇀으로 유명했던 경비 1려 1퇀과 화수림자전투에 참가했던 조선족 위주의 경비 2려 4퇀에 부분적 한족부대를 합쳐 동만독립사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길림성북부에서 활동하던 각 부대로 독립 3사를 편성했는데 독립 3사에도 서란, 영길, 교하 등지에서 참군했던 많은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동만독립사의 사장은 뢰전주였고 정위는 당천제였으며 독립 3사의 사장은 조리회이고 정위는 오진남이였다.

새로 편성된 동만독립사와 독립 3사는 민주련군야전군과 함께 장춘과 길림사이에서 적을 견제하면서 싸웠다.이때 로야령부근에서 동만의 대문을 지키고있던 각 부대도 적극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제15퇀과 왕청보안퇀이 합쳐 편성된 길동보안퇀(302부대)은 부분적 한족부대를 합쳐 길동군구 독립 3퇀으로 재편성되였다. 독립 3퇀은 1영이 한족부대이고 2영과 3영 그리고 퇀직속부대는 전부 조선족청년으로 구성되였다.

1947년 2월말에 독립 3퇀은 교하, 신참 일선을 떠나 표하(漂河)에 주둔하면서 상산툰(常山屯)을 탈취한후 다시 길림교외의 사간방(四间房)을 습격했다.

국민당 60군의 한개 영이 수비하고있는 사간방에 대한 주공임무는 독립 3퇀 2영 6련과 7련이 맡았다. 1947년 3월 7일 밤 12시에 6련 련장 리섭(李涉)과 지도원 조충렬(赵忠烈)이 전사들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공격하고 7련 련장 김성범(金成范)이 전사들을 거느리고 배후로 협공하였다.

불의의 습격이였기때문에 아군은 쉽게 적의 첫 방어선을 돌파하고 마을중심부로 진격할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경험이 풍부한 적 수비군은 신속히 동산포대에 모여 완강하게 저항했다. 공격이 수차 실패하자 영부에서는 잠시 철수했다가 다시 공격을 조직할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마을 도랑물을 따라 퇴각하던 6련은 적의 화력에 막혀 철수할수 없었다. 상황이 위급하자 조충렬지도원은 한개 반 전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러자 적의 모든 화력이 이들에게 집중되였고 이 틈을 타서 6련이 전부 철수하였다. 하지만 부대의 엄호에 나섰던 조충렬지도원과 기타 네명 전사가 적탄을 맞고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한편 7련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 독립 3퇀 2영 부영장인 홍충암(洪忠岩)도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독립 3퇀의 문서였던 리복룡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조충렬렬사는 나의 상급이였습니다. 독립 6사 16퇀(독립 3퇀) 6련 지도원이였습니다. 이분은 일제가 투항한후 연변무장대오의 조직자의 한사람이였습니다. 일제가 패망한후 그는 뜻있는 청년을 조직해 청년동맹을 꾸리고 청년무장대 대장을 했습니다. 연변에서 민주동맹 제1차회의를 할 때 그는 로투구의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는 항일하다 나온 강신태의 보고도 듣고 연변에서 무장대오를 조직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빈 주먹으로 지주집 무장을 탈취하고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장악해 로투구에서 한개 중대라는 대오를 묶었습니다…

1947년 3월 7일 그는 사간방전투에서 희생되였습니다. 16퇀(독립 3퇀)을 놓고보면 그 전투가 미제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과의 첫 전투였습니다. 적과 싸우다가 우리가 후퇴하게 되였는데 그때 두개련이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두개련의 안전한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이분이 한개 분대를 데리고 엄호하다가 적을 자기에게 유인하면서 부대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한개반 전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웠는데 결국 조충렬지도원을 포함해 한개반 전사들이 전부 희생되였습니다.》

사간방전투는 독립 6사 16퇀의 전신인 독립 3퇀이 겪은 국민당 정규군과의 첫 전투였다. 하지만 전투영웅 정청송(郑青松)과 리동원(李东元)을 비롯한 아군전사들은 두려움없이 적과 싸웠다. 7련 2패 폭파조장인 정청송은 기민하게 적 포대를 폭파하고 앞장서서 마을로 돌격해 들어가다가 전호에서 나온 적 세놈을 총창으로 찔러넘긴후 수류탄을 화구에 밀어넣어 적 두번째 화점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기도 쓰러졌다. 뒤를 따르던 전사들이 달려와 그를 후방병원으로 호송했지만 정청송은 끝내 희생되고말았다.

7련 전사 리동원은 적 또치까에 접근하다가 팔과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피를 흘리면서 계속 전진해 또치까에 수류탄묶음을 들이밀었다. 또치까를 폭파했지만 살아남은 적이 계속 전호속에서 사격하자 그는 다시 총창을 주어들고 적진에 뛰여들었다. 그는 총창으로 찌르고 총탁으로 때리고 하여 련속 적 다섯놈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미 부상한 리동원도 기진맥진하여 적 총창에 찔려 장렬히 희생되였다.

독립 3퇀은 병력을 정비해서 끝내 사간방을 점령하였고 놈들은 길림쪽으로 도주해버렸다. 이번 전투에서 6련과 7련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적 정규군 한개 보강련을 소멸하고 대량의 군수품과 물품을 로획했지만 희생도 적지 않았다. 전투가 끝난후 부대에서는 14명 희생자들의 시신을 사간방 동산기슭에 매장하고 성대한 추도식을 가졌다.

 

사간방전투에서 희생된 조충렬렬사.

사간방에서 희생된 리동원렬사(학창시절의 사진).

조충렬렬사의 차녀 조순복로인(연길, 63세)  

답사팀은 연길에서 조충렬렬사의 딸 조순복로인을 만났다. 조충렬렬사의 차녀인 조순복로인은 63세였다.

《아버지는 남을 돕기 좋아하고 성격이 아주 활달했고 운동이나 노래를 다 잘하는분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사진을 보면서 아주 멋있고 용감한 분이라는걸 알았습니다. 저는 아버지사적이 연변박물관에 모셔질 때 가장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1983년 일이였니다. 당시 사회상에서는 돈, 직위, 사회관계만 추구할 때인데 그때 저는 안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적을 박물관에 모시게 되니 아버지는 정말 피를 헛되이 흘리지 않았구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는것 같았습니다. 제가 두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곱살에 어머니가 재가했습니다. 그때 가슴 많이 아팠습니다……학교 입학할 때 애들은 다 부모손을 쥐고 가는데 전 언니손을 쥐고갔습니다. 그리고 학교 원족에 부모들이 따라갈 때 언니와 저는 밥곽을 허리에 차고 가서 서로 안고 울던 일이 참 가슴 아팠습니다…》

반격에 나선 길동군분구 2려와 길남군분구 각 부대는 화전부근의 적 거점을 제거하고 적 지원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3개월 남짓한 기간 각 부대는 천여명의 적을 소멸함으로써 동만과 남만을 전부 이어주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였다.

동만과 남만의 민주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정동국이 다시 7개 사단의 병력을 긁어모아 네번째로 림강방향으로 공격해왔다. 그들은 통화를 포위하고있는 남만 민주련군 주력인 3종대와 4종대를 격퇴시키고 림강에서 아군과 결전하려 했다. 동북민주련군 3종대와 4종대는 기민하게 국민당 정예부대인 52군 89사를 유인해다 포위섬멸함으로써 국민당군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한편 독립 4사는 서부전선의 적을 견제해 싸우면서 심양과 길림간의 철도를 차단시켰다. 3월 28일, 독립 4사는 조양진으로부터 휘남으로 공격해오는 적 184사 544퇀을 소멸하고 30일에는 료녕군구 독립 2사와 함께 적 184사 주력의 공격을 물리쳤다.

네차의 림강보위전과 세차의 강남진격작전을 통해 동북민주련군은 국민당 정예군 4만명을 소멸하였다. 간고했던 전투적 나날에 조선족 열혈남아들은 민주련군 주력부대인 1종대, 3종대, 6종대에 참가해 림강보위전의 주도적인 전역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독립 4사, 동만독립사, 독립 3사 그리고 독립 3퇀, 독립 6퇀 등 조선족 부대에서 우세한 적과 치렬한 혈전을 벌이면서 근거지를 보위하였다.

뿐만 아니라 길교(吉蛟)유격대, 남만무장공작대, 류하현대대, 휘남현대대, 환인지대, 반석현대대, 화전현대대를 조직해 당정간부를 보호하면서 간고한 유격투쟁을 견지했다. 이들가운데 조성두, 조충렬, 정청송, 리동원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영웅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욱 많은 우리 영웅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되였으며 또 이름을 남겼다 해도 사적이 전해지지 않는 렬사도 많았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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