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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9)—《7.6》전투(상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0 21:48:47 ] 클릭: [ ]

대량의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는 장춘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는 한편 발악적으로 포위를 돌파하려는 국민당군과 격렬한 접전을 치르게 되였다.

1948년 7월에 이르러 장춘의 국민당군은 포위를 뚫기 위해 대규모적인 공격에 나섰다.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정동국은 신7군 21사와 61사, 60군 52사의 주력을 동원해 장춘시남부로부터 포위를 돌파해 사평쪽으로 도주하려 했다. 놈들은 7월 6일 새벽, 아침안개를 리용해 아군의 진지를 급습하기로 계획했다.

한편 장춘시를 포위하고있는 동북인민해방군 각 독립사단은 추호의 경계도 늦추지 않고 포위를 돌파하려는 국민당군과 크고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렀다. 조선족장병을 위주로 한 독립6사는 장춘시남부 남호주변에 포진하였고 4월에 새로 편성했던 조선족부대인 독립11사는 장춘시서남부를 방어하고있었다.

국민당정예부대는 바로 독립6사와 독립11사가 수비하는 장춘시서남부로 돌파구를 열려 했던것이다.

독립6사 포위진지(리복룡 그림).

1948년 7월 6일 새벽, 이날따라 장춘시는 유난히 안개가 짙었다. 독립6사 17퇀 7련 조선족장병들은 적과 가장 가까운 남령진지를 수비하고있었다. 7련 8반의 엄도영전투소조는 이날 보초를 서다가 짙은 안개속에 언뜰거리는 검은그림자들을 발견하였다.

엄도영이 《주의!》하고 낮은 소리로 전사들에게 적정을 알리자 모두가 정신이 버쩍 들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백메터, 50메터…적이 가까워오자 8반 한철혁반장이 큰 소리로 사격명령을 내렸다.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자 놈들은 잠시 물러섰다가 다시 병력을 정비해 공격해왔다.

한철혁반장은 침착하게 방어전을 조직하는 한편 적정을 신속히 상급에 보고했다. 남령진지를 지키고있던 7련 박지헌련장은 부근의 8련과 련락을 취한 뒤 적정을 퇀부에 보고하는 한편 8반 수비진지를 중점으로 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민당 60군 52사 각 부대는 비행기와 대포, 장갑차까지 동원해 본격적인 포위돌파를 시작했다. 진지는 삽시에 초연이 자욱했고 도처에서 불길이 타올랐으며 총탄이 비오듯했다. 독립 6사 17퇀 7련과 8련 전사들은 막대한 적의 화력에도 불구하고 맞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일제히 전호속에서 뛰쳐나와 공격해오는 적과 백병전을 치르면서 돌진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적의 공격이 점점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적의 중점공격을 4차나 물리친 7련 8반 전사들의 전투열의는 더욱 높아갔다. 8반 한철혁반장은 적의 사기가 떨어지고 물러날 기미가 보이자 박지헌련장에게 달려가 반격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련장의 명령에 따라 새벽부터 싸운 전사들을 이끌고 두려움없이 전진으로 돌격하였다. 아군의 드센 공격을 받은 놈들은 전의를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다투어 손을 들고 투항하였다.

전사 엄도영은 철수하는 놈들을 추격해 홀로 30여명 적을 생포하기도 했다. 한편 더욱 치렬한 접전은 16퇀과 17퇀 린접부근에서 진행되였다. 언녕부터 아군 16퇀과 17퇀 린접부근에 아군의 수비가 없다는것을 간파한 국민당군은 이곳을 중점돌파구로 확정하고 대량의 병력을 배정했다.하지만 독립6사 지도부에서도 방어체계를 검토할 때 이곳이 아군방어의 허점이라는것을 발견하고 적시적으로 사단경위련을 이곳에 배치하였던것이다.

독립6사 경위련의 문서로서 《7.6》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던 연길시의 리복룡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난 입대할 때대부터 조선으로 나갈 때까지 부대경위련에 있었습니다. 경위련은 수장을 보위하는 임무가 주요임무란 말입니다. 때문에 전투기회가 영 없었습니다. 훈련은 똑같은데. 수류탄 뿌리거나 사격하거나 어디가 써먹을데 없습니다. 그래 우리를 전투부대로 교대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조만에 바꾸어주지 않습니다. 우리 련장이 경위원출신인데 5지대가 나올 때 지대장의 통신원하던 사람입니다. 리근호라구. 그래서 저 48년 정월 구태에서 독립6사가 설립될 때 우리는 지방부대인데 독립6사 경위련으로 되였습니다. 경위련은 자기 목숨을 보호하는 사람이니깐 가장 중요한것이 믿음이였습니다. 대부분 팔로군 주요 령도들은 동북에 온 다음 규률이 엄하고 각성이 높으며 확고하게 공산당을 따르는 조선인부대를 경위부대로 했습니다.》

독립6사 리복룡로인(화피창렬사릉원에서).

해방전쟁초기,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은 조선족장병들에 대한 신뢰가 아주 깊었다. 일제가 투항한후 동북의 대부분 한족농민들은 국민당정부를 정통으로 생각했기때문에 공산당부대에 적극 입대하지 않았고 입대했다 하더라도 전쟁상황이 불리하면 곧잘 전향하기도 했던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 각 부대 지도자들은 조선족장병들로 조직된 부대를 경위부대로 많이 사용했었다.

독립6사 경위련도 사장 등극명의 지시에 따라 일찍부터 동북민주련군 지도부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던것이다.

(리복룡) 《…그래 장춘포위전투에 참가해서 우리를 전선에 보내달라는 같은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투할 기회를 가지게 되였는가면 독립 6사가 2개 퇀이 전선에 있는데 16퇀이 홍기가 거기 배치되고 17퇀이 건국대학 이 선에 안배했는데 두개가 맞물리는 요기가 공백이 되였어요. 16퇀이 이쪽이고 17퇀이 이쪽인데 여기 공백이 생겼습니다. 사단 지휘원들이 보니 이게 관건적인데 구멍이 생겼던것입니다. 적이 총 한방 안 쏘고 여길 나올수 있기에 사단지휘부는 7월 5일 우리 중대에다 명령해 이곳을 지키게 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독립6사 경위련 조선족장병들은 리근호련장의 지휘하에 신속히 초가워펑이라는 곳에 수비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7월 5일 저녁부터 전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였던것이다.

(리복룡) 《명령을 받고 우리는 낮에 활동 못하고 밤도와 지정된 장소로 갔습니다. 7월 5일 밤에 가니 여기 건국대학이고 가운데 수의대학인데 17퇀은 정면이고 우리쪽은 수의대학 2층건물쪽이였습니다. 국민당이 땔것이 없어 그 2층건물을 허물어 나무를 싹 빼가서 벽돌무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우리앞에 건국대학은 국민당군이 점령하고 수의대학은 우리하고 적 가운데 있었습니다. 빼앗기면 서로 포를 쏘았기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두개퇀이 린접한 곳에 도착했을 때 전투가 언제 일지 모랐습니다. 그래 밤도와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방어호를 파고 음페호를 파고 사람간에 다닐 교통호도 파야 했습니다. 세개 패가 동원되고 한개 패가 보초를 서고 두개 패가 전호를 팠는데 새벽이 되였지요.》

독립6사 경위련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 전투준비를 마친 이튿날, 새벽안개가 유난히 짙었다. 보초를 서던 전사들이 어렴풋이 행군대렬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많은 적군이 오고있었다. 국민당 60군 52사 62퇀이 백성을 앞세우고 행군대렬로 이곳을 통과하려 했던것이다. 놈들은 이곳에 수비군이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리복룡) 《…날이 밝으며 보니 안개 끼지요. 그런데 행군대렬 발걸음소리가 난단 말입니다. 보초가 막 나와 적이라고 전했습니다. 적이 나오면서 앞에다 피난민 백성을 내세웠습니다. 백성들을 앞에 세우고 자기는 뒤에서 그저 시름놓고 행군대렬로 나오는데 정찰에 의하면 이곳에 수비군사가 없다고 시름놓고 나오지요. 이래가지고 십메터 간격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였다. 1패 김병룡패장은 리근호련장의 포치에 따라 전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유리한 곳을 차지했다. 기타 전사들은 전투준비를 마친후 백성들이 지나간 다음 적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수 리상봉은 단번에 7명 적병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적군은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다.

놈들은 괴뢰만주국 수의대학에 몰려들어가 무너진 담과 벽에 의지해 사격했다. 총창을 비껴들고 추격하던 경위련 전사들은 건물앞에 멈춰섰다. 치렬한 공반전이 계속되였다. 김능권패장은 3패 전사들을 거느리고 건물을 공격하였지만 완고한 적들은 필사적으로 반항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민당군은 조선족부대에 포로되면 무조건 총살된다는 악선전을 믿고있었던것이다. 3패 전사들은 몇개 전투소조로 나뉘여 화력엄호를 받으며 건물로 들어갔다. 7반과 8반 전사들은 김능권패장의 인솔하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싸웠다.

그들은 가까이에 접근한 적은 총창으로 찌르고 총탁으로 때렸으며 먼 거리의 적은 정확한 명중사격을 안겼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3패 전사들은 10분만에 30여명 적을 소멸하고 건물을 점령했다. 그런데 건물뒤쪽으로 수많은 적군이 다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대렬을 정비한 적군은 무차별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격이 끝나면 더욱 많은 놈들이 공격해올판이였다. 하지만 아군진지는 경위련밖에 없었다.

(리복룡) 《그리고 어떻게 되였는가 하면 우리가 한개 련이 갔는데 누구 지휘를 받는가 하면 17퇀 3영의 지휘를 받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갔으니깐 전화선도 련결 안되고 통신도 안되였습니다. 전투 벌어지니깐 련장도 당황했습니다. 그러니깐 후방하고 사단지휘부와 련계할 생각도 못하고 17퇀 3영과 련결할 생각두 없구 자기 한개 중대력량으로 적의 진공을 반격하는 판이지요.

후에 안것인데 적이 한개 퇀이 우리 진지로 나왔던것입니다. 적들이 정찰해서 여기가 구멍이라고 하니 주력을 이곳에 돌렸던것입니다. 그때 방어전이라 하면 한곳이 돌파되면 다른데건 방법이 없습니다. 17퇀은 먼저 가서 또치까도 만들고 방어진지를 공고히 했는데 우린 금방 가서 음페호나 팠을 정도란 말입니다. 이때 우리가 진지를 내주면 좌우방어가 다 망가지는 판이지요. 그러니깐 우리 련장의 결심이 뭔가 하면 우리는 죽으나 사나 진지를 한발자국도 물러설수 없다는것이였습니다.》

리근호련장은 곧 3패 전사들을 수의대학부근의 유리한 곳에 매복시키고 1패와 2패 전사들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적을 막아 싸우기로 했다. 국민당군이 재차 공격해왔다. 경위련 1패와 2패 전사들이 정면에서 적을 막고 싸울 때 적의 뒤에 매복했던 3패 전사들도 일제히 사격하였다. 3패 8반의 기관총수인 김일남, 김병욱, 김철암은 수의대학건물부근에서 적진을 향해 불벼락을 안겼다. 전투에서 사수 김일남이 희생되자 김병욱과 김철암은 이곳저곳 자리를 옮기며 적에게 사격하였다.

치렬한 《7.6》전투를 겪은 김병욱로인은 이렇게 회억했다. 《적들이 수차 진공해 나왔습니다. 아까 퇀장도 죽고 그랬는데 난 어쨌는가 하니까 적후에 가서 경기반을 데리고 적을 막았소. 우리 반에 김가가 셋인데 김일남, 김병욱, 김수암이든지 삼김인데 적이 나올 때 명령을 받고 물리쳐야 되지요. 중가운데로 찔러들어가 총을 쏘니 이놈들 갈라지는 판입니다.

그래 적들이 다시 진공해오는데 우리를 잡겠다고 막 진공해 들어오길래 조금 피했지만 경기사수는 피하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희생되였습니다. 난 부사수인데 거기서 시체를 건사할 시간도 없었소. 적은 코앞에 가득한데 경기를 쐈지 뭐. 쏘니까 막 쓰러지는겁니다. 얼마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한창 쏘니까 마지막에 철알이 나가야 어쩌지, 앞에 떨어지는것이였습니다.

총신이 달아서 탄알이 멀리 못 갔던것입니다. ‘어떡하면 좋나? 에라 어떻게 오줌밖에 더 있나? 물은 없는데’ 그래 오줌을 누니까 찌륵찌륵 타는데 겨우 총신을 식혔지무. 그래 이게 거짓부리 아닙니다. 그러니 탄알이 제대로 멀리 묘준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자리를 이동하고 이동하면서  전진해오는 적을 마구 쏘았습니다. 그래 싸워서 전투  끝난 다음에 3등공을 기입해주더구만.》

독립 6사 김병욱로인.

아무리 쓰러뜨려도 적은 계속 무리지어 공격해오고있었다. 용감히 싸우던 우리 경위련의 전사들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상황은 아주 위급하였다.

리근호련장은 망원경으로 적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국면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이때 그는 적의 지휘부를 발견하였다. 리근호련장은 곧 4반의 척탄통수 김권묵을 불러오고 정확한 사격으로 적의 지휘부를 까부실것을 명령했다.

김권묵은 적의 수류탄파편에 맞아 무명지가 뭉청 떨어져나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척탄통을 들고 목표를 명중하였다. 그는 평소에 훈련했던대로 정확히 목표를 조준한후 방아쇠를 당겨 련속 세발을 발사하였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적지휘부가 포연속에 잠겼다.

경위련의 이번 적지휘부 포격에 국민당군 62퇀 퇀장 팽양(彭阳)을 비롯해 여러명 군관이 숨졌다. 지휘체계를 잃은 국민당군은 더 지탱하지 못하고 급급히 퇴각해버렸다. 그리하여 처음 정규적인 전투에 참가한 경위련은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아군의 승리를 보장했던것이다.

독립 6사  16퇀과 17퇀의 조선족장병들은 두려움 없이 싸워 7월 6일, 장춘시남부의 포위권을 돌파하려던 국민당군의 가장 큰 규모의 돌파전을 승리적으로 저지시켰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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