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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1)— 금주로 진격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2 09:29:45 ] 클릭: [ ]

1948년 7월 20일, 동북인민해방군은 장춘에서 국민당군의 대규모적인 포위돌파를 타파한후 장춘에 대한 지속적인 포위를 실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작전방침을 확정하였다.

동북국 상무위원들인 림표, 라영환, 류아루 등은 막강한 수비력을 가진 장춘을 억지로 공격하지 않고 중앙군사위원회의 뜻에 따라 공격의 예봉을 금주쪽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동북국의 이와 같은 결정을 중앙군사위원회에 회보하고 8월중순부터 야전군 11종대, 9종대, 4종대를 동원해 금주부근의 의현, 금서, 흥성, 수중, 산해관을 공점할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는 연안을 떠나 황하를 건너 이미 하북성 서백파촌에 자리를 정하고있었다.서백파촌에서 전국의 해방전쟁을 지휘하고있던 모택동은 동북정세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고있었다. 그는 뛰여난 담략과 지혜로, 이미 동북에서의 국공량당 결전의 시각이 닥쳐옴을 느끼고있었다.

동북의 국민당군이 관내로 들어와 하북의 부작의집단과 회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언녕부터 동북인민해방군의 주요한 작전방향은 금주쪽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림표는 눈앞의 장춘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동북국의 결의로 확정했기때문에 모택동도 할수 없이 먼저 장춘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였다.

1947년 5월에 림표는 장춘을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큰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장춘의 수비군은 수시로 포위돌파를 시도하였기에 단시일내에 장춘을 해방하기는 어려운 일로 되여버렸다. 그리하여 드디어 림표와 동북국지도부에서는 장춘을 장기적으로 포위하고 주력을 금주쪽으로 돌릴 결심을 내리게 되였던것이다.

동북국의 7월 20일 전문을 받은 모택동은 크게 위안을 느끼면서 7월 22일 적후에 깊숙이 들어가 금주를 공점하면 동북의 국민당군은 《독안에 든 쥐》신세로 되고말것이며 그렇게 되면 전반 동북해방은 쉽게 이루어질것이라는 답전을 보냈다.

한편 동북에서의 작전방략에 관련해 국민당 내부에서도 치렬한 론전이 진행되고있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심양을 포기하고 금주일선을 확보함으로써 동북의 주력을 금주로부터 관내로 철수시킬것을 건의하였다. 동북의 수십만 국민당정예부대는 장개석의 중요한 밑천이였다.

그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동북의 국민당군을 관내로 철수시킬 방안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동북국민당군 총사령인 위립황은 이를 단호히 반대해나섰다. 그는 동북의 국민당군주력이 심양을 떠나 금주로 이동하려면 료하, 대릉하, 요양하를 비롯한 세개 큰 강을 건너야 하기때문에 이 과정에 수시로 동북인민해방군 주력의 각개 포위, 섬멸타격을 받을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동북국민당군의 생존의 길은 심양을 고수하는길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위립황이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자 장개석은 수차 고위관원을 파견해 위립황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동북의 국민당군장교들의 견해는 모두 위립황과 일치하였기때문에 장개석도 할수없이 위립황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개석은 다시 심양의 주력을 금주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위립황을 남경에 불러들여 직접 설득하려 했다.

장개석은 심양과 장춘의 교통선이 이미 차단되여 보급품은 모두 비행기로 수송해야 하는데 지금의 수송력으로는 이를 도저히 감당할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동북의 국민당군주력을 관내로 철수해야 한다고 했다. 위립황은 심양의 부대는 정돈과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전투력을 형성할수 없기때문에 무사히 금주까지 이동할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시간을 준다면 자기의 개인관계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낼것이라고했다. 물론 장개석도 미국의 도움으로 동북에서의 군력을 계속 보존하기를 바라고있었다. 때문에 위립황이 미국의 도움을 받을수 있다고 하자 곧바로 한가닥의 희망을 본것처럼 련신 위립황의 건의에 동의하였다. 결국 위립황을 설득하려던 장개석이 위립황에게 설득된 꼴이 되고말았다.

위립황이 동북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병력을 재정비하고있을 때 장개석은 재차 자기의 의견을 뒤집었다. 그는 그래도 심양과 금주사이의 교통선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심양의 주력을 금주로 철수시킬것을 명령했다. 거듭되는 언쟁에 피곤해진 위립황은 변덕이 많은 장개석의 명령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수하 장교들을 설득해 장개석의 명령에 따르지 말기로 하였다. 그렇게 되자 장개석도 화가 나서 위립황 수하의 장교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자기의 의견을 듣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위립황 수하의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범한걸, 주력병퇀 사령인 료요상을 비롯해 모두 각기 자기의 생각만을 가지게 되였다. 그야말로 흩어진 모래알로 되여버렸던것이다.

오늘까지 남은 금주의 성곽 일부.

금주 옛 성벽.

1948년 8월에 이르러 동북국에서는 동북인민해방군의 모든 기동부대를 동원해 막강한 전투부대인 동북야전군을 편성하였다. 림표가 동북야전군 사령을 맡고 직접 부대를 거느리고 위대한 료심전역을 진행하게 되였다.

9월 7일, 중앙군사위원회와 모택동은 림표와 라영환, 류아루에게 전문을 보내, 전례없던 대규모의 작전을 진행할 각오를 가지고 주력부대를 동원해 신속히 금주를 포위하고 장춘과 심양으로부터 나오는 적을 유인 섬멸할것을 지시하였다. 동북야전군 총부에서는 중앙의 지시대로 곧바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명령에 따라 동북야전군 각 종대는 신속히 또 비밀리에 금주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12종대와 6개 독립사로 계속 장춘을 포위하고있었다.

조선족장병이 많은 동북야전군 제3종대는 유일하게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주력부대였다. 금주전역에 참가하였던 조선족로전사들이 회억한데 의하면 이들은 1948년 9월 12일에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동북야전군 3종대의 7사, 8사, 9사는 각기 서안과 동풍에 주둔하면서 반년간 정돈과 훈련을 진행하고있었던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는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기차를 탄다고 했지만 기차역으로 간것이 아니라 부근의 숲속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무개렬차가 도착하였는데 우리는 널판자를 놓고 모두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상급에서는 비밀을 엄수하고 떠들지 말며 노래도 불러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9월중순이라 밤이 되니 날씨는 자못 추웠습니다. 우리는 서로 등을 대고 빼곡이 기차바구니에 앉아 졸음을 청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전투가 우리를 기다리는지? 사전에 우리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냥 훈련할 때 장춘을 해방한다고 했으니 장춘으로 간다고 짐작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렬차는 더욱 급속하게 달리는듯했습니다.

어렴풋히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검은 층집들이 지나쳤고 또 사평이라는 기차역 간판도 보였습니다. 아~ 장춘으로 가는것이 맞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졸음에 빠졌습니다. 얼마동안 달렸는지…기차가 멈춰서서 석탄과 물을 더 싣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문틈으로 내다보니 정차한 곳은 통료였습니다. ‘어참, 통료라니?’ 당시 우리 주변의 동무들이 모두 통료라는곳을 모르고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문틈으로 내다보니 농가들이 뜨문뜨문 보였고 또 멀리 락타가 있는것이 보였습니다. 락타를 보자 우리는 아마 내몽골부근을 지나고있다는것을 짐작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대로 렬차는 이틀밤 더 달려 신구라는 곧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간만에 허리를 시원히 펴고 길게 기지개를 하면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팔다리가 저리고 쑤셨지만 우리는 신속히 대렬을 정비하고 다시 행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주전역에 참가하였던 3종대의 조선족로전사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군 하였다.  신구에 도착한 동북야전군 3종대는 도보로 부신, 해주를 거쳐 행군하였다. 토지개혁을 거쳐 해방받은 농촌의 농민들은 열광적으로 뛰쳐나와 부대를 환영한것이 아니라 아주 질서있게 조직적으로 음식을 건네주거나 길을 안내해주었다. 모두가 비밀을 엄수해야 했기때문이였다.

3종대 각 부대는 이틀간 강행군을 거쳐 청하문진을 뚫고 대릉하를 건넜다. 대릉하의 수심은 허리나 가슴까지 달했다. 하지만 전사들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를 극복하면서 무기와 짐을 머리에 이고 그냥 물을 건넜다.  대릉하를 건넌후 동북야전군 제3종대는 4종대와 9종대를 교체해 금주의 문호로 불리우는 의현을 포위하였다.

금주의 중국인민해방군 40집단군 사령부(원 동북민주련군 3종대).

금주에서 만년을 보내는 조선족 군간부들(원 3종대 전사).

한편 개원에 주둔하고있던 동북야전군 제10종대도 작전명령을 받았다. 동북야전군 총부는 9월 24일 하달한 명령에 의하면 심양의 적이 금주를 지원하러 나올 기미가 보이기때문에 10종대는 곧바로 출발해 통료에서 야전군 제1종대와 회합하며 공동으로 금주를 지원하러 출동하는 심양의 국민당군을 저지해야 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10종대 수만 장병들은 량흥초사령원의 인솔하에 반년 남짓이 머물러있던 개원, 창도 지역을 떠났다. 그들은 낮에는 휴식하고 밤에는 강행군을 하면서 6일후 창무지역에 도착해 1종대 3사와 회합했다. 총부의 명령에 따라 1종대 3사와 료남독립 1사는 10종대의 지휘를 받게 되였다. 이들은 창도부근에서 심양에서 출동하는 국민당정예군을 막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희생된 전우들을 기리는 김응삼(10종대 30사), 리규택(10종대 29사).

1948년 9월 12일, 력사는 이날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동북인민의 운명을 결정짓는 료심전역이 바로 이날부터 시작되였던것이다. 동북에서의 대결전은 전반 중국의 운명과 직결된 세차의 대결전의 서막이기도 하다. 국공량당은 이로부터 생사를 결정짓는 위대한 대결전에 들어갔다. 제3종대와 제10종대를 비롯해 수많은 조선족 병들을 포함한 동북야전군 각 부대는 신속히 금주를 포위하고 적의 지원군을 격파하는 간고하고도 위대한 과업을 짊어지고 새로운 전투를 기다리고있었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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