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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호선생과  자치주 60년 세월속 이야기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4-19 08:51:47 ] 클릭: [ ]

《기억속의 60년》-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특별기획(10)

4월 17일 기자는 조선족언론인의 거두- 오태호옹을 인터뷰하였다.

오태호옹은 필자가 존대하는 간판상사라 그이를 취재한다는 것은 필자로서 너무나 주제넘건만 창주 환갑을 맞아 엮어가는 《60년 이야기》라 그이는 생각밖에 쾌히 취재를 접수하기에 천만 다행이였다.

어제도 모 문련모임에 참가했다는 오태호옹은 년령(85)에 비춰 기억, 사유, 화술 모두가 지난 20여년 필자가 지켜보고 느낀 원본 그대로였다.

오태호는 1950년 10월에 연변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그 걸음으로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였다. 그러니까 그가 자치주생일전부터 1선 기자로 활약했다는 말이다.

필자의 평가로는 오태호는 1950년부터 정년리직한 1986년 4월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혈관속에서 잉크가 흐르는 평생언론인이며 그는 매의 눈으로 기사감을 찾아내고 처녀의 손으로 맵시있게 글을 다루는 조선족언론인의 거두다.

지난 80년대 내가 연변일보사에 입사한 첫날 오태호주필님을 찾아 인사를 올리니 오주필보다도 20년이나 년하인 나를 촌수로 따지니 나의 아주버님이라고 불렀고 7살짜리 나의 딸을 앞에 놓고 《내가 너의 오라바님》이라며 알려줬다.

오태호주필은 그만큼 매사에 확실한 분이다는 말이다.

《찾아 주니 반갑소. 별로 할만한 말은 없는데,,,》

이런 화두로 시작된 인터뷰는 필자의 기대치이상으로 흥미진진하였다

이야기 1

주덕해는 사람을 정말 친절하게 대한다. 개별적으로 뒤에서 주덕해를 불상(부처님)이라고 했다.

1952년 9월 1일, 그러니까 자치주창립경축대회를 이틀 앞두고 주덕해는 연변일보 농촌조 일반기자인 나를 만나 《저기 모주석초상기념비(지금 연변일보사청사 앞 로타리에 모주석초상기념물을 세웠음)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가?》고 물었다. 나는 별로 깊은 생각도 없이 보는 그대로 《모주석초상기념대》라면 좋겠다고 했더니 결국 나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자치주창립경축대회는 연길공원체육장에서 열렸는데 연변일보사에서 나에게 취재임무를 맡겼다. 그때 신화사, 인민일보 등 전국 각 신문매체에서 취재를 온 기자들이 5-60명은 잘 되였다. 그때 기자들이 합영한 기념사진이 지금도 있다. 1955년 좌우로 기억되는데 내가 종자문제를 가지고 사론(社論)을 쓴후 상급에서 심사해야 하기 때문에 주덕해댁에 찾아갔다.

나는 사론에서 《종자를 잘 선택하고 개량하면 5%의 증산을 할수 있다》고 했다. 주덕해는 원고를 자세히 읽어보고 나에게 《5%는 너무 많으니 2- 3%면 어떻겠는가?》면서 실사구시적이여야 한다고 수개하였다.

그때 나는 별다른 근거가 없이 농민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글에 옮겼는데 그때는 종자개량이 별다른 개량이 아닌 다른 품종을 심어보고 대비하는 수준이였다.

그때 원자2호(벼)가 산량이 높다고 하여 그 벼가 무상기가 길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심었다가 한해 농사를 망쳤다. 후에 일본서 오다시로5호(조숙종)를 인종하여 2~3년간은 크게 환영받았다. 후에 또 일본서 아오모리(청심5호)를 인종했다. 청심5호는 오다시로5호보다 산량이 높았다. 이렇게 2~3년후 연변에 리창근 등 농민육종가들이 나와 연변에 맞는 우량품종 종자들이 연변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2

오태호선생은 당년에 중국조선족의 명인들이였던 황순옥, 김시룡, 최죽송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기자다.

이날 오태호선생은 이들을 력사적인 시각으로 한사람씩 실사구시적으로 정평하며 언론인의 실사구시정신을 재현하였다.

지난 60년대(63년부터 64년 사이)오태호선생은 연변일보사의 정규렬, 양정호기자와 함께 연길현동성용공사 동성5대 달리동에서 밤을 묵으며 황순옥을 취재하고 《한 폭의 붉은 기발》이란 제목으로 반개면에 달하는 장편기사를 썼다.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부장은 황순옥의 사적기사를 먼저 읽고 너무 감동된다며 친히 사론을 쓰겠다고 하였다. 하여 사론까지 배합한 황순옥의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황순옥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면서 제일 먼저 엽검영원수가 황순옥을 초청하여 북경군구에서 강용(講用)하게 하고 다음은 심양군구, 길림성군구에서도 황순옥을 초청하였다.

황순옥은 이렇게 모택동저작학습열성분자로 전국에 떴다.(그후에 다른 기자가 《산골의 수재》라는 제목으로 황순옥을 보도하였음)

오태호선생은 황순옥을《단순히 농촌의 무식한 부녀로서 한글을 깨치고 문맹에서 벗어난 농촌부녀》로 정평, 그가 철학적이나 리론적이 아닌 명인이라며 례를 들었다.

지난 70년대에 《인민일보》 리론부의 섭미초(聶眉初)녀기자가 황순옥을 취재하러 연변에 왔다. 연길현 최성림 현위서기, 리문항 부현장, 리송영 선전부장이 직접 섭미초를 접대, 연변일보기자로 오태호가 배동했다.

그때 연길현지도부는 《인민일보》여론의 힘을 빌고저 정말 열정적으로 섭미초를 접대했다. 섭미초는 대단한 술군이였다. 술을 한다하는 리문항도 그녀의 술대상이 안되였다.

그런데 섭미초는 돌아가서 황순옥에 관한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섭미초는 오태호에게 전화로 그 원인을 밝히며 《황순옥은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서 리론을 모르고 단순히 암송으로 강연한다》며 실례를 들었다.

황순옥을 취재할 때 섭미초는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를 담론하면서 그들 각자의 리론이 뭔가를 황순옥한테 물었더니 대답이 너무나 허무했다고 했다.

그외 황순옥이 문화혁명때《실제행동으로 자본주의꼬리를 베였다》기에 《어떻게 베였는가?》고 물었더니 《농민들이 시장에 돼지새끼를 팔러가는 것을 직접 길에 나서 두 팔을 벌리고 못 가게 막아 냈다》고 하더란다.

황순옥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오태호 황순옥 

다음은 김시룡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시룡에 대한 취재는 오태호선생이 초기부터 발이 닳게 뛰여다니며 했다고 한다.

특히 김시룡의 쏘련참관기는 취재한 그날밤으로 써내 이튿날부터 《김시룡 쏘련참관기》가 련재로 발표됐다. 후에도 김시룡을 수차 취재했다.

주덕해는 김시룡을 극진히 부추겼다. 일본에서 선물받은 자동차, 이양기, 뜨락또르를 김시룡에게 줬고 심지어 자기가 쓰던 체코제 렵총까지 김시룡한테 선물했다.

김시룡은 주덕해의 비준쪽지(批條)로 대부금을 맡고 우사, 양사, 만마리양돈장을 짓고는 마무리를 못지어 결국 빚으로 남겼다. 나도 먹새가 좋은데 김시룡도 술과 먹새가 좋았다. 그때 나는 김시룡과 함께 삶은 염소고기를 한사발이나 먹었는데 아무 탈이 없었다. 염소고기는 정말 탈이 없는 좋은 고기다.

김시룡이 남겨놓은 것이라면 려명대학뿐이다.

김시룡이 50년대 초기에는 확실히 형세에 맞춰 일을 잘했는데 58년 대약진의 허풍에 물들어 망가졌다고 나는 본다. 문화혁명때 투쟁도 맞았다.

내가 하루건너씩 다녀도 김시룡은 나한테서 밥값을 안받았다. 마음은 좋은데 결산이 확실하지 못했다. 김시룡부인이 숱한 손님을 접대하면서 정말 무던했다.

신풍대대 최죽송은 안 그랬다.

그는 한치도 틀림없이 량표 넉량, 밥값 20전까지 꼭꼭 결산했다. 농사도 이렇게 따지면서 했기에 성공했다. 사업가는 이렇게 확실해야 성공한다.

최죽송은 유지온상부터 시작하여 유리온상, 《새발모》로 크게 떴다.

그가 뜬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1950년대 초에 연길시정부 제 1기 농업고(農業股) 리광현고장이 《평북일보(조선평안북도일보)》를 가지고 농촌조 기자인 나를 찾아와서 평북일보에 조선의 김성제(金成濟)가 새발모농법으로 고산을 낸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서도 새발모를 하면 안되겠는가고 건의했다. 그래서 최죽송을 찾아 갔더니 최죽송이 자기 논밭에서 실험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해에 최죽송은 《새발모》로 쌍당 1만 6천근을 내고 1952년에 전국풍산모범이 되였다.

그후에 최죽송의 새발모농법이 책으로 출판되였다.

그후 나는 《최죽송농업사의 생산계획》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인민일보에서 알고 전화로 원고를 번역하여 보내 달라는 부탁이 왔다. 하여 한어로 번역하여 보낸 글이 《최죽송농업사에서는 어떻게 생산계획을 세웠는가?》라는 제목으로 인민일보에 실렸다. 나는 이 원고를 인민일보외에도 동북일보, 길림일보에 투고했는데 지금보면 꺼리낀다.

최죽송의 계획은 정말 치밀했다.

그는 벼 한 이삭에 달리는 벼알을 훑어 밥상에 놓고 한알씩 세여 한 이삭에 열리는 알수를 계산하고 벼 한포기가 분얼하는 대수를 계산하여 한포기당 산량을 계산해냈다. 그래서 논 한쌍에서 3만근이 나올수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논뚝면적과 기타 가능성 손실을 제하면 쌍당 2만근을 낼수있다는 계산으로 생산계획을 짰다.

인민일보 편집부는 바로 최죽송의 이 점을 포착하고 편자의 말까지 달아서 《최죽송농업사의 생산계획》기사를 실었다. 흑룡강성 모 현의 임극동이라는 사람이 콩농사에서 최죽송의 계산법을 채용해 인민일보가 한전농사로 또 한번 떠들었다.

이야기 3

1957년 길림성 당위서기 리지평(李砥平)이 연변을 시찰할 때다.

신문사에서는 나를 수행기자로 보냈다. 하여 운이 좋게 주덕해 등 일행과 함께 장백산관광을 했는데 그때 정말 고생이 많았다.

주에서 짚차, 중형화물자동차, 군용화물자동차까지 모두 석(셋)대를 배치하였다.

경위로 해방군 한 개반(12명)이 배치되였다.

나는 중형화물자동차를 탓는데 어찌하여 자동차는 뒤바구니 뒤쪽 널판자을 내리드리우고 달렸는데 제일 뒤에 앉은 나는 두다리를 허망에 드리우고 앉아서 울퉁불퉁한 길을 7,8시간을 달렸으니 기가 막히게 고생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기뻤다.

리지평일행은 안도현 삼도구에서 인삼장을 시찰하고 거기에서 하루밤을 투숙하였는데 수장들이 휴식하는 사이에 자동차운전수들이 삼도구강에 가서 남포로 서너근짜리 물고기를 한가마니나 잡아왔다. 주덕해는 산에가서 노루를 잡아오고.

그때 조미료도 없이 맨물에 끓인 물고기가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백산을 올라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그런데도 리지평서기는 60이 넘었는데 한번 쉬지 않고 15-20리를 힘있게 쑥쑥 올라갔다. 그날 날씨가 특별히 좋아 천지구경을 잘 했다.

돌아 올때 화룡신무성에 들려 하루밤을 투숙했다.

신무성은 고온지대라지만 평원이였다. 그때 신무성에 들쭉이 그렇게 많은 것을 처음봤다. 들쭉나무밑에 천을 펴고 나무장대기로 들쭉나무를 흔들면 한바게쯔씩 따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때만도 들쭉을 담을 용기가 마땅치않고 게다가 운수수단이 없어 그 많은 들쭉이 땅에 떨어져 썩는것이 정말 아까웠다.

그번 행사에서 고생도 많았지만 수확이 컸다.

오태호선생은 계속하여 《연변의 미츄린》- 최일선도 정평을 했는데 필자는 이 글에서 이만 생략한다.

오태호선생은 《발자취》총서 제7권 《풍랑》의 주필을 맡고 이상의 인물들을 실사구시적으로 간단히 취급했다고 부언했다.

오태호선생은 지나온 60년을 돌아보며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3년 사이에 인민일보, 길림일보 등 영향이 큰 신문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한것이 기뻤고 1984년에 전국기자모범으로 표창받은 것이 제일 영광스러웠다며 다시한번 회포에 잠겼다.

(오태호선생은 전임 연변일보 총편집, 길림신문 겸임 총편집이였음)

사진 글/오기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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