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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57)—조선의용군의 북상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2-09 07:51:00 ] 클릭: [ ]

독립운동 원로들의 지지를 받은 김구는 이들을 중심으로 중경에서 한국림시정부를 계속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만들며 장개석과 국민당의 신뢰를 얻은 김구는 림시정부 요원들을 이끌고 중경에 진입하게 되였으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와 반면 수적으로 우세한 소장파 진보적 청년들을 이끌었던 김원봉은 점차 국민당의 배척을 받게 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대다수가 항일 제일선으로 나갈것을 탄원하면서 직접 일제와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중경에서 형식적으로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였고 이를 반대해 1941년 조선의용대주력이 팔로군 통제구역으로의 북상이 있게 되였다.

사천성 기강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중경에 돌아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난 오후였다. 비는 계속 구질구질 내리고있었다. 우리는 련화지 림시정부청사부근에서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들었다. 비교적 활달한 가경해관장이 우리를 초대하였다.

식사후 가경해관장을 따라 우리는 중경의 다른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1940년 중경에 옮겨온 한국림시정부는 처음에 양류가에 자리를 정했지만 일제의 폭격에 가옥이 파손되자 석판가로 옮겼다. 그러나 역시 일제의 폭격이 잦아 다시 오사야항 1호(號)로 이주했다. 오사야항이 바로 지금의 화평로 2항(巷)이다.

유중구 화평로(和平路) 2항에 이르니 찌그러진 2층 집들이 보였는데 헐망한 집에는 아직까지도 주민이 살고있었다. 나무와 얇은 벽을 발라 만든 건물은 금방 무너질것만 같았다. 이곳 5, 6, 7번지 건물이 당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이 거처를 잡고 사무를 보던 곳이다. 중경시절 림시정부는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물러있었고 김구는 여기에서 《백범일지》의 후반을 완수하였다.

오사야항 유적지에는 작은 기념비가 있었는데 한자로 《대한민국림시정부구지(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새겨져있었다. 기념비는 1995년 련화지의 림시정부기념관을 만들 때 함께 세웠다 한다.

건물위층은 복도로 서로 이어져있었고 김구는 당시 2층에 거주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9가구가 살고있었다. 중경시 도시개발계획에 속한 이곳의 위험가옥은 곧 허물게 된다. 가경해관장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언녕 허물어야 할 건물이였지만 건물앞 기념비가 있어 연장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보수하든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 만들든지 조치를 취하도록 관련부문에 반영하련다고 말했다.

화평로 2항(옛 오사야항 1호)의 대한민국림사정부 거처.

추용로 37번지, 한국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지금은 미원이라는 가게로 변함).

화평로의 림시정부유적지를 보고나서 우리는 추용로(鄒容路)로 갔다. 추용로 37번지는 한국 광복군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기강으로부터 중경에 본거를 옮긴후 김구는 림시정부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기에 서둘렀다. 조선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요구하던 장개석도 이때 김구와 한국림시정부를 수락하고 조선의용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허락하였던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오전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Korean Independence Army)창립식이 있었다. 광복군 총사령은 리청천, 참모장은 리범석, 총무처장은 최용덕, 참모처장은 채형세(菜衡世), 부관처장은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은 안훈(安勛), 훈련처장은 송호, 군무처장은 류진동(劉振東)이였다.

광복군창립식에는 림시정부 요원과 중국 국민당의 손과, 오철성(吳鐵城), 공산당의 주은래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가하였다. 광복군이 창립되였던 가릉빈관자리는 지금 가릉 신촌(新村)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렸다.

광복군은 창립된후 각지에서 선전공작과 초모활동을 진행하였다. 사령부는 중경 추용로 37번지에 있는 국민당군사위원회 군정부건물에 정했다.

추용로에 도착하니 3층 낡은 건물이 나타났다. 낡은 건물이였지만 정면은 새롭게 장식하였고 1층은 미원(味苑)이라는 음식가게였다.

이시기 한국광복군은 몇개 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리준식(李俊植)이 제1지대장으로, 공진원(公震遠)이 제2지대장으로, 김학규(金學奎)가 제3지대장으로, 라월환(羅月煥)이 제5지대장을 맡았다.

광복군은 대부분 기간 본부를 서안에 정했기때문에 중경의 추용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중경지역 답사를 시작해서 사흘째 되는 날인 11월 20일, 우리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길을 떠났다. 날씨는 그냥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였다.

빈관앞에서 택시를 타고 중경시 남안구 탄자석(彈子石)으로 갔다. 거기에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옛터, 김원봉의 거주지, 광복군 제1지대 본부옛터를 비롯한 유적이 있다.중경시 남안구는 장강 이동과 이남지구가 포함된다. 탄자석은 남안구의 북부에 위치했다. 한시간뒤 우리는 탄자석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먼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탄자석 묘배타(苗背沱) 81번지를 찾아갔다. 묘배타는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에 위치했기때문에 정확한 주소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택시기사가 현지인들에게 열심히 물어서야 겨우 남안구 탄자석 묘배타 81번지를 찾아냈다.

옛날에는 손가화원(孫家花園)이라는 공원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사천성 물자저장관리국이 자리하고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평탄한 곳이였다.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커다란 정문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국가저비국(國家儲備局) 435처(處)라고 씌여있었다. 정문뒤로 커다란 공지가 있었고 한쪽에 새로 지은 3층 건물이 있었다. 옛날의 손가화원정원과 건물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던것이다.

1940년 3월 중경에 온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요원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본부를 거느리고 이곳에 거처를 잡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과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당시 주소는 남안구 탄자석 아궁보(鵝宮堡)였다. 탄자석 묘배타는 비록 중경시에 속한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농민이였고 생활도 넉넉하지 못한 편이였다.

묘배타를 보고나서 탄자석 대불단(大佛段)으로 향했다. 탄자석상업구를 지나니 좁은 골목길량켠에 크고 작은 가게와 난전을 펼친 시장거리가 나타났다. 비가 온 뒤라 길에는 흙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이 많고 길이 좁았기에 차를 시장입구에 대기시키고 도보로 걸어 들어갔다.

시장길을 반쯤 더 들어가니 대불단 150호 건물 표식이 보였다. 2층 낡은 벽돌건물이였는데 지금은 유명한 동군각대약방(桐君閣大藥房) 분점으로 되여있었다. 이곳은 1942년 광복군 제1지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40년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가 중경에 자리를 잡자 곧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이룩해냈다. 그리하여 국민당통치구역에는 두개의 조선인 반일부대가 있게 되였다. 하나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지지하는 조선의용대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이 지원하는 한국광복군이였다. 이 두 조선인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각 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이시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소장파 청년들은 일제와 직접 싸울수 있는 북상진로를 주장하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도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통합시키는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 대회에서 북상을 결정하고 조선의용대 각 부대는 하남성 락양에 집결하여 북상항일 준비를 다그쳤습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여 팔로군 통제지역으로 가자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광복군쪽으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1941년 11월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제6차대회를 소집하고 림시정부에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한국림시정부에는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두 당이 경쟁하는 국면이 나타났고 광복군을 재편성하게 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총사령 겸 제1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한 뒤였기때문에 사실 중경에 남은 대원들은 50여명 정도뿐이였다. 제1지대 본부에는 부지대장 신악, 비서에 리달(李達), 총무조장에 리집중, 조원에 한지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경 탄자석 대불단 150호에 거주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부가 있었던 대불단 150호로부터 조금 더 나가면 대불단 172호가 나타난다. 이곳은 광복군 부총사령이며 제1지대 지대장이였던 김원봉의 거처였다. 3층 벽돌건물이였지만 지금은 더욱 헐망하였다. 아래층은 간소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고 그 곁에는 소매점과 동군각대약방 다른 분점이 있었다.

중경에서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치렬한 경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국림시정부내의 권력과 중국측의 지원금사용을 비롯한 문제를 가지고 진행된 이러한 경쟁과 투쟁은 1945년 일제의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였고 마침내는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한채 각자가 귀국행로에 올랐던것이다.

남안구 탄자석(손가화원 옛터),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곳.

대불단 150호, 광복군 제1지대가 있었던 곳.

광복군 1지대 김원봉, 2지대 리범석, 3지대 김학규(좌로부터).

대불단 172호, 김원봉이 거처했던 옛터.

탄자석의 사적지들을 답사하고나서 다시 중경시 조천문으로 갔다. 저녁 배를 타고 중경을 떠나야 했기때문이다. 우리가 타야 할 배편은 바로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주력이 북상하여 태항산지역으로 나가던 배길과 비슷하였다.

11월 20일 저녁 우리는 조천문부두에서 우의호(友誼號) 관광선에 올랐다. 3층으로 된 륜선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방은 307번이였다. 4명이 함께 방 하나를 썼는데 침대는 상하 두층으로 모두 6개가 있었고 방에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배는 네온등불빛이 휘황한 중경부두를 떠나 서서히 동으로 달렸다.

중국의 최대하천인 장강의 옛 명칭은 양자강(揚子江)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청장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장강의 총길이는 6380㎞이다. 장강은 사천경내에서 민강(岷江), 타강(沱江), 가릉강과 합친뒤 무수한 산을 지나면서 세계적인 명소인 장강삼협을 형성했다.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으로 구성된 삼협은 서부 봉절(奉節), 백제성(白帝城)에서 시작되여 호북성 의창까지 총 거리가 192㎞이다.

배가 중경시를 벗어나자 밖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울리는 뱃고동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가 들려올뿐이였다. 침대에 누워 조선의용대의 북상항일로선을 생각해보았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선생은 《태항산근거지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그 경과를 자상히 서술하였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지도원인 석정 윤세주는 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 대원들을 인솔하여 《민생호》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났다.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진출은 김원봉이 비밀리에 중경 팔로군판사처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와 련계하여 이룩되였다. 이를 모르는 국민당의 고위 관원들이 연회를 베풀어 이들을 전송하기도 하였다. 최채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의용대의 북상을 엄호하기 위해 중경을 떠나지 못했던것이다. 김원봉마저 움직인다면 의용대의 북상행로의 정체가 드러나 누구도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날수 없었기때문이다.

조선의용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은 배를 타고 산간도시인 만현(萬縣)에 도착하여 하루 묵은후 1월 3일 봉절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들은 천하명승인 구당협, 무산(巫山) 12봉을 구경하면서 의창부근에 이르렀다. 당시 의창은 일제에게 강점되였기때문에 의창으로 가지 못하고 자귀(秭歸)에서 배를 내렸다. 이들은 다시 륙로로 호북성 로하구(老河口)를 거쳐 락양에 도착하였다가 맹진(孟津) 나루를 통해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진출하였던것이다.

아름다운 장강 소삼협.

장강삼협의 웅위한 산봉들

11월 23일, 우리가 탄 배는 구당협을 거쳐 무산에 이르렀다. 장강의 지류인 대녕하(大寧河)가 이곳에서 장강에 흘러드는데 소삼협은 대녕하상류에 위치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바꿔 타고 천하절경인 소삼협을 관광하였다. 맑은 물과 울긋불긋 단풍이 든 산, 이따금 보이는 산간마을들은 참으로 선경인듯싶었다.

북상항일에 나선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아름다운 삼협을 지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역시 우리와 같이 장쾌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여 경탄을 련발했을것이고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일제를 타격할 의지를 더욱 굳혔으리라 생각하였다.

배는 계속 동으로 달렸다. 푸른 물결은 쉬임없이 흐르고 천태만상의 산봉들은 련달아 눈앞에 아득히 펼쳐졌다. 하나하나의 산봉들의 미묘한 자태를 눈에 새기기도전에 또 다른 산봉이 나타나 숨까지 가빠났다. 철석같은 몸으로 장강을 조이는듯 기문(夔門)은 웅위로운 남성의 미를 한껏 자랑하였고 구름이 허리에 감도는 신녀봉(新女峰)은 아름다운 소녀의 몸매를 련상시켰다.

웅위한 구당협, 수려한 무협, 위태한 서릉협을 거쳐 날이 어두워져서야 우리는 의창에 도착하였다. 의창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비행기편으로 북경에 돌아와 중경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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