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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28)—확고한 동만근거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18 12:35:23 ] 클릭: [ ]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시작했다.

산에 들에 두텁게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였고 양지바른 언덕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여올랐다.  

1947년 봄, 엄동설한을 이겨낸 동북민주련군은 동북대지에 줄기줄기 뻗은 장백산맥과 굽이굽이 뻗은 송화강을 사이두고 우세한 국민당군과 밀고 당기며 반복적인 혈전을 거쳐 드디여 새봄을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맞아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근거지의 군민들은 모두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위한 드높은 정신력으로 가장 어려운 시련을 이겨내고 희망의 새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하지만 피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림강보위의 그 어려웠던 전투의 나날에 적의 포화와 총격에 희생된자가 그 얼마였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람이 그 얼마인지 모른다.

한겨울 싸워 동만해방구와 남만해방구, 북만해방구가 이어지게 되였다. 림강근거지의 군민들은 화전, 화수림자, 돈화를 통해 동만근거지로부터 대량의 량식과 탄약을 보급받을수 있게 되였다. 아울러 대량의 부상자들을 동만, 북만 근거지 후방으로 수송할수 있게 되였다.

 

동만근거지 농민들이 대량의 량곡을 바쳤고 량곡들은 전선에 전해졌다.

장춘의 로전사 리희림(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1기생 지도원).

림강보위전과 강남진격 작전에서 오늘의 길림성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만근거지는 가장 유력한 후근기지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송화강량안에서 일어난 크고작은 전투에서 나타난 아군부상자들은 수없이 화전, 화수림자, 돈화를 통해 연변에 도착해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근거지 군민들이 생산한 대량의 량곡과 군수품이 적의 포위를 뚫고 림강전선에 수송되였던것이다.

괴뢰만주국시기에 세워진 룡정의학원은 해방전쟁시기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부속병원으로 되여 수많은 아군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장춘의 82세 고령인 리희림(李希林) 로인은 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1기생 지도원으로 사업했으며 림강보위전투시기 룡정의학원의 당사업을 책임졌었다.

《의과대학은 그전에 지방에서 관계했는데 후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부속병원으로 되여 거기서(길림분교) 령도하고 관리하게 되였습니다. 47년도 강남진격 작전과 림강보위전때 각지에서 들어오는 상병원이 하도 많으니깐, 그때 병원이 호리원, 중국말로 호사와 의사가 부족되니 위만시대에 남아있던 일본의사, 호사들을 있는대로 다 남겼습니다. 그래도 모자랐습니다. 그러니까 군정대학 1기생에 들어온 사람 한 60~70명 되게 병원 호사노릇을 하게 되였습니다. 47년도 5월에 나는 병원에 가서 제1임 지도원으로 되였습니다. 그때 못해도 200 내지 300명 있었는데 대부분 조선사람이였습니다. 의사도 조선사람이고 호사도 조선사람이였습니다.》

항일전쟁시기부터 혁명토대와 군중토대가 좋았기때문에 동만은 동북에서 가장 먼저 토비숙청과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그리고 비교적 공고한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졌다. 특히 동북군정대학의 많은 간부들이 동원되여 전선지원을 했으며 전선으로부터 수송되여온 부상자들을 열심히 치료하고 간호해주었던것이다. 당시 돈화가 교통중심지였다. 동만근거지의 지원물자는 돈화를 통해 장춘, 길림 방향으로 수송되였고 또 돈화를 통해 남만근거지와 강동근거지로 수송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대량의 부상자들도 동만근거지인 연변에 수송되여왔다.

(리희림 로인) 《하여간 대후방이란데 돈화로 가는 길 하나밖에 없었구. 송무섭이도 그때 팔이 떨어지지 않았소. 화수림자 전투에서 그렇게 되였지요. 그때두 병원에서 소염제라는게 알콜 이런것밖에 없어 부상한 팔이나 다리를 끊지 않아도 되는데 할수 없이 끊고 그랬습니다. 호사들도 나이 어렸습니다. 하지만 군대 규률이니깐. 병원에서 부상자가 돌아간 다음 당직 서는 사람이 모든걸 다 처리해주어야 했습니다. 요구 첫째조목이 제일 좋은 의복을 입혀주되 알콜을 가지고 코나 귀를 소독하고 솜으로 막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열일곱, 열여덟 처녀애들이 무서워서 지도원, 지도원하며 찾아오는데…그때 ‘영국덕’ 룡정동산에 얼마나 많은 사람 묻었는지 모릅니다. 이름도 기억된게 없어요. 안 죽을거도 약이 부족하고 치료가 잘되지 않아 많이 죽었지요…그렇지만 혁명열정이 아주 강하기에 정신적으로 부상자들을 아주 자기 친부모같이 잘 호리해주었으니까…

글쎄 이 사람들이 없으면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할 사람 누구냐? 우리 사람들이 다 전방에 나갔는데 누가 치료해주겠는가? 우리가 후방에서라도 이들을 치료해준다면 우리가 나가는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동북을 해방하고 압록강을 뛰여넘어간다는 생각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해방하고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진정한 해방을 위해 동만과 남만을 지켜 싸운 무명렬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키높이 솟은 기념비는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의 업적을 영원히 전해갈것이다.

 

룡정의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가는 조선족주민들.

룡정의과대학(길림분교 졸업사진).

1947년 봄에 이르러 동북의 정세는 동북민주련군에 많이 좋아지는 쪽으로 변해갔다. 림강보위전과 강남진격 작전을 거쳐 동북민주련군은 대량의 적 유생력량을 소멸했으며 부분적으로 반격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동북민주련군의 남북협공을 받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국민당군 동북총사령인 두률명은 신장병이 더욱 위중해졌고 좀체로 열이 내리지 않았다. 의사는 열심히 치료받지 않고 휴식하지 않는다면 온몸이 마비되여 움직일수 없게 된다는 경고까지 했다. 3개월 남짓한 림강공격전을 통해 《먼저 남만을 정복하고 다시 북만을 공격한다》는 두률명의 《선남후북》전략은 철저히 무산되였던것이다.

동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장개석은 재차 심양에 도착했다. 일년전만 하여도 수하 장교들이 승리의 기쁨속에서 장개석을 환영했지만 이번에는 모두 수심에 가득 찬 표정들이였다. 장개석은 병환에 있는 두률명을 위문하고 동북에서의 작전방침을 중점방어에 둘것을 제기했다. 재력과 물력 그리고 병력부족을 느낀 장개석도 할수 없이 현상태만 유지하라는 최저요구를 제기했다.

간고한 림강보위전을 거쳐 동북민주련군은 드디여 동북에서 전략적인 대반격을 진행할 성숙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민주련군 총사령부에서는 1947년 5월 13일부터 하기공세를 발동하기로 계획하고 남만과 북만의 주력을 모아 적후에 깊이 진입해 운동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부터 동북민주련군은 하기, 추기, 동기 공세를 련속 발동해 동북 대도시 주변의 크고작은 국민당거점을 추풍에 락엽 쓸듯이 깡그리 제거하는 대반격을 시작하였다.

북만의 1종대와 6종대 그리고 남만의 3종대를 비롯한 민주련군 야전부대의 조선족장병과 길림군구, 료녕군구의 독립사와 독립퇀의 조선족장병들도 대반격의 력차 전투에 나섰다.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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