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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0)—고점자전오가자 전투(상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12-09 08:16:36 ] 클릭: [ ]

길림성 길림시창읍구의 화피창진에는 간소하게 꾸며진 렬사릉원이 있다. 4,000여 평방메터의 부지면적에 9.5메터 높이의 기념탑을 가진 이 릉원에는 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수백명 렬사들이 고이 잠들고있다.

길림-장춘도로북측에 위치한 릉원은 1949년 5월에 축조되고 1981년 7월에 수선을 거쳤다고 하지만 60여년의 세월속에 관리와 수선이 따라가지 못해 의연히 많이 헐망해보였다. 릉원에 들어서면 우선 키높이 솟은 기념탑이 한눈에 안겨온다. 기념탑정상에는 붉은 오각별이 있고 정면에는 당천제가 쓴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제6사 길장제전역 렬사지묘》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기념탑 기좌에는 주보중, 등극명, 종인방 등 지도자들이 남긴 제자가 새겨져있었다.

기념탑뒤에는 3개의 하얀 비석이 세워져있었는데 가운데 비석은 희생된 전우들을 기념하는 독립 6사 16퇀 전체장병들의 기념글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량켠의 비석에는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김두경, 곽동길, 김병선, 장석봉, 박문수……비석에 새겨진 173명 렬사명단을 보면 대부분이 조선족 렬사임을 알수있다. 우리민족 우수한 장병들이 큰 희생을 내면서 싸운 전투, 우리의 렬사들은 구경 어떻게 싸웠을까?

길림시 창읍구 화피창진의 렬사릉원.

화피창 렬사릉원의 비석에 새겨진 렬사명단.

1948년에 이르러 동북에서의 국민당군은 갈수록 피동에 처해있었고 우리군의 강대한 공격에 포위, 소멸될 위험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승리에서 승리를 거듭하고있던 동북민주련군은 이때에 이르러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부대명칭을 영광스러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부대명칭을 바꿈에 따라 우리 장병들은 모두 동북해방의 서광을 보는듯싶어 더욱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장기간 길림시에 둥지를 틀고 동만의 아군 독립사단과 밀고당기는 접전을 계속해오던 국민당 60군은 드디여 맥을 버리고 장춘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우고있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국민당 동북사령관인 위립황도 장춘주변의 국민당군을 전부 장춘에 집중시킬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하여 60군은 길림시주변에서 략탈을 감행해 쌀을 장만하는 한편 장춘으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길장도로에 병력을 집중하고있었다.

1948년 2월 16일, 동북대지에는 유난히 눈도 많이 내렸다.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6사는 대수하(大绥河)와 소수하(小绥河)에 나온 국민당군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16퇀을 출발시켰다. 하지만 길북의 독립 8사가 국민당군과 치렬한 접전을 치른다는 소식을 접한 사단지휘부에서는 작전계획을 바꾸고 독립 8사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지휘부는 16퇀에 방향을 돌리라고 통신병을 보낸후 17퇀과 18퇀을 거느리고 화피창(桦皮厂)과 오가자(五家子), 고점자(孤店子)쪽으로 전진했다.

원 독립6사 16퇀 1영 2련 2패 패장이였던 허청근로인은 당시 고점자에서 적과 조우하던 경위를 이야기했다.

《그때는 고점자가 야산인데 나무도 얼마 없었습니다. 거기도 당시 눈이 이렇게 쌓였습니다. 새하얗게 많이 쌓였습니다…우리 한개 련이 들어가는데 보병이니깐 흰눈우를 나갔습니다. 마을과 한 200메터, 300메터 거리를 두고있을 때 거기서 사격하는데 우리는 평지에 로출되여 마구 적탄을 맞았습니다. 완전히 피동이였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한개 반을 데리고 〈어떻게 하나 벽에 붙어야 사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사들은 일어서면 맞구 일어서면 맞구 나가자면 맞구 그랬습니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어서는데 이쪽저쪽에서 전우들이 쓰러졌고 저도 어깨를 맞았습니다. 기관총의 위력이 아주 셌습니다. 기관총탄에 맞으니 탁 밀쳐서 눈에 쓰러져 다음 총알을 맞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아찔하던데 그 다음 정황을 잘 모르겠습니다.》

고점자 전투에 참가하였던 허청근 로인.

굴함없이 적과 싸운 6반 전사 유룡철.

적정 변화를 모르고 앞장서 진군하던 16퇀은 고점자에서 미리 매복해있던 국민당군의 습격을 받았고 처음부터 많은 희생을 냈다. 아군의 행동을 간파한 국민당 60군은 림시로 편성한 21사단에 병력을 더 보충했을뿐만 아니라 미리 고점자부근의 마을에 매복해있었던것이다.

16퇀 선두에 선 각 련이 눈우에 많이 쓰러지고 허청근로인도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지만 16퇀의 《김성범련》인 2영 7련은 주광문(朱光文) 련장의 인솔하에 신속히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주변상황을 신속히 판단한후 고점자 마을동쪽 2킬로메터 떨어진 고쟈워펑(高家窝棚)을 먼저 점령하기로 했다. 2패 6반의 전사 유룡철(俞龙哲)은 눈길을 헤치고 적진에 돌입해 적 기관총수가 탄창을 바꾸는 찰나 그놈을 급습해 기관총을 로획하였다. 그는 기관총으로 적을 사격하면서 2패와 3패 전사들을 이끌고 고쟈워펑을 점령했다. 놈들은 길을 열기 위해 거듭 고쟈워펑을 공격해왔고 유룡철은 몇명 전우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진지를 지켜 싸웠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주광문련장과 박문수(朴文绥)지도원은 예비대인 1패를 거느리고 고점자동쪽 마을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적을 막고 싸울 준비를 하였다.

전사들은 있는 화력을 다 동원하여 적 한개 영의 공격을 세차나 물리쳤다. 하지만 탄약이 곧 바닥이 났다. 주광문련장은 《우리 김성범련의 용감한 전투정신을 보여줄 때가 왔다!》고 소리치면서 적을 맞받아 육박전을 치렀다.

기관총수 오룡진은 어깨와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계속 전투를 견지했다. 그는 적의 시체에서 수류탄과 탄약을 주어왔고 재차 공격해오는 적진에 련속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마지막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왼쪽가슴에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흙담에 붙어서서 망원경으로 적정을 살피던 주광문련장은 련속 통신병을 기타 련과 영부에 보냈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이때 적 포탄이 터지면서 주광문련장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의 다섯번째 공격마저 물리치느라 진지에는 몇사람이 남지 않았다. 부상당한 박문수지도원은 서류가방을 꺼내 비밀서류를 불태우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영영 눈을 감고말았다.

전투영웅 오룡진렬사.

전투영웅 기관총수 정형련.

길림과 장춘사이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놈들은 악을 쓰고 공격해왔다. 탄약이 떨어진 김성범련 전사들은 총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뛰여들어 백병전을 벌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인 부반장 황주성은 날렵하게 적 다섯놈이나 찔러넘겼지만 기진맥진하여 총창을 뽑을 새도 없이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기관총수 김성만도 탄약이 떨어지자 기관총을 눈속에 파묻고 보총을 가지고 적과 싸우다 쓰러졌다. 권봉우, 김덕선, 윤재규…우수한 김성범련 전사들이 하나하나 쓰러졌다.

일곱번째로 적의 공격을 물리치니 진지에는 기관총수 정형련(郑亨连)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적의 시신에서 수류탄과 총알을 장만해가지고 적과 최후의 결전을 진행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적이 접근해오자 그는 갑자기 일어서서 기관총사격을 가했고 이곳저곳 자리를 옮기면서 적과 싸웠다. 그는 적무리속에 련거퍼 수류탄 네개를 던진후 적이 혼란한 틈을 타서 마을밖으로 이동하였다. 홀로 철길방향으로 퇴각하던 정형련은 십여명 적이 추격해오자 비술나무뒤에 숨었다가 정확한 사격으로 적 군관을 쓰렀뜨려 적을 물리쳤다.

진종일 물 한 모금, 밥 한술 먹지 못한 그는 지칠대로 지쳐 철길둔덕에 쓰러졌다. 적이 철수한후 전쟁터를 수습하던 전사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피투성이된 그의 몸은 얼었지만 심장만은 뛰고있었다.

피를 말리는 고점자전투에서 독립 6사 16퇀 1영, 2영, 3영 모두가 김성범련과 같이 불의의 습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내였다. 하지만 이들은 영웅적 기개를 잃지 않고 수배에 달하는 적과 끝까지 전투를 진행함으로써 우세한 국민당 정규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투가 끝난후 독립 6사에서는 정형련, 유룡철, 오룡진 등에게 전투영웅칭호를 수여했고 희생된 주광문과 박문수를 기념하기 위해 김성범련 1패를 《주광문전투영웅패》로, 1패 1반을 《박문수반》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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