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영원한 기념비(48) 장춘포위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0 19:03:44 ] 클릭: [ ]

1948년 봄, 전반 동북의 정세는 상대적으로 조용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의 큰 타격을 받은 국민당군은 장춘, 심양, 금주를 비롯한 몇개 대도시에 웅크리고 방어에만 급급하였으며 동북인민해방군은 성세호대한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이때에 와서 이미 70만 정규군과 30만 지방부대를 포함해 백만대군을 형성한 동북인민해방군은 《훈련을 잘해서 장춘을 치자!》라는 구호를 제기하고 드높은 기세로 도시공격훈련에 정력을 쏟고있었다.

1948년 4월 18일, 중국공산당 동북국과 동북군구는 장춘을 공격할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거쳐 5월중순부터 장춘전역을 개시하며 9개 종대를 동원해 장춘을 공격하고 지원하러 오는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확정하였다. 계획에 따라 동북인민해방군은 열흘 내지 보름 시간을 들여 4만명의 대가로 장춘전역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회의는 장춘공격계획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 회보하였다.

4월 24일 중공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동북국의 장춘공격제의를 동의하였다. 동북 한복판에 위치한 장춘시는 동북의 철도교통중추로서 예로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새였다. 《9.18》사변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부추겨 세운 괴뢰만주국정부는 장춘을 수도로 정하고 《신경》이라고불렀다.

당시 일본관동군은 장춘에 견고한 방어공사를 수축해놓았다. 국민당군은 장춘을 점령한후 일본관동군이 구축해놓은 방어시설을 더욱 체계적으로 구축하여놓았다. 시중심의 거리와 건물밑에 모두 지하갱도를 파고 수비의 핵심부분으로 만들어놓았고 도시주변에 너비 3메터 깊이 2메터 되는 깊은 해자를 파놓았다. 뿐만아니라 종심화력을 배치해놓고 철조망을 둘러놓았으며 대량의 지뢰를 매설해놓았다.

당시 장춘시의 인구는 40여만에 달했다.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이며 국민당군 제1병퇀 사령인 정동국이 신7군과 60군 6만여명 정규군과 지방부대 4만여명을 거느리고 장춘을 수비하고있었다.

5월중순, 동북인민해방군은 장춘동남부의 리가툰에 제1전선지휘부를 설치했다. 사령원은 소경광이고 정위는 소화(肖华)였다. 당시 동북인민해방군 1종대와 6종대, 독립 6사, 독립 7사, 독립 8사가 장춘을 겹겹이 포위하고있었다.

 
장춘을 포위한 아군 진지(자료 사진) .

장춘전역은 교외로부터 시작되였다. 해방군이 장춘으로 접근해오자 5월 14일에 장춘수비군은 교외의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왜냐하면 동북인민해방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국민당군이 외부와 련결할수 있는것이란 단지 비행기밖에 없었던것이다. 국민당은 매일이다싶이 비행기로 장춘수비에 필요한 대량의 탄약과 물품을 수송하고있었던것이다.

장춘의 국민당군은 신7군 일부와 60군 한개 사 병력을 동원해 서북쪽으로 출격했다. 놈들은 대방신비행장으로 공격하는 해방군을 물리치고 비행장이 아군의 포격을 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5월 24일, 동북인민해방군은 1종대, 6종대, 12종대와 독립 7사, 독립 10사를 동원해 드센 박격을 가해 신7군 6000여명을 소멸하였다. 정동국이 급급히 부대를 철수시켰기때문에 더 큰 손실을 보지 않았지만 대방신 비행장이 점령되여 마지막 보급선마저 차단되고말았다.

대방신비행장 공격전에서 동북인민해방군도 2000여명 손실을 보았다. 그리고 수비가 막강한 장춘을 맹렬하게 공격한다면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것이라는것도 인식하게 되였다.

1948년 6월 5일, 동북국에서는 림표, 라영환, 류아루의 이름으로 중앙군사위원회에 세가지 작전방안을 상정했다. 이가운데 세번째 작전방안은 장춘을 장기적으로 포위하고 지원하러 오는 국민당군을 소멸함으로써 두달 내지 4개월 시간을 들여 적을 소멸하고 장춘을 점령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세번째 작전방안을 취할것을 중앙군사위원회에 건의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역시 동북국의 건의를 접수하고 세번째 작전방안을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장춘전역은 장기적인 장춘포위작전으로 넘어갔다. 장춘주변의 동북인민해방군은 명령에 따라 장기적으로 장춘을 포위하고 량곡과 연료가 적구에 들어가는것을 엄금하면서 군사와 경제적으로 장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 작정이였다.

이시기 동북인민해방군은 북만의 독립 2사, 독립 4사 그리고 서만의 독립 5사로 새로운 12종대를 편성하였으며 또 새로이 독립 11사를 편성하였다.  1948년 6월 15일부터 20일까지 장춘의 동북인민해방군 전선지휘부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병퇀 사령부로 개칭하고 길림시에서 야전군 사단급 이상 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해방군 제1병퇀 사령 소경광과 정위 소화는 새로 편성된 12종대와 독립 6사, 독립 7사, 독립 8사, 독립 9사, 독립 10사, 독립 11사를 거느리고 장춘에 대한 포위를 더욱 확실히 하기로 하였다. 대량의 조선족장병들을 포함한 독립 6사는 독립 8사와 더불어 국민당 60군이 수비하는 장춘시 동반부를 포위하였다. 독립 6사의 진지는 서쪽의 맹가툰으로부터 동쪽의 소가포자 일선이였다. 독립 6사는 주로 장춘시 적십자병원과 남령, 건국대학쪽의 적을 봉쇄하고있었다.

독립 6사 16퇀 3영 7련의 반장이였던 김병욱로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장춘을 해방할 때 백성들이 너무 먹을것이 없어 나오다가 지뢰에 맞아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술피우는 놈, 돈 내놓고 금목걸이 내놓으면서 살려달라는 놈,별놈들이 다 있었지만 그건 다 규률에 위반되길래 안 받고 그놈들을 포로했습니다.》

독립6사 김병욱로인.

대방신비행장을 잃자 장춘의 국민당수비군의 보급선이 전부 차단되였다. 그리하여 국민당수송기는 장춘에 착륙할수 없어 량곡과 탄약을 장춘에 공중투하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언론이 보도한데 따르면 하루에 40여대의 수송기가 동원되여야 장춘의 기본수요를 만족시킬수있었다. 그런데 장춘으로 간 국민당수송기는 해방군포병의 고사포사격과 전사들의 고사기관총의 습격을 받았기에 제대로 투하를 하지 못해서 실제 장춘에 떨어진 보급품은 얼마되지 않았다.

비상상황에서 정동국은 전시 량곡관제위원회를 설립하고 이른바 <전시 장춘량곡 관제방법>을 반포하였다. 규정에 따라 장춘 시민은 3개월 량곡만 남길수 있고 나머지는 전부 시정부에 팔아야 했다. 만약 더 남긴 량곡을 발견하면 전부 몰수할뿐만 아니라 엄벌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군 단속이 잘되지 않았기에 병사들이 민간인의 량곡을 략탈하는 현상이 비일비재였다.

여름철에 들어서자 장춘시 주민들이 더욱 엄중한 량곡난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은 남은 량곡이 있다고 하여도 감히 공개적으로 밥을 지을수 없었다. 밥짓는 눈치가 보이면 곧바로 병정들이 달려왔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병사자와 아사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시내 량식이 턱없이 부족한데다가 일부 장사군들이 투기를 하였기에 량곡가격도 엄청 뛰여올랐다. 몇원이면 한근 쌀을 살수 있었는데 이때에는 만원을 주어야 겨우 쌀 한근을 살수 있을 정도였다.

6월 28일에 이르러 장춘의 기민들이 경계를 뚫고 량식창고를 략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군경들은 이들을 향해 란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숨지기도 하였다. 실로 장춘은 죽음의 도시로 변해가고있었다.

당시 장춘에서 살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심양에서 리홍광지대 선전대에 입대하였던 매하구의 김형옥로인은 장춘시 시민들의 어려웠던 상황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나는 학교는 못 가고 집에 있었는데 그렇게 팔로군이요 국민당이요 누가 좋은지도 몰랐지요. 량식 한근 사려면 종이돈 마대에다 메고 가서 한근을 사고 했어요. 그때 량잠에서 문을 닫으면 우린 뭐 먹을게 없지요. 그런데 국민당들이 뭐 비행기로 군대에 량식을 날라준다고 해요. 그래서 그걸 챵(빼앗으러)하러 갔다가 죽을번한 사람도 많다는 소식을 많이 들었어요. 군대들은 비행기로 량식을 운송해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깐 백성들이 곤난했지요. 게다가 병사들은 사람들이 뭘 팔고있는걸 보면 값을 흥정하다가 안되면 나오라 해가지고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지요.

그런 말은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장춘에 교민위원회가 있어 난민을 조직했어요. 조선사람들을 구하는 조직이였는데 수십명, 수백명 모이면 조직해서 어디로 보냈어요. 그때 우리 언니가 어린애가 작았구 남편도 없구 그러니깐 갈수 없었지요. 남들은 다 마차같은걸 가지고 로인들 싣고가는데 우린 아무것도 없지요. 나는 언니가 못 가게 하는걸 몰래 난민들을 따라 나왔어요. 그 단체가 우리를 데리고 심양에 왔어요.》

김형옥로인은 당시 장춘의 조선인 난민위원회가 비밀리에 조선인들을 조직해 지옥으로 변해가고있는 장춘시를 빠져 나왔기에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던것이다. 갖은 고생을 다하다 심양에 온 김형옥로인은 후에 리홍광지대의 조선족장병들을 만나 리홍광지대 선전대에 입대하였고 새로운 삶을 찾게 되였다.

포위된 장춘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김형옥로인.

장기적인 포위전술은 실로 장춘의 국민당군에게는 큰 타격이였다. 하지만 따라서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조속히 국면을 타개해야 했다. 동북인민해방군 장병들은 장춘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장춘시를 탈출해나오는 백성들을 접수하고 구조해주었을뿐만아니라 수비군에 대한 적극적인 심리전을 펼쳤다.

전사들은 진지에서 함화하고 전단지를 뿌렸으며 포로된 국민당군 장병과 가족을 다시 장춘에 되돌려보내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당군의 사기는 밑바닥까지 떨어졌고 날마다 몰래 해방군쪽으로 도주해오는 국민당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막다른 골목에 이른 국민당수비군은 출로를 찾기 시작했다. 현지 상황을 모르는 장개석과 동북국민당군 총사령인 위립황은 모두 장춘에서 부대를 철수할것을 정동국에게 명령했다. 정동국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가망이 없는 포위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는 막강한 병력을 조직해 아군의 포위권에서 허점을 찾아 탈출하려 했다.

이때 동북인민해방군은 지방부대로부터 더욱 많은 인력을 접수해 새로운 독립사단을 편성해 장춘에 대한 포위를 강화했다. 화전에서 입대하여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72퇀 전사로 있었던 리순종로인은 장춘포위전때 72퇀은 새롭게 독립 11사로 편성되였다고 했다. 독립 11사는 사장 왕효명을 비롯해 부분적 간부들이 한족인외에 부사장 리덕산을 비롯해 전부 조선족장병이였다고 했다.

《화수림자가 해방되구 그다음 횡도하자 쌍양, 이통 그래서 장춘을 포위했습니다. 쌍양에서 국민당이 장춘으로 후퇴하는걸 막고 싸웠습니다. 그때는 비가 사흘 내렸습니다. 우리는 놈들이 길림으로부터 장춘으로 가는걸 막고 싸웠습니다. 워낙 놈들이 많아서 죽는건 죽고 달아나는건 달아나서 우리는 그대로 장춘까지 따라가 포위했습니다. 11사는 우리 한개 퇀과 할빈의 한개 퇀이 합쳐 편성되였습니다. 전부다 조선족이였습니다.》

화전에서 입대한 리순종로인 .

대량의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는 장춘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는 한편 발악적으로 포위를 돌파하려는 국민당군과 격렬한 접전을 치르게 되였다. 새로운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