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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55)—중경의 한국림시정부 기념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1-23 13:01:26 ] 클릭: [ ]

항일전쟁시기 중경은 국민정부의 전시 수도였다. 1937년말 남경이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무한을 거쳐 중경으로 옮겼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산과 물이 많은 서북의 천험을 리용해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려 했던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후 중경은 동맹국 원동지휘중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경은 화북대지와 화동지역 적후(敌後) 항일지휘중심인 연안과 더불어 중국 전민항쟁의 주요한 지휘체계를 형성하였다.

중국 관내 조선독립운동의 주요 력량이였던 김구와 림시정부,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 그리고 기타 당파들도 이시기 중경에 집결하였다. 무한 함락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는 국민당의 요원들과 함께 류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전시 수도인 중경으로 갔다. 한편 상해와 남경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김구와 림시정부를 찾아 중경으로 향했다.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 남녀로소 100여명이 험난한 피난길에 나섰다. 그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계림, 류주를 거쳐 사천성 기강에 이르렀고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다시 중경에 거처를 잡게 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이 이곳에서 항쟁을 견지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폭격에 희생되였거나 병사하기도 하였다. 

안개낀 중경시 조천문부두.

북경에서부터 중경답사를 시작하였다. 2시간 반 후 중경시 강북(江北)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은 생각보다 퍽 간소했고 려객도 많지 않았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잡고 괜찮은 호텔로 안내하라고 부탁하였다.

중국서남부의 중요한 력사문화 도시인 중경은 가릉강(嘉陵江)과 장강의 합수목에 위치했다. 기원 581년 수조(隋朝)는 이곳에 유주(渝州)를 설치했기때문에 약칭으로 중경을 유(渝)라고도 한다. 1189년 남송(南宋)의 조돈(赵惇)이 이곳 왕으로 책봉받았다. 얼마뒤 다시 황위를 계승한 조돈은 희사가 겹쳤다는 의미에서 자기의 원 저택을 중경부(重庆府)로 명했다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중경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1997년 중경시는 북경,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의 네번째 중앙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중경은 산간도시이지만 철도,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하천운수도 비교적 편리하다. 장강상류인 중경으로부터 장강을 통해 무한, 남경, 상해에 직접 도달할수 있다. 중경시 유중구(渝中区) 광장빈관(广场宾馆)에 입주한 답사팀은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중경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떠났다.

광장빈관부근에서 택시를 잡고 중경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가려 했지만 택시 기사들마다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유중구 칠성강(七星岗) 련화지(莲花池) 38번이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웬 영문인지 모른다거나 갈수 없다고 하였다. 택시를 여러개 잡아봤지만 대답은 비슷하였다. 우리는 할수 없이 쉽게 찾아갈수 있는 팔로군 중경판사처 유적지로 가자고 했다. 그러니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증가암(曾家巖) 50번지에 위치한 팔로군 중경 판사처 유적지는 우리가 투숙한 빈관에서 10분도 안되는 거리였다.

해빛 밝은 언덕에 넓은 공지가 나타났고 공지에는 주은래동상이 있었다. 동상뒤편으로 2층으로 된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팔로군 중경판사처 유적지였다. 1938년 겨울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무한으로부터 중경에 옮겨와 이곳에 자리를 정했다. 주은래는 이곳을 임대해 들고 대외로 《주공관(周公馆)》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중국공산당 남방국(南方局) 지도기관과 중경 주재 팔로군 판사처의 사무를 보았다. 비록 국공합작이라고 하지만 국민당은 늘 밀정을 배치해 이곳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를 지향하고 적극적으로 항일하려는 각계 인사들은 늘 이곳에 찾아와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중경에 있던 조선혁명가들도 반일전선에 나가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비밀리에 팔로군판사처 일군들과 접촉하면서 팔로군이 통제하는 항일근거지로 갈 의향을 표했고 또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지도자들의 적극적인 건의를 접수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으로 북상한것도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협조와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추측된다.

중경 팔로군 판사처 유적지를 보고나서 사업일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유중구 련화지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에 대해 문의하였다. 전문일군인지라 대뜸 안다고 하면서 그냥 번지수를 대서는 찾아가기 힘드니 상해일백(上海一百)이라는 백화상점으로 가자면 기사들이 다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해청사(渝海大厦)를 찾고 그곁으로 가면 기념관이 보인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다시 택시를 잡고 상해일백이라고 하니 기사는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니 번화가에 커다란 백화상점이 나타났는데 상해일백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니 유해청사도 보였다. 청사곁에는 한국식 표기법으로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진열관》이라고 쓴 커다란 알림표시가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지르며 차에서 내려 진렬관으로 갔다.

팔로군 중경판사처 유적지(주공관)의 주은래동상.

중경 한국림시정부 유적지 안내표.

중경 대한민국림시정부 기념관.

유해청사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낮은 평지에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 바른편 언덕에 위치한 림시정부진렬관 건물이 보였다. 검푸른색 칠을 한 담이 둘러있는 속에 벽돌기와 건물들이 있었다. 널문으로 된 정문우에는 우리식 표기법으로 《대한민국림시정부》라고 씌여있었다.

진렬관입구에서 기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념관 가경해(贾庆海) 관장이 나와 맞아주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가경해관장은 더욱 반가와하면서 직접 우리를 기념관으로 안내하고 해설해주는것이였다. 반백이 넘은 가경해관장은 소박하고 진지하며 열정적인 사람이였다.

진렬관정문을 들어서니 둔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고 계단주변에 서로 이어진 2층, 3층 건물이 둘러있었다. 계단은 깨끗하게 청소되여있었고 량쪽에 열대 화초를 심은 화분을 배렬해놓아 건물에 생기를 보태주었다.

계단왼편 건물은 옛 건물을 보수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전시관에는 중경의 사적지 소개, 림시정부 이동로선과 활동 소개, 광복군 조직체계 소개, 관련 인물소개를 비롯한 풍부한 내용이 포함되여있었다. 가경해관장은 관련 내용을 열심히 소개해주었다.

1938년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가심해지자 국민당의 정면 전장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도시들이 함락되였다. 당시 호남성 장사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와 정부 요원들은 부득이 광동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광동도 위태해지자 광서성 류주로 옮겨갔다. 전란속에서 림시정부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김구는 중경에 가서 국민정부와 련락을 취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국민정부는 현지정부에 명령해 류주에 있는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을 중경부근의 기강에 이동시켰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으로 입주하기전까지 일년 남짓한 동안 기강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강에서 각 당파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강에는 7당 대회 옛터, 김구 거처 유적지, 리청천을 비롯한 림시의정원 요원 거처 유적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기강에서 병사하거나 과로사한 조선인 묘소가 남아있다. 간고하고도 어려운 전란속에서 김구주석의 장남 김인을 포함해 조선지사 80여명이 중경지역에서 병사했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항일전쟁시기 대부분 시간을 중경에서 보냈다. 중경에서 림시정부를 재조직하고 한국광복군을 창립함으로써 반일투쟁과 미래 건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중경이 일본군의 끊임없는 폭격을 받았기때문에 림시정부사무청사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는 양류가(杨柳街)에 자리잡았다가 석판가(石板街)로 옮겼으며 다시 오사야항(吴师爷巷)으로 이주했다가 1945년 1월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진렬관자리에 옮겨 11월 귀국할 때까지 사무를 보았다.

림시정부 기념관 전시청.

림시정부 돌계단(광복후 림정요원들은 귁국을 앞두고 여기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광복후 귀국하기전 림정요원들의 기념사진.

진렬관을 나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가경해관장은 진렬관 오른쪽 두번째 건물은 원모습 그대로 되여있다고 했다. 건물에는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리시영, 림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가 사용하던 방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귀국행로에 나선 독립지사들은 바로 이 청사의 돌계단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겼던것이다. 중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운명을 함께 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자체의 군력을 키우기도전에 해방을 맞게 되였으며 급촉한 걸음으로 귀로에 올랐던것이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한국 림시정부청사 유적지는 1995년에 개방하였고 2000년 9월 17일 광복군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면서 보수하고 전시내용을 확대하였다.

림시정부청사 유적지를 떠나면서 래일 기강으로 함께 갈것을 가경해관장과 약속하였다. 가경해관장은 기꺼이 안내해주겠다고 대답하였다.해질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기때문에 우리는 계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중경시 중산4로(中山四路)에 위치한 계원(桂园)은 1945년 국공담판을 위해 중경에 온 모택동이 거주함으로써 유명해졌고 지금도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있다.

련화지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역시 여의치 않았다. 중경의 거리는 100메터의 평탄하고 곧은 길이 없을 정도다. 굽은 길이 아니면 비탈진 길이여서 중국이 《자전거 왕국》이라 불리우지만 중경에서는 자전거를 볼수 없다. 비탈길이 많기때문에 자전거를 탈수없었던것이다. 

계원에 이르니 2층으로 된 벽돌건물이 나타났고 아래층에 아치형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나타났고 2층으로 된 정교한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계원의 주건물로서 모택동이 머물렀던 곳이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승리후의 국가대사를 토의하기 위해 장개석은 3차에 거쳐 전보로 모택동을 중경에 초청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고위장교이고 정치부 부장을 맡았던 장치중은 연안까지 가서 모택동을 영접해왔다. 그리하여 중경담판이 시작되였다. 모택동의 안전을 돌보기 위해 장치중은 자기의 개인사택인 계원을 내주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밤에는 교외의 홍암촌(红巖村) 팔로군 판사처에서 취침하고 낮에는 계원에서 사무를 보았다. 그리고 계원의 회의실에서는 주은래가 국민당과 치렬한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 드디어 담판이 이루어지고 국공량당은 평화를 위한 《쌍십협정(双十协定)》을 체결하였다.

 

중경의 계원(장치중의 저택), 중경담판을 할 때 모택동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유명.

중경담판시 계원의 모택동의 침실.

중경담판시 9월 3일 모택동이 계원에서 한국 림시정부 전원을 접견했다는 안내문.

모택동은 계원에서 중경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보았고 중경 림시정부 요원들을 접견하였다. 모택동비서의 일정기록에서 9월 3일 모택동이 한국 림시정부 요원을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있다. 그러나 한국 림시정부의 관련 자료들이 많이 분실되였기때문에 모택동이 구경 어떤 요원들을 만났고 또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길이 없다. 그러나 다만 접견이 있었다는것으로도 중국내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중시정도를 알수 있었다.

북경에서 살고있는 김규광의 아들 두건씨는 중경에 있을 때 어머니와 함께 팔로군판사처에 간적이 있다고 회억하였다. 그는 당시 주은래가 팔로군판사처에서 중경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고 증언하였다. 김규광의 안해 두군혜녀사와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녀사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기때문에 두군혜는 연회에 아들을 데리고 갔던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도 그만큼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중시하고있었던것이다.

모택동이 사용했던 사무실과 객실, 그리고 국공담판이 치렬하게 진행되였던 회의실은 모두 원모습대로 정리되여있었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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