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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9)—호가워펑 《참수행동》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3-03 19:11:56 ] 클릭: [ ]

흑산-대호산에서 동북인민해방군 제10종대가 료요상병퇀 10만 군사를 막고 치렬한 방어전을 치르고있을 때 동북인민해방군 본부에서는 료서지역에서 료요상병퇀을 전멸시킬 원대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계획에 따라 동북인민해방군 4종대와 11종대는 몇개 독립사와 함께 계속 탑산지역에서 북상하려는 국민당군을 견제하고 12종대는 장춘으로부터 신속히 철령지역에 이동함으로써 심양의 국민당군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금주를 해방한 동북인민해방군 주력인 1종대와 3종대, 8종대, 6종대가 제1진으로 신속히 흑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뒤를 따라 2종대, 7종대, 9종대, 포병종대가 제2진으로 이동하였다. 상급에서는 주력부대의 이동을 비밀리에 할것을 지시하였다.

명령을 접수한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는 신속히 행동했다. 흑산-대호산에서 다섯배에 달하는 동북국민당군 최후의 정예부대와 고전하고있는 10종대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반드시 더 빨리 흑산-대호산에 도착해야 했던것이다.

1948년 10월 21일 황혼무렵에 제1진 각 종대가 구방자, 대호산, 흑산을 향해 달렸고 22일에는 제2진 각 종대가 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목적지로 달리고 또 달렸다. 금주에서 출발한 동북인민해방군 제3종대는 뼈를 에이는듯이 찬 대릉하를 건너 10월 24일에 벌써 흑산-대호산 지역에 도착하였다.

가장 먼저 전선에 도착한 3종대 각 부대는 뒤에 수십만 대군이 따른다는것을 알기때문에 추호의 주저도 없이 그냥 앞으로, 앞으로만 달렸고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만 달려갔다. 3종대의 선두에 선 9사는 10종대의 방어진을 넘어 국민당군이 비교적 집중된 곳으로 달려갔다. 9사를 뒤따라 온 8사는 9사와 함께 량쪽으로 국민당 71군을 협공하였다. 적아쌍방이 뒤죽박죽이 되여 서로 어울려 싸우게 되자 각 부대도 서로 련락이 두절되였다.

3종대 한선초사령원은 지리적인 특점에 따라 부대가 모두 흩어져 싸우게 된 상황에 비추어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총소리는 곧 명령이다. 적이 있는 곳이면 바로 우리의 공격목표다! 돌격!》

명령을 받은 3종대 각 부대는 과감히 적진을 뚫고 들어갔으며 적을 분할하고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료요상병퇀 사령부에서는 25일 저녁에 금주에 있던 공산당주력부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호가워펑에 설치한 사령부에서 료요상은 극구 병력을 집중하여 동남방향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도저히 뜻을 이룰수 없었다. 왜냐하면 10종대를 공격하다 많은 손실을 본 신6군은 계속 101고지를 점령하려 애를 쓰고있었으며 신1군과 71군은 이미 금주에서 달려온 공산당주력부대에 의해 분할, 포위된 상황이였던것이다.

한선초사령원의 명령을 받은 3종대 7사와 8사, 9사는 각기 자기의 목표를 향해 공격했다. 26일 아침, 선두를 달리던 3종대 9사 25퇀은 신립툰방향으로 대거 철수하는 국민당 신3군 54사를 만났다. 25퇀은 과감히 공격하여 적을 여러 토막으로 갈라놓았다. 하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았기때문에 공격부대는 신속히 렬세에 처하고말았다. 3영 8련 1패 전사들은 마을에 의지해 적의 공격을 7차나 물리치면서 대부분 희생되고말았다.

1영과 2영 전사들이 달려와 적을 물리쳤을 때 1패에는 전사 두명만이 남았다. 한편 3종대 8사 22퇀과 23퇀도 9사의 좌편에서 적 87사 260퇀을 공격하고있었다. 그들은 3시간의 치렬한 접전을 거쳐 적을 격퇴하였다. 3종대 7사는 우익으로 공격했다. 선두에 선 7사 21퇀 3영은 부퇀장 서예의 인솔하에 밤도와 적진으로 밀고나갔다.

어둠속에서 전진하던 3영 장병들은 호가워펑쪽에 국민당군이 적지 않게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그곳 국민당군에는 여러대의 승용차가 있었고 권총을 찬 군관들이 많았으며 마을에 전화선도 유난히 많다고 했다. 서예 부퇀장은 정찰보고를 접수한후 호가워펑에 적의 지휘부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주력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적지휘부를 소멸하기로 작심했다.

서예부퇀장의 명령에 따라 8련을 선봉으로 한 3영의 모든 장병들이 신속히 호가워펑으로 달려갔다. 호가워펑에 도착한 이들은 도하지점을 먼저 차지한후 곧바로 마을로 쳐들어갔다. 3영은 8련을 선두에 세우고 7련, 9련, 기관총련, 박격포련까지 다 동원하여 호가워펑을 공격하였다.

선두에 선 8련 2패는 조선족패장 임병전이 거느린 부대였다. 이들은 임병전패장의 인솔하에 개활지를 지나 호가워펑 마을 백사하 기슭에서 적을 가득 실은 자동차를 만났다. 전사들은 신속히 자동차를 포위하고 차에 탑승했던 많은 군관들을 포로하였다. 그들은 포로들을 한 농가에 가두어놓은 다음 계속 강기슭을 따라 적의 류탄포진지로 달려갔다.

한창 포사격을 준비하던 적 포병들은 급작스레 나타난 2패 전사들 앞에 모두 무릎을 꿇고 투항하였다. 하지만 사면팔방으로 수많은 적군이 몰려왔기때문에 2패 수십명 장병들은 적의 포위속에서 싸울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국민당군도 아군의 상황을 다소 판단하고 몇개 진지를 사수하면서 3영 후속부대의 전진을 막아나섰다. 적의 막강한 화력에 3영 후속부대는 개활지에 엎드려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때 임병전패장이 거느린 8련 2패에서 통신원을 파견해왔다. 통신원의 보고에 의하면 영웅적인 2패 전사들은 나루터를 확보하고 적 부군장이하 100여명 군관을 생포했을뿐만 아니라 적 포병영을 습격해 류탄포 18문, 자동차 백대를 로획했다. 하지만 적의 수가 하도 많았기에 2패 많은 전사들이 희생되였다는것이다.

서예부퇀장은 8련 2패 전사들의 과감하고 신속한 작전과 영웅적인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도 무겁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부근의 유리한 지세는 모두 적이 차지하고있기때문에 후속부대는 도저히 나루터쪽으로 나갈수 없었던것이다. 서예 부퇀장은 강건너에서 자지러지게 울리는 총소리와 함성소리 그리고 아군전사들이 희생되면서 웨치는 《만세!》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얼마나 용감한 전사들인가?!》

이때 7사 포병련이 당도하였다. 서예부퇀장은 곧바로 포병들을 지휘해 적의 화점을 하나하나 까부시고 전사들과 함께 나루터로 달려갔다. 뒤따라 7사 19퇀 장병들도 몰려왔다. 아군장병들은 신속히 강을 건너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완고하게 저항하는 적을 소멸하고 500여명을 생포하였으며 호가워펑마을에 설치한 료요상병퇀 최고지휘부인 《서진병퇀》사령부와 신6군 군부를 파괴하였다.

수십만 대군이 엉켜 싸웠던 드넓은 료서.

료요상변퇀 사령부가 있었던 흑산현 호가진정부.

이름없는 언덕에 모셔진 무명렬사들 무덤(임병진패 장병들 묘소로 추정).

백사하나루가 있었던 곳.

호가교 전적지.

서예 부퇀장이 전장을 수습하면서 백사하기슭 소나무숲으로 달려갔을 때 이리저리 쓰러진 2패 전사들을 발견하였다.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렬사들의 유체곁에는 그들이 로획한 대포와 자동차가 그대로 있었다. 서예부퇀장은 눈물을 머금고 전사들과 함께 희생된 2패 렬사들의 유체를 수렴해 소나무숲에 안장하였다.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겨우 호가워펑 병퇀사령부에서 빠져나온 료요상은 신1군 30사 사부에 림시지휘부를 설치하였다. 급해난 그는 비밀통화를 할수 없는 상황에서 행동명령을 각 부대에 하달했던것이다. 수신기를 통해 묵묵히 료요상의 명령을 듣고있던 아군사령부에서는 적의 위치와 움직임을 손금 보듯 알수 있게 되였다.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적이 있는 곳으로만 달려가던 아군 수십만 장병들은 드디어 적의 목표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더욱 드센 공격을 발동해 료서지역에서 료요상병퇀을 전멸시키는 전투를 개시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족 장병들이 많았던 동북인민해방군 3종대의 자료를 수집하던중 우연히 조선족패장 임병전이 거느린 7사 21퇀 3영 8련 2패가 호가워펑전투에서 싸운 사실을 알게 되였다. 단서를 따라 답사팀은 2008년 11월에 료녕성 금주시 흑산현 호가워펑에 찾아갔다. 호가워펑은 지금 진으로 확대되여 흑산현 호가진으로 되여있었다.

현지인들은, 료요상 서진병퇀 사령부가 있었던 건물은 다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의 2층 건물은 새로 지은 흑산현 호가진 인민정부 건물이라고 했다. 호가진부근 산언덕의 작은 소나무숲에는 또 50여개 무명렬사무덤이 줄지어 있었는데 바로 3영 8련 2패 전사들의 무덤이라고하였다.

40군 군부의 군사연구원들과 로전사들의 회억을 통해 적 서진병퇀사령부 위치와 렬사들의 무덤을 증명할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도 조선족패장인 임병전의 이름만 알고있을뿐 기타 렬사들의 이름은 모르고있다. 호가진을 벗어나면 일찍 2패 전사들이 나루터를 차지하고 많은 적을 포로하였던 백사하를 볼수 있다. 지금은 강물이 많이 줄어 나룻배라고는 찾아볼수 없었고 새로 지은 《호가교》라는 다리 하나만 있을뿐이였다.

3종대 7사 21퇀 3영의 전사들은 바로 이곳에서 수만 병력의 적진에 뛰여들어 적의 최고지휘부를 까부셨고 조선족패장 임병전과 전 패 전사들이 영용히 싸우다가 전부 희생되였던것이다.

적아 수십만 대군이 한데 얽혀 싸운 흑산-대호산전역에서 호가워펑싸움은 너무나도 작은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전쟁사에 기록도 남기지 못했던 이 평범한 한차례 전투가 료요상병퇀의 패망의 운명을 크게 가속화시켜놓았다는 사실은 후에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점차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국내외 군사전문가들은 3종대의 이번 《참수행동》을 적극 평가하면서 이 전투는 료요상병퇀의 파멸을 가속화시키고 중국혁명승리의 운명을 가속화시켰다고 적극 평가하고있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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