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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1)—흑산렬사릉원과 료심전역기념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3-05 10:48:27 ] 클릭: [ ]

1948년 10월 26일 날이 어두울무렵, 흑산-대호산 전초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동북야전군 10종대 각 사단은 치렬한 접전을 거쳐 당면의 적을 물리쳤다. 28사 83퇀 2영은 두려움없이 용감히 싸운 기관총수 원성희의 맹활약에 힘입어 207사 사단부를 점령하였으며 83퇀 3영도 잘 싸워 고가워펑의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고가워펑을 점령한 후 지칠대로 지친 전사들은 저녁밥을 먹자마자 모두 그 자리에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며칠간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 한번 자지 못했던 그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시름놓고 잘수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의연히 포성과 함성소리가 멎지 않고있었던것이다.

한시간쯤 지나서 곧 출발하라는 상급의 명령이 떨어졌다. 83퇀 8련 전사들은 련장대리를 맡은 김교진지도원을 따라 밤도와 급행군을 하였다. 고가워펑에서 38리 떨어진 황가워펑에 주둔한 적 14사 사단부와 예비대를 소멸하기 위해서였다. 27일 오전 28사 주력부대가 황가워펑부근에 당도했다. 28사 각 퇀은 포화를 무릅쓰고 일제히 공격했으며 83퇀 8련 장병들이 가장 먼저 마을어구에 이르렀다. 적의 화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정면으로부터 굵은 불줄기가 길게 뿜어나오면서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8련 김교진지도원은 2패 전사들을 정면에 남겨 계속 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기는 3패 전사들을 거느리고 우회하여 마을뒤로 갔다. 3패 전사들은 마을의 가장 큰 지주집 뒤뜰에 다가가 담너머로 수류탄을 던진 후 일제히 담을 넘어 들어갔다. 울안의 적은 대부분 생포되였다.

김교진지도원은 계속 전사들을 거느리고 마을 중심부로 달려가던 도중 적의 수류탄에 맞아 쓰러졌다. 통신반장 리두섭은 급급히 지도원의 이름을 부르며 피못에 잠긴 김교진을 업어냈다. 이때 취사원 최일송과 박영수가 달려와 담가로 김교진지도원을 퇀부로 호송해갔다. 허리와 다리, 발목에 40여개 크고작은 파편을 맞은 김교진지도원은 더는 전투를 할수 없게 되여 제대하고말았다. 28사 정치부에서는 그에게 대공 한차를 기입해주었다.

황가워펑전투에서 8련은 83퇀 기타 부대와 함께 846명의 적을 소멸하고 성공적으로 적 14퇀 사단부를 점령하였다. 8련의 김재범, 박봉관, 박창근 전투소조는 20여개 적의 화점을 까부시고 150여명 적을 생포하기도하였다. 하루간의 긴장하고도 치렬한 추격전을 거쳐 10종대는 1만 6300여명의 적을 소멸하고 신 6군 군장 리도를 생포하였으며 대량의 무기장비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하지만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강철로 다져진 8련만 보아도 며칠간의 간고한 전투를 통해 많은 손실을 보았다. 황가워펑전투가 끝나자 8련에는 계속 부대를 따라 작전할수 있는 전사들이 겨우 13명뿐이였다.

마지막 반격전에서 중상을 입은 8련 지도원 김교진

10종대가 흑산현에서 적의 진지를 돌파하고있을 때 동북야전군 각 부대는 사면팔방으로 료요상병퇀에게 덮쳤다. 선풍부대로 소문 높았던 제3종대는 료요상병퇀 최고지휘부를 타격했을뿐만아니라 전반 료요상병퇀을 여러 토막으로 끊어 사분오렬로 만들어놓았다. 지휘체계를 잃은 놈들은 머리없는 파리신세가 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동북야전군 1종대, 5종대, 6종대, 8종대가 적을 하나하나 포위하고 소멸해버렸다. 기세충천한 전사들은 두려움없이 돌진하였으며 홀몸으로도 감히 수십명 적에게 달려들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국민당장병들은 다투어 총을 바치고 손을 들었다. 심지어 아군전사들은 포로가 너무 많아 고생이였다.

료서대섬멸전에 참가하였던 서란의 고광동로인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당시 그는 1종대 3사 7퇀 3영 9련 2패 5련의 부반장이였다.

《그다음 료심전역을 치렀습니다. 심양을 치고난 다음 흑산, 금주…저는 거기서 대공 세웠습니다. 하루 저녁에 적 85명을 생포했지 않았습니까? 그냥 잡구 갖다놓고 또 적진에 들어가구 그랬습니다. 그렇게 85명 잡아 영웅이 되였지요. 격살한건 잘 모르겠지만 포로 몇명이면 대체로 얼마쯤은 격살했을것이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기준에 따라 계산하면 아마 150명 격살한것으로 통계됐습니다. 실제는 그렇게 많이 격살한건 아닙니다. 그런데 85명 생포하는게 참 힘들었습니다. 적진에 한번 들어가면 여기저기 기관총, 박격포들이 널려있는데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저 누구한테 어떻게 투항할것인가만을 생각하는듯했습니다. 그래 우리가 다가가면 그냥 손을 들고 시키는대로 따라오군 했지요. 물론 힘이 들었지만 아주 신났지요. 그래 자꾸 적진에 들어가 포로를 잡아오니까 어느새 85명이나 되였다는거지요.》

10월 28일 새벽까지 성세호대했던 료서대작전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이틀간의 작전에서 동북야전군 각 종대는 료요상병퇀 5개 군, 12개 사단 도합 10여만명을 철저히 소멸하였다. 그중 2만여명을 격살하고 병퇀사령관 료요상 중장과 신6군 군장 리도이하 8만여명을 생포하였다. 영웅적인 동북야전군 3종대는 적의 최고지휘부를 강타했을뿐만아니라 도주중인 료요상까지 생포함으로써 《선풍부대》의 본색을 남김없이 발휘했고 가렬처절한 흑산전투를 거친 10종대는 혁혁한 전공으로 전 군에 알려졌을뿐만아니라 《철혈부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를 진감했던 흑산-대호산 승리 60주년이 되던 2008년 가을, 답사팀은 우리 민족 렬사들이 용감히 싸운 발자취를 따라 흑산현을 찾아보았다. 흑산현에는 아직도 키높은 렬사기념탑과 그 주변의 수많은 렬사무덤이 그대로 있었다. 대부분 무명렬사무덤이였다. 특히 흑산저지전기념관에는 10종대 28사 하경적사장의 묘소가 모셔져있었고 그 앞 비석에는 28사, 29사, 30사 렬사들의 이름을 새긴 큰 비석이 세개가 세워져있었다. 가장 간고한 전투를 진행했던 28사 렬사비석에는 수많은 조선족렬사들의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흑산렬사릉원의 기념탑

흑산렬사릉원의 렬사묘소

10종대 각 사 렬사비와 28사 사장 하경적의 묘

흑산현과 101고지 기념비가 세워져있는 산언덕을 돌아보고 답사팀은 금주에 있는 료심전역기념관을 참관하였다. 기념관앞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큰 비석이 길게 뻗어있었다. 높이 2.5메터, 길이 258메터에 달하는 비석에는 동북해방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는데 무려 5만여명에 달했다. 거기에는 김씨, 최씨, 박씨 성을 가진 수많은 조선민족렬사들의 이름이 수천명 적혀있었다. 우리가 하나하나 헤아려 확인하지 못하는것이 너무나 유감스러웠다.

렬사명록이 새겨진 비석을 둘러보고 기념관에 들어가니 많은 사진과 실물들로 동북해방전쟁의 거창한 화폭을 생생히 관중들에게 보여주고있었다. 특히 전투영웅들의 동상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양자영, 량사영, 마운비를 비롯한 쟁쟁한 영웅들과 함께 우리 민족 영웅 최성걸의 흉상과 강인복렬사의 흉상도 있었다. 그리고 최성걸과 강인복 렬사의 유물도 있었다.

최성걸 렬사의 흉상뒤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있었다.

《최성걸렬사(1929-1948), 최성걸동지, 조선족, 동북인민해방군 제10종대 부반장, 길림성 연길사람, 1946년에 입대, 공산당원, 1948년 10월 흑산저지전역의 대백태자전투에서 장렬히 희생, 〈계급의 강골〉칭호도 추수받음.》

흉상과 함께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자동소총이 전시되여있었다.

강인복렬사의 흉상 뒤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있었다.

《강인복렬사(1929-1948), 강인복동지(녀), 조선족, 동북인민해방군 포병종대 위생반 반장, 흑룡강 녕안사람, 1946년에 입대, 1948년 10월 료심전역이 시작된 후 주동적으로 전선에 갈것을 요구, 진군도중 영광스럽게 희생.》 그리고 강인복 렬사의 노트가 전시되였는데 거기에는 전선에 나갈것을 탄원하는 그의 결심이 적혀있었다.

사실 강인복렬사는 녕안사람이 아니라 길림성 연길사람이였다. 룡정근화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제가 패망할 때 아버지를 따라 흑룡강성 녕안현에 이사하여 세환진조선족중학교 3학년 녀성반에 다녔다.

1946년 봄에 토비들을 소멸하는 동북민주련군 전사들을 본 그는 큰 감동을 받고 20여명 동학들과 함께 민주련군에 찾아가 입대하였다. 일반녀성과는 달리 과감하고 호방한 성격을 가진 강인복은 단연히 땅크부대에 참가하겠다고 탄원했지만 조직에서는 그를 위생반에 보냈다.

동북민주련군 특종병 포병 3퇀 위생대에 편입된 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1946년말부터 1947년까지는 동북민주련군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매일이다싶이 전선으로부터 대량의 부상자들이 수송되여왔다. 강인복은 위생대 전우들과 함께 밤낮없이 부상자들을 돌봐주어야 했다. 그는 부상자들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으며 상처를 돌보고 밥을 먹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어혈과 고름을 짜주고 심지어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다.

종일 쉴틈없이 부지런히 돌아쳤지만 그는 바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전투에서 팔다리를 잃었거나 눈을 잃은 부상자들을 자기의 혈육처럼 생각하였다. 그는 부상자들이 힘들어하면 고운 목소리로 혁명노래를 불러주군 하였고 살뜰히 마음을 진정시켜주군 하였다. 그리하여 부상자들은 모두 키가 비교적 큰 강인복을 《훌륭한 누님》이라고 불렀다.

1947년초에 위생대 반장이 된 후 강인복은 전우들을 이끌고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는 부대에서 주는 수당금이나 물품을 애써 절약하였다가는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추위를 무릅쓰고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병실을 따뜻하게 해주었으며 위생대의 재산을 일전도 랑비없이 꼼꼼히 잘 관리했다. 그동안 그는 상급으로부터 세차나 3등공을 받았으며 많은 로동모범증서를 탔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그가 아니였다.

전민의 해방투쟁에서 더욱 큰 공훈을 세우기 위해 그는 전선에 나갈것을 적극 탄원해나섰다. 1948년 가을, 포병부대가 금주해방전투에 참가할 때 그는 상급에 요구해 전선에 나가 포화속에서 많은 부상자들을 업어내였다.

금주가 해방된 후 강인복은 피말리는 흑산전투에 나갈것을 탄원하고 약품을 나르는 자동차에 앉아 길을 떠났다. 트럭은 눈비가 내린 미끄러운 산비탈을 달렸고 길에는 8렬종대로 행군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굽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차에 실었던 큰 기름통이 강인복의 머리를 쳤기때문에 그는 불행히 희생되고말았다.

강인복렬사가 구해준 전사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료심전역기념관을 나오면서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고 또 우리 민족의 훌륭한 렬사들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동북해방의 가장 중요했던 대결전인 료심전역에서 너무나도 많은 우리 민족 장병들이 영용히 잘 싸웠던것이다. 최성걸, 임병전, 권혁무, 강인복 그리고 이름도 못 남긴 수많은 무명렬사들...그들은 흑산-대호산전투와 함께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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