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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35)—피로물든 황화산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0-28 16:34:30 ] 클릭: [ ]

추풍에 락엽 쓸듯이 동북의 광활한 대지에서 국민당군을 섬멸한 추기공세가 끝나서 4일만인 1947년 11월 9일, 동북민주련군 총부에서는 동기공세 작전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다. 적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12월 15일부터 혹한을 무릅쓰고 심양주변의 신민, 법고, 철령 방향으로 출격했다.

민주련군 6종대와 7종대는 심양부근의 창무(彰武)를 포위하였다. 아군은 두개 종대의 절대적인 우세한 병력에 60여문 야전포와 류탄포까지 동원해 창무의 국민당 49군 79사를 공격했다. 15분간의 포격으로 대부분 방어시설을 분쇄한후 6종대와 7종대 장병들이 물밀듯이 돌격해 5시간만에 창무현성을 해방했다. 전투에서 아군은 국민당군 9,000여명을 소멸했다.

료녕성 북부지역에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집결되고있음을 간파한 동북국민당군 사령인 진성은 심양의 주력을 동원해 창무지역의 3종대와 6종대, 10종대를 소멸하려 시도했다. 1948년 1월 1일, 진성은 국민당 최정예군인 신5군, 신3군, 신6군을 출동시켜 료하기슭을 따라 공격하게 했다. 신5군이 좌익으로 공격하고 신3군과 신6군이 우익으로 공격했으며 9병퇀이 중앙에 서서 71군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동북민주련군 6종대는 운동전을 펼쳐 좌익을 담당한 국민당 신5군을 공주툰(公主屯)에 유인해온후 공주툰일선에서 적을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게 딱 막았다. 이 기회를 타서 3종대는 신 5군의 뒤로 우회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기타 2종대, 7종대가 량쪽으로 신5군을 단단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4종대도 국민당 주력인 71군과 신1군을 견제하였고 10종대로 신3군과 신 6군을 막고싸웠다.

동북인민해방군의 포위섬멸전을 잘 알고있는 국민당 9병퇀 사령원인 료요상은 자기 부대가 포위될까 두려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고의 신6군 62사를 구원하고 공주툰에 포위된 신 5군을 구출하기 위해 국민당 신3군과 신6군 5개 사단의 병력은 료하(辽河)량측으로 급급히 공격해왔다. 그리하여 1948년 1월 5일에 신민부근마을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료하의 통강구.

중요한 전략요새였던 신민, 신민려객뻐스역. 

치렬한 쟁탈전이 있었던 동사산자향.

황화산부근의 침단무 마을정경.

1948년 1월 5일, 동북민주련군 10종대는 신민부근에서 국민당 신3군과 신6군의 공격을 막으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 동기공세를 앞두고 각기 반석, 법고, 이통부근에서 활동하던 10종대 28사, 29사, 30사는 모두 법고에 집결되였다. 이로써 부대편성후 처음으로 대집결을 완수한 10종대는 량흥초 사령원의 명령에 따라 신민부근에서 활동하다가 공주툰을 지원하려는 국민당군 신3군과 신6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간고한 임무를 맡게 되였던것이다. 10종대 28사, 29사, 30사 각퇀은 얼한푸즈(二汉堡子), 황화산(黄花山), 천탄무(沉檀木), 동사산자(东蛇山子) 등지에 포진했다.

비행기와 땅크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은 29사 87퇀이 수비하는 얼한푸즈와 황화산을 중점공격하였다. 87퇀은 적의 공격을 네차나 물리치고 700여명 적을 소멸했다. 하지만 87퇀도 200여명 장병이 희생되고 적에게 겹겹히 포위될 위험에 처하게 되여 진지에서 잠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1월 7일, 국민당군 4개 사단 병력이 20대의 비행기와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면공격을 발동했다. 놈들은 88퇀이 수비하는 397고지와 천탄무 그리고 86퇀이 수비하는 동사산자 무명고지를 중점 공격하였다. 진지는 삽시에 불바다로 변해버렸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30사 88퇀이 수비하고있는 397고지와 천탄무, 86퇀이 수비하고있는 동사산자진지마저 무너지면 적은 곧바로 공주툰을 포위하고있는 아군의 배후를 공격할수 있었다. 하루종일 싸워 7일이 되여 동사산자부근의 천탄무진지밖에 남지 않았다. 10종대 량흥초사령원은 직접 30사 지휘부에 달려와 반격작전을 지휘했다. 88퇀이 중심진지인 황화산을 공격하고 89퇀과 90퇀이 량측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황화산전투에 참가했던 10종대 30사 88퇀의 윤룡철로인은 치렬한 전투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는 1948년도 1월 6일 저녁에 황화산에 도착했습니다. 눈이 이렇게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마을 주변 고지는 국민당이 들어와 점령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3영이 주공이 되였습니다. 88퇀도 떨어지고 3영의 7련이 이쪽, 9련이 이쪽이고 우리 8련이 공격하는데. 그음 날이 밝아서부터 적기가 공습하고 땅크 8대가 왔습니다. 류탄포를 쏘고 수차 공격에 할수없이 날이 밝아서 철퇴하라하여 철퇴하였습니다. 황화산은 큰 마을인데 포격에 집이 무너지고 거리가 불탔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오니 7련과 8련이 합쳐 불과 백명도 안되였습니다…김성룡이가 교도원인데 그때 당위서기였습니다. 당원대회를 했습니다. 놈들은 오전에 실패하니까 오후에는 공격하지 않고 우리동무들 시체를 넷씩 해서 물을 부어 얼군다음 쌓아놓고 척탄통, 기관총 걸고 우리 시체로 진지를 만들었습니다. 동원대회에서 교도원이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공격해서 우리 동무들 시신을 빼앗구 적을 소멸하라구, 원쑤를 갚자구!》

저녁 6시쯤에 반격이 시작되였다. 88퇀 3영 교도원 김성룡(金星龙)은 직접 8련을 거느리고 주공에 나섰고 7련과 9련이 량쪽으로 협공하였다. 7련과 8련의 엄호하에 적진에 접근한 8련 전사들은 수류탄으로 첫 방어진지을 폭파하고 두번째 진지에 다가갔다. 앞장선 많은 당원들이 쓰러졌다.

로전사 윤룡철 로인은 이렇게 소개했다.

《…조명탄이 한번 떠서 있는 기간이 1분이고 다른게 또 올라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미처 공병훈련도 못받았고 척탄통도 없었습니다. 폭파통도 없구, 폭약도 없었습니다. 그래 수류탄 세개씩 묶어 그걸 안고 가서 인차 적진밑에 가서 붙습니다. 처음 화점에 가서 수류탄을 뿌리고 〈충아〉하고 올라섰는데 그만 부상당하고 쓰러졌습니다. 담가대에 실려내려왔습니다.》

8련 련장 김수억(金寿亿)은 폭파조를 보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자 자기가 직접 나섰다. 수류탄 묶음을 안고 달리던 그는 다리에 적탄을 맞았지만 절룩거리며 계속 전진했다. 눈우에 50메터 피자욱을 남기며 전진한 김수억은 몸을 솟구쳐 있는 힘을 다해 수류탄 묶음을 던져 적화구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적의 흉탄은 그의 두다리를 모두 끊어놓았다.

교도원 김성룡은 당원결사대와 8련 전사들을 지휘해 적의 마지막 화구를 공격했다. 그러나 권총을 휘두르며 달리던 김성룡교도원도 그만 적탄에 가슴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존경하는 교도원이 희생되고 련장이 중상입은것을 본 전사들은 눈에 달이 올라 함성을 지르며 두려움 없이 돌격했다. 전사들은 적의 마지막 화구를 제거하고 수비하던 적 련장이하 100여명을 생포하였으며 드디여 황화산진지를 되찾았다. 중상을 입었지만 승리할 때까지 진지에서 물러서지 않은 김수억련장은 병원으로 수송되던중 피를 너무 흘린탓으로 희생되고말았다.

자아희생적으로 싸운 10종대 장병들은 드디여 잃었던 진지를 전부 탈환하고 국민당지원군의 서진계획을 파탄시킴으로써 공주툰 섬멸전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

10종대 30사 88퇀 3영 교도원 김성룡렬사.

황화산전투에서 당원결사대를 이끌고 앞장서 싸우다 희생된 김성룡 렬사 묘소.

황화산 렬사 김수억련장(앞줄 오른쪽 첫 사람)과 리주설영장(앞줄 왼쪽 첫 사람)이 화룡현 룡문향약수동에서 가족과 함께.

《영원한 기념비》 제작팀은 연길시 연변종업원료양원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윤룡철 로인을 만나보았다.

가렬처절했던 황화산전투에 참가했던 생존자 윤룡철로인, 그는 전투에서 두눈을 잃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정경들을 눈앞에 그려보며 감격을 금하지 못한다.

《…김수억련장에 대해 이야기하겠는데 후에 우리 동무들에게서 들어본데 의하면 참 영웅은 김수억동무입니다.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싸웠습니다…올라가다 두다리를 상했습니다. 계속 〈충아〉했습니다. 동무들이 보니 안되겠다하여 각반을 풀어 그의 상처를 싸매려했습니다. 그러니 김수억 련장은 담방 코앞에 적이 오는데 관계하지 말고 〈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전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돌격했습니다. 수억은 그 다리로 피를 흘리며 50메터 나가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희생되였습니다.》

강냉이밭이 끊없이 펼쳐지고 드문드문 산들이 있는 료북지역은 해방전쟁시기 동북의 주요한 전장이였다. 신민부근의 동사산자, 이름없는 산언덕에는 황화산전투의 희생자들을 위해 세운 렬사기념비가 있다. 부근에 조선족마을 하나 없지만 황화산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된 우리 수많은 조선족렬사들과 무명영웅들의 업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여있었던것이다. 당원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달리다가 희생된 교도원 김성룡, 중상을 입고도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은 련장 김수억, 황화산 최후 추격전에서 적탄을 맞고 희생된 86퇀의 3영 7련의 련장 현의남렬사 그리고 사진 한장,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수많은 무명렬사들…사람들은 황화산전투에서 이룩한 우리 장병들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10종대 각 사단이 국민당 신3군과 신6군을 막고 피어린 혈전을 치르고있을 때 1월 5일부터 공주툰에 포위된 국민당 신5군에 대한 최후 공격전도 진행되였다.

동북민주련군 2종대, 3종대, 6종대, 7종대 12개 사단이 포위된 적군을 공격했다. 6일 새벽까지 2종대와 7종대는 신5군 195사를 전멸시키고 3종대와 6종대는 포위된 신5군 군부와 195사 잔여부대를 소멸했으며 6종대는 적 43사를 소멸하였다. 황급해진 국민당 신5군 군장 진림달(陈林达) 중장은 하급군관의 옷을 바꿔입고 도주하려다가 생포되였다.

동기공세 첫단계의 주요한 전역이였던 공주툰 섬멸전에서 동북민주련군은 적 2만여명을 소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월 7일 동북민주련군 총부에서는 《아군주력은 신민동북부 공주툰지역에서 30여시간의 격전을 거쳐 적 신5군을 전부 소멸하고 군장 진림달을 생포했다》는 통보를 발송했다. 통보는, 아군 10종대와 1종대는 공주툰의 신5군을 지원하려던 국민당군 7개 사단의 병력을 유력하게 저지시킴으로써 공주툰전역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고 치하했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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