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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7)-대결전을 앞두고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9 10:11:11 ] 클릭: [ ]

동북인민해방군은 1948년 봄부터 대규모적인 집중훈련단계에 진입하였다. 각 부대는 《대규모 병퇀작전, 정규화작전, 적핵심방어체계공격》이라는 동북인민해방군총부의 지시에 좇아 본격적인 정돈과 훈련에 들어갔다.

대규모 병퇀작전을 진행하려면 우선 그만큼 큰 규모의 병력이 있어야 했다. 동북군구는 2년간의 전투를 거친 야전군과 독립사단 각 부대에 대량의 병력을 보충했을뿐만아니라 동기공세를 마무리하면서 제5종대, 제11종대, 제12종대를 새롭게 편성하였으며 기술병종인 포병종대와 철도종대까지 새로 편성하였다.

동북에 진출할 때부터 중국공산당 동북국에서는 부대확건에 중시를 돌려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부대편성체계를 형성하였다. 구와 현을 단위로 각지에 구소대와 현대대를 편성하고 이들이 성장하면 지방독립퇀으로 확대되며 독립퇀이 다시 독립사단으로, 독립사단이 다시 야전군으로 승격하는 체계였다.

동북에서의 지방 제2선의 부대건설사업은 동북군구 제1부정위인 라영환이 직접 틀어쥐였다. 그의 뛰여난 재능과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동북대결전을 앞두고 동북인민해방군은 막강한 2선 부대를 가지게 되였다.

1947년 8월, 동북군구는 할빈에서 각 군구 지도자회의를 소집하고 2선 병퇀을 조직, 훈련시켜 주력부대에 보충시킬것을 각지에 요구했다.동북군구의 지시에 따라 제1기 2선병퇀 조직훈련이 1947년 8월부터 시작되였다. 동북 각 해방구의 현 지방무장과 제3, 6, 71, 72퇀은 독립 제1퇀, 제2퇀, 제3퇀, 제4퇀, 제5퇀, 제6퇀, 제7퇀, 제8퇀, 제71퇀, 제72퇀, 제73퇀, 제74퇀으로 편성되였는데 도합 2만 8600명 병력이였다.

이들은 각지의 기동부대로 되여 토비숙청과 도로파괴, 경계, 군중보호 사업을 진행하였다. 5개월 내지 8개월간의 실제 작전과 훈련을 거친 후 독립3퇀과 독립6퇀, 독립71퇀 도합 7300여명은 독립6사로 편성되였고 기타 독립퇀은 1948년 3월에 이르러 1선 야전군에 보충되였다. 새로 편성된 제12종대에 6400명, 10종대에 5100명, 9종대에 2500명, 6종대에 2600명, 4종대에 700명 그리고 동북인민해방군 후근부에 2500명이 보충되였다.

1948년 5월에 제2기 2선 병퇀 조직, 훈련이 시작되였는데 새로 1만 8254명을 접수해 독립 1퇀, 2퇀, 3퇀, 4퇀, 5퇀, 6퇀을 편성하였다. 1947년 8월부터 길림성의 새로 입대한 전사거나 주력부대에 보충된 전사들 가운데는 대량의 조선족청년들도 포함되였다. 하지만 일제패망후 참군할 때와는 달리 이때의 조선족청년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왜냐하면 토지개혁을 거쳐 대량의 한족청년들도 공산당의 혜택을 알고 적극적으로 공산당부대에 참가해 그 수가 훨씬 많았다. 때문에 이 시기 입대한 조선족청년들은 대부분 학교를 졸업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은 청년들이였기때문에 군병원이거나 초기 비행학교 그리고 공병, 포병, 철도병퇀을 비롯한 기술병종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길림군구 군사자료
길림성 각지 동북인민해방군 주력부대 보충상황 

치치할공병학교를 졸업한 김장규로인

연길시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김장규로인 역시 이 시기 공병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기술병종인 공병부대의 일원으로 되였던것이다. 1930년에 태여난 김장규는 6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연변에서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게 되였다. 1946년에 형이 먼저 군정대학에 입학했기때문에 입대하기 쉽지 않았다. 겨우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1947년에 영광스럽게 입대하게 되였다.

(김장규) 《입대할 때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또 붉은 띠를 띠고 그랬습니다. 환영이 대단했습니다. 어느 핸가 하면 47년도 4월입니다. 그해 연길에 와 입대하고 조양천 보충퇀에 있었습니다. 퇀장은 장정에 참가한 로홍군이였는데 7일간이나 장정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형님을 만났는데 그때의 만남이 형제간의 마지막 만남이였습니다. 그러다가 5월달에 제제할(치치할) 공병학교에서 모집하러 왔는데 딱 조선사람만 200명이 뽑혀갔습니다. 제제할은 사실 멀지요. 처음 그렇게 멀리 가보는데 제제할에 가서 우리가 3기로 공병학원이 되였습니다. 김창룡이 1기를 졸업하고 우린데서 교원을 했습니다. 포병학교는 목단강에 있었고 주서가 책임진걸로 알고있습니다.》

치치할공병학교에 3기로 입학한 김장규는 1기 선배인 김창룡의 지도하에서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당시 공병학교는 군사편제로 공병4퇀으로 편성하고 산하에 3개 영을 두었는데 조선족청년 200명이 한개 영으로 편성되였다.

(김장규) 《47년도이니 한족학원은 하루밤에도 몇이 도망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린 (도주하는 사람)하나두 없지 뭐. 그리고 학교에서도 계속 모범이지 뭐, 우리 련이. 왕충파가 련장하던게 영장으로 올라가고 그다음 김창룡이 우리의 련장을 맡았습니다.》

김장규는 학원들과 함께 폭탄훈련, 다리를 부설하는 연습을 진행하였다. 늘 폭탄과 씨름해야 했기때문에 훈련은 아주 위험했고 때로는 사고도 피면할수 없었다.

(김장규) 《일본아들 군수창고인데 그 폭탄을 가지고 폭탄훈련을 했습니다. 또치까 폭파법, 그다음 항도를 파고 폭파하는걸 했고 다리 놓는 연습을 했습니다. 충펑주(철선)는 이만큼한데 배를 밀고 물에 들어간 다음 거기에 나무판을 깔아 다리를 놓으면 보병들이 그우로 달아가게 했습니다. 련습하다가 포탄이 원래 그렇지요. 규정이 쇠를 꼽은건 뢰관이 있는게고 나무 꼽은건 뢰관이 없는겁니다. 어느 점심시간이였는데 나는 밥을 빨리 먹지 뭐. 그때 1반이 여기 있고 5반인가 이쪽이고 학교자리인데 그 반에서 나무로 된거로 련습하는 판인데, 밥도 안 먹고. 그런데 내가 방에 들어오니 그쪽에서 쾅~ 터졌습니다. 그래 그 반이 몽땅 몰살했습니다. 참, 그때 13명인가 다 죽었습니다. 맨 조선족, 훈춘사람들입니다.》

공병학교뿐만아니라 당시 포병학교도 있었는데 통칭 특종병양성학교였다. 주서가 특종병 사령을 맡았고 구창성이 부사령으로 있었다. 공산당은 항일전쟁시기 이미 섬북에서 팔로군포병퇀을 조직했었다. 당시 팔로군포병퇀 퇀장은 조선인 무정이였고 정위가 구창성이였다. 팔로군 포병퇀은 항일전쟁시기 규모를 형성하지 못했기때문에 실제 작전에는 많이 투입되지 않았지만 대량의 기술간부들을 양성해냈다.

이시기 포병기술을 익힌 수많은 팔로군간부들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동북에 와서 인재들을 모집해 포병학교를 꾸리면서 점차 규모를 형성해 드디여 포병부대를 편성하게 되였던것이다. 동북에서 일정한 문화수준을 갖추고 혁명의지가 강한 많은 조선족청년들도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동북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일원으로 되였다.

1948년말에 이르러 포병종대의 조선족장병수는 1000여명에 달했고 공병부대에는 400여명 조선족장병이 있었다.

일제통치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부유한 동북을 저들의 침략야심을 실현하는 중요한 후근기지로 간주하고 대량의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동북의 광산과 량식을 전선으로 수송하거나 본토로 략탈해갔다. 때문에 동북은 중국 그 어느 지역보다도 철도선이 많았다. 이는 동북에 진출한 팔로군과 국민당군에게 있어서 모두 중요한 자원이였다. 남먼저 동북에 진입한 조선의용군도 철도수송에 중시를 돌리고 동북민주련군을 도와 철도안전보위임무를 훌륭히 완수함으로써 후에 동북인민해방군 철도병퇀의 창립에 밑거름으로 되였다.

남만철도호로대 조직상황을 소개하는 무순의 항일간부 최강로인

무순의 리홍광지대 출신의 로간부 최강로인은 당시 조선의용군 1지대 철도호로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동북인민해방군에 철도병퇀이 있는데 철도병퇀의 전신이 누군가 하면 남만지구의 우리 철도병이고 또 북만지구의 제3지대에 철도를 보호하는 호로대가 있는데 이 두 대대가 합치면 한개 퇀의 병력인데 이것이 철도병퇀의 전신이 되였다는것을 강조하고싶습니다.》

1946년 4월, 동북민주련군이 사평에서 피어린 혈전을 하고있을  때 전선에서 필요되는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실은 화물렬차가 매하구정거장에 멈춰섰다. 렬차는 매하구를 거쳐 사평전선으로 가려던참이였다. 이를 탐지한 국민당군은 비행기를 파견해 매하구기차역을 폭격하였다. 폭격을 받은 화물렬차는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실었기때문에 무려 24시간이나 련속 폭발되면서 부근이 초토화되였다. 당시 하늘땅을 진감한 폭발사건을 매하구사람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매하구에 있던 료중군구 소진광(肖劲光) 사령원은 아까운 무기와 탄약이 단꺼번에 사라지는것을 보고 격분을 참지 못했다. 그는 철도경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병력을 조직해 호로대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했기때문에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부분적 전사들로 철도호로대대를 조직하게 되였던것이다.

(최강) 《다음에 말씀드릴것은 료중군구 소속에 호로대가 있었는데 조선말로 쉽게 말하면 철도경비대대가 조직되였습니다.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1946년 4월에 우리 교도대대(조선의용군 1지대)가 매하구에 주둔하고있는 소진광을 보호하기 위해 매하구에 진군하게 되였습니다. 그 사령원을 만나서 우리가 매하구에 온 원인을 보고하고 지휘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습니다. 한번은 수류탄, 총알, 포탄 그리고 각종 무기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사평전투를 지원하려가다가 매하구정거장에 멈췄는데 국민당 비행기가 와서 폭격했습니다. 그래 하루낮 하루밤 24시간이나 폭발하여 정거장이 기본상 없어졌습니다.

당시 우리는 소진광의 지휘에 따라 한개패를 동원해 사령원을 보호하고있었는데 가능하다면 폭발중에 있는 화물렬차를 분산시키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였습니다. 그후 소진광은 료녕군구에 명령하여 철도를 보호하는 군대가 반드시 있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래 교도대대였는데 호로대로 되였습니다. 약 6개 중대에 경위소대가 있고 철도를 보호하고 순회하는 장갑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이또까〉라는 철도에서 빨리 순회하는 그런것도 우리가 한대 있었습니다.

이래가지고 류하, 통하, 집안, 림강, 무송으로 가는 삼림철도까지 보호하게 되였습니다. 호로대 임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통화를 철퇴할 때 제일 마지막 렬차에다 상병원을 싣고 림강으로 철퇴했습니다. 기관차를 앞뒤에 달았는데 통화철교에서 뒤에 단 기관차 운전수가 철교우에서 도망을 해가지고 차가 정지하게 되였습니다. 그때 나는 우리 분대 철도운전수를 예비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도망친자는 특무지요. 그놈을 총으로 쏴죽이고 다른 운전수를 써서 겨우 철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팔도강까지 갈 때 두번이나 국민당 비행기의 폭격을 당해 비행기와 경비대대 사이의 전투도 있었습니다. 호로대는 팔도강에 대대부를 설치했는데 국민당 비행기가 포탄을 하나 던져가지고 마당에 직경이 5메터되는 큰 구뎅이를 만들어놓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림강에 도착해서 통화철도국 인원들을 집중해 심사를 했는데 부국장이하 70명이 국민당지하당원이 아니면 특무였습니다. 국민당이 철도를 얼마나 중시하고 교통명맥을 장악하려 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동만과 북만에서도 철도경비사업에 중시를 돌렸다. 북만에 진입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주덕해의 인솔하에 부분적 인력을 나누어 철도경비사업을 진행했으며 동만에서는 조선족위주의 연길경비1퇀의 부분적 병력을 나누어 철도호로대를 조직하였다. 1946년 6월에 이들을 토대로 동북민주련군 동만호로군 제4퇀이 편성되였다.

4퇀은 본부를 목단강에 두고 목단강과 도문구간의 철도를 보호했으며 파괴된 철교, 철길, 배수로, 급수설비, 기관차, 신호시설들을 복구하거나 수리함으로써 아군 철도부대의 군보급사업을 잘 보장하였다. 길림시가 해방된 후 호로군을 합병하여 철도 1퇀, 2퇀을 편성하였고 동북에서의 대결전을 앞두고 새롭게 동북인민해방군 철도종대를 편성하였다. 이처럼 초창기부터 철도종대에는 많은 조선족장병들이 포함되였다.

동북인민의 운명을 결정하고 나아가서는 중국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대결전인 료심전역을 앞두고 동북인민해방군 서렬에 6만여명 조선족장병들이 포함되였다. 동북야전군 10종대 28사, 29사, 30사에 수만여명 조선족장병이 있었고 제3종대 7사, 8사, 9사에 조선족으로 구성된 몇개 경위련과 산포영을 제외하고도 분산적으로 수천명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제12종대에 수천명 조선족장병이 있었으며 기타 1종대, 7종대, 8종대를 포함한 각 부대에도 새로 보충된 많은 조선족 장병이 있었다.

동북군구 제1병퇀에는 순 조선족장병들로 편성된 독립4사와 독립11사가 있었을뿐만아니라 조선족장병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독립6사가 있었다.

이들은 이제 곧 펼쳐질 장춘포위전, 금주공격전, 흑산저지전에서 모두 희생적으로 싸워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세웠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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