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영원한 기념비(55)—장춘해방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5 11:48:02 ] 클릭: [ ]

동북야전군 주력부대가 료서지역에 집결해 대규모의 금주해방전투를 진행하고있을 때 소경광이 거느린 동북야전군 제1병퇀 각 부대는 계속 장춘의 10만 국민당군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있었다.

1948년 6월 25일부터 중국공산당 동북국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작전방향을 료서로 돌리고 장춘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포위전술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소경광이 거느린 제1병퇀의 12종대와 독립 6사, 독립 7사, 독립 8사, 독립 9사, 독립 10사, 독립 11사 등 10만 장병들은 장춘에 대한 군사적 포위와 경제적봉쇄를 실시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정치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6월부터 9월말에 이르기까지 만 3000여명 국민당장병들이 무기를 놓고 공산당쪽으로 넘어왔다.

료심전역이 시작되자 동북야전군총부는 10월 4일에 장춘을 포위하고있는 야전군 12종대를 남하시키고 기타 독립사단으로 12종대의 포위진지를 지키게 했다. 12종대 수만 장병들이 물밀듯이 남하할 때 심양부근의 적을 견제하며 싸우던 독립4사는 급급히 장춘으로 북진했다. 장춘의 국민당군이 12종대가 남하한 기회를 빌어 두차나 포위돌파를 시도했지만 장춘을 포위한 각 독립사들이 잘 싸웠기에 3일만에 포위돌파시도는 모두 실패하고말았다.

조선족장병들로 구성된 독립4사는 국민당 53군과 대치하고있던 철령전선을 떠나 장춘에 도착해 공주령방어선을 접수하였다. 명령에 따라 독립4사 2퇀과 3퇀은 공주령일선에 포진하고 1퇀은 장춘의 문호로 불리우는 범가툰에 주둔하였다.

독립4사까지 장춘포위전에 가담함에 따라 장춘을 포위한 10만 장병중 조선족장병수는 무려 3만명에 달했다. 독립4사와 독립11사는 거의 백퍼센트가 조선족장병으로 편성된 조선족사단이였고 독립6사도 근 3분의 2가 조선족장병이였다. 이들은 형제민족 장병들과 함께 장춘을 포위하고 정치공세를 펼쳤다.

장춘해방전투에 참가한 원 독립6사의 로전사 리복룡(좌), 김병욱(우).

독립11사에서는 재능있는 전사들을 선정해 대적선전을 책임지게 하였다.그들은 선전삐라를 써서 연에 매여 띄우거나 선전삐라를 가득 실은 빈 배를 이통하에 띄워 포위된 장춘시내에 보냈다. 그리고 선전삐라와 함께 통행증을 만들어 대량 시내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선전삐라를 보고 통행증을 쥔 국민당장병들은 몰래 아군의 군사봉쇄선을 넘어 투항해왔다. 그러나 국민당의 악선전을 믿는 국민당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몇사람을 보내 모두 무사하면 다시 대량 건너오기도 하였다.

남호부근에서 경계를 맡던 독립11사 1퇀 보초병들은 어느날 저녁 국민당 패장 두명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보초병에게 신호를 보낸 후 다음날 저녁에 기타 병사들을 이끌고 투항해올것이니 총을 쏘지 말라고 했다. 약속한대로 이튿날 저녁에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 90여명 국민당 병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각종 무기를 아군의 보초병앞에 가져다놓고 모두 투항해 넘어왔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점점 많아졌고 이전에 병사나 군관 한두명씩 투항하던데로부터 한개 반, 한개 패 심지어 한개 련씩 투항해왔다.

그만큼 근 반년간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던 장춘의 국민당군은 10월에 이르러 완전히 전의를 잃어가고있었던것이다. 불완정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독립11사는 맹가툰부근에서 무려 만 8천여명 적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다. 당시 장춘을 포위하고있던 여러 조선족부대에는 모두 자체로 만든 조선문신문이 있었다. 장춘포위전때 독립11사 정치부에서 만든 《건군보》에는 종군기자 장만련이 쓴 《장춘아 잠간만 기다려라》는 시가 실려있었다.

리홍광지대에 참가했다가 장춘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했던 로간부 변철호선생이 제공한 자료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 전문을 알수 있었다.

장춘아 잠간만 기다려라

장만련

네가 언제 태여났는지 나는 모른다.

누가 너를 장춘이라 이름했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나라 지도를 펼치면

동경 125도 18분과

북위 43도 25분의 교차점에

진주처럼 반짝이는 너의 모습을 나는 본다.

네가 태여나서 걸어온 그 길에

어떠한 력사가 기록되였는지 나는 모른다.

봄을 사랑하는 네 가슴속에

어떠한 희비애락 담겼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로 어제날

일제침략의 시퍼런 칼날이

부드러운 네 가슴에 꽂혔던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또 오늘날

장개석 비도들에게 목이 졸리여

신음하고있는 네 목소리를 나는 듣는다.

아 장춘아

이 나라 지도우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한알의 진주야

인제 잠간만 참아라

조국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싸움

인제 결전의 명령 내렸거니

곧 네 목에 얽매인 쇠사슬을 벗기여주마

상처받은 네 가슴에 해방의 꽃다발을 안기여주마

그때 우리는 함께 얼싸안고

승리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자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자

독립11사와 독립4사 정치부가 꾸린 조선문신문이 있었을뿐만아니라 독립6사 조선족부대에도 조선문신문이 있었다.

독립6사 련의 문서 리복룡로인

독립 6사 련의 문서였던 리복룡로인은 신문을 꾸려 선전사업을 하던 경위를 이렇게 소개했다.

(리복룡)《한개 련에서 신문을 꾸린다는건 …46년도에 후방부대에서 대생산운동을 했습니다. 우리가 훈춘에 있었는데 한개 중대가 14곳에 분산되였습니다. 훈춘이 후방이니 보초 서는데 많았습니다. 탄약고, 탄약고에 보초를 서야 했습니다. 산굴을 들어가고 분산되였습니다. 이거 련장지도원이 어떻게 지휘하는가? 그래 신문을 꾸리자고 했습니다. 그때 후방이니깐 등사신문을 꾸렸습니다. 그때 련의 문서니까. 깡판글씨를 써서 신문을 꾸렸는데……

그래서 전선을 나오면서 이걸 했습니다. 경험이 있으니까. 문서니까 내가 주필이자 편집이자 했습니다.각 반에 통신원이 있습니다. 중요한게 도착하면 통신원에게는 먼저 원고를 써라 했습니다. 부대가 가면 통신원의 원고를 받아가지고 신문을 만듭니다. 아, 이튿날 련대가 출발할 때는 신문이 전사들 손에 들어갑니다. 등사를 못하고 묵지를 가지고 복사했습니다. 종이를 준비할걸 가지고 신문이름은 전진이였습니다. 모두 한 200기 되였을겁니다.

정주에서 우리 부대가 해체되나 다름없는데 조선으로 가니깐 그때 내가 문예간사로서 제발되엿지만 역시 신문을 꾸렸습니다. 그러니 신문을 메고 조동했습니다. 조선에 나갔는데 못 가니 후방에 두고 가니 모두 사라졌습니다. 신문이 전투속보도 나갔습니다. 7.6전투에서 속보를 냈습니다. 어느패는 어떻게 해서 적을 얼마 죽였고 누구는 어떻게 싸웠구...신속히 전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 장춘에 있을 때 사단정위 축세봉이가 우리 련에 내려와 지도원의 회보를 듣고 련에서 신문 꾸리는건 내 알건대는 너네밖에 없었다. 잘 꾸리라고 고무해주었어요. 한개 중대가 신문 꾸린건 아마 해방군에서도 우리밖에 없을겁니다. 무슨 한두기가 아니고 몇백기 꾸리고 시종 견지했지요. 행군할 때는 속보를 해가지고 전사들 등짐에 붙입니다. 속보를 부치면 멘 사람은 뒤에 가 선전하느라 고생입니다 …》

부대선전사업에 있어서 신문은 큰 역할을 발휘하였다. 전사들은 신문을 통해 당면 정치상황과 군사상황을 알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각 전투에서 싸운 영웅전사들의 사적을 알게 되였고 또 전투영웅들을 따라배울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그리고 장춘포위전시기에는 대적선전경험을 교류하고 더욱 좋은 방법을 구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반년 남짓한 정치공세와 선전공작을 통해 군관으로부터 일반병사에 이르기까지 장춘의 적아 쌍방 모두가 장춘이 곧 해방될것이라고 믿고있었다. 1948년 10월 15일, 동북야전군이 금주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춘의 국민당수비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비군의 전의는 언녕 상실했지만 이때에 와서는 마지막 한가닥의 희망까지 상실하고말았던것이다.

다년간 국민당내부에서 온갖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왔던 국민당 60군은 9월부터 이미 봉기할 계획을 짜고있었다. 국민당 장춘수비군 제1병퇀 부사령이며 60군 군장인 증택생은 먼저 믿음직한 부하들을 모아놓고 공산당에 의거할 뜻을 밝힌 후 비밀리에 해방군과 련락을 취했다. 10월 17일, 증택생은 해방군과 약속한 시간에 60군 장병들을 거느리고 의거했으며 60군 수비진을 동북야전군 각 독립사에 넘겨주고 장춘시를 빠져나왔다.

60군이 의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국민당 신7군 내부에서도 공산당쪽에 넘어오려는 군관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0월 19일, 장춘의 신7군도 군장 리홍의 인솔하에 모두 무기를 놓고 투항하였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이며 장춘수비를 책임진 정동국도 할수 없이 부하들에게 총을 놓으라고 명령하였다.

반년 남짓이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던 장춘은 드디여 평화적으로 해방되였다.

장춘해방의 나팔을 울리는 전사들(자료사진).

장춘이 해방된 후 조선족장병으로 편성된 독립11사는 60군의 진지를 접수하고 다시 지금의 해방대로를 거쳐 장춘시중심부에 들어가 신7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다. 그때로부터 독립11사는 1949년 7월까지 줄곧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고 장춘시의 정상적인 생활과 사업질서를 보호하였다.

한편 료심전역을 앞두고 개원을 떠난 동북야전군 10종대는 6일간의 간고한 행군을 거쳐 신민, 흑산, 창무부근에 도착해 1종대 3사와 회합하였다. 10종대 량흥초 사령원은 1종대 3사에게 흑산과 대호산, 구방자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일부러 부대의 행적을 적에게 알리게 하였다.

10월 11일, 장개석의 엄명을 받은 료요상은 할수없이 서진병퇀을 조직해 금주를 지원한다고 심양을 빠져나왔다. 10종대 장병들은 료요상의 부대를 멀리 견제하면서 한걸음한걸음씩 유인해왔다. 놈들은 흑산, 대호산 일대에 동북야전군 1종대가 활동한다는것을 판단하고 곧바로 흑산방향으로 공격해왔다.

이제 동북에 남은 국민당군의 마지막 최정예부대를 소멸할 시기가 닥쳐오고있었던것이다. 10종대 장병들은 모두가 드높은 열의를 안고 새로운 전투를 기다리고있었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