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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2)—심양해방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3-05 16:33:18 ] 클릭: [ ]

중외를 진감한 료서대작전이 승리적으로 마무리되고있을 때 당중앙과 동북인민해방군 총부에서는 눈길을 다시 심양에 돌렸다. 심양의 10여만 적군이 료서를 지원하거나 영구를 거쳐 도주하지 못하도록 미리부터 손을 써야 했던것이다. 그리하여 금주를 해방한 동북인민해방군 주력부대가 료서작전을 펼치고있을 때 상급에서는 명령을 내려 장춘부근의 12종대를 급급히 남진시켰으며 장춘해방후에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병퇀 소속의 독립사들을 심양부근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족장병들로 편성된 독립 11사는 장춘에 남아 장춘위수임무를 맡은외에 독립 4사와 독립 6사는 신속히 남진해 심양해방전투를 개시하였다. 언녕 심양부근 청령에 도착해 적을 견제해 싸우던 독립 4사는 상급의 명령을 받고 12종대 각 사단과 함께 가장 먼저 심양공격전에 뛰여들었다.

적을 얼마나 더 많이 소멸하고 또 누가 가장 먼저 심양에 도착해 심양해방전투에서 더 큰 공을 세우는가는 모든 전사들의 두다리에 달려있었다. 사기충천한 전사들은 발이 부르트는것도 배고픈것도 몸이 지친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리고 달렸다. 장춘으로부터 심양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남진하는 아군장병들로 하여 미여날 지경이였다.

이른바 동북공산군토벌총사령부 사령인 위립황은 그래도 심양을 지켜볼 생각으로 영구로 빠져나가려던 53군을 돌려세우고 영구에 있는 52군에게도 심양에 돌아올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심양을 지켜낼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52군 군장 류옥장은 영구를 지키다 배를 타고 도주할 생각으로 위립황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위립황은 제8병퇀 53군과 6군의 13만여명의 병력을 끌어모아 수비진을 쳐놓았다.

1948년 10월 30일 남먼저 심양에 도착한 동북인민해방군 12종대는 심양의 적이 영구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우선 심양시 서남부를 차단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료서전역을 마무리한 1종대와 2종대가 심양근교에 도착해 심양을 협공하고 7종대, 8종대, 9종대는 영구로 돌진하였다.

한편 줄곧 심양주변에 있던 료남군구 독립 4사 조선족장병들은 30일 새벽부터 무순으로부터 심양으로 진격하였다. 사단 포병영은 반땅크포로 구참(九站)의 적을 소멸하고 계속해 적대(滴台)고지를 점령한후 심양동부교외 동릉(东陵), 심해(沈海)일선에 당도하였다.

동릉지역에는 림시편제로 된 신1군 53사와 청년군 207사의 한개 퇀이 수비하고있었다. 독립 4사 1퇀은 우선 적정을 관찰한후 지세가 조금 높은 소나무숲에 퇀지휘소를 설치한후 동릉동부 혼하기슭의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직접 훈련시켜낸 국민당청년군 207사 병사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가지고 완고하게 반항하였다.

그리고 아군 12종대와 독립 4사에 포위된 국민당 53사도 계속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심양의 최창수 로인은 당시 독립 4사의 중기반장이였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동릉전투 역시 쉽지 않았다.

《심양을 해방할 때 무순으로 해서 동릉으로 들어가는데 53사에는 포병부대가 있었습니다. 82미리미터 류탄포가 많았습니다. 40리인데 우리가 공격해들어오면서 적의 포화력이 너무 세서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포탄에 맞아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상한 동무들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후퇴하여 북릉비행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전술을 바꾸어 우회하여 들어왔습니다. 남아있던 국민당 53사는 비행장이 점령되고 상황이 기울어지자 할수 없이 투항했습니다.

도시에 들어와 시가지전을 치렀는데 아주 간고했습니다. 집들이 많기때문에 적이 어디 숨어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튀여나올지 몰랐습니다. 국민당 사령부자리를 점령하는 전투, 절간에 숨어있는 적을 소멸하는 싸움에서 우리 동무들이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국민당의 사단부도 우리가 점령했습니다.》

독립4사 지휘부에서는 한개 영을 남겨 207사의 적을 계속 견제한후 주력을 마관교(马关桥)쪽으로 돌려 철길을 따라 심해역을 공격하여 국민당군 53사에 대한 포위권을 줄이기 시작하였다. 심해를 수비하던 국민당 53사의 한개 퇀은 땅크 두대와 장갑차 한대를 앞세우고 대항해나섰다.

독립 4사 1퇀 장병들은 박격포와 60미리포를 가지고 적의 공격을 물리친후 2퇀, 3퇀과 함께 53사의 적을 전부 포위하였다. 곤경에 빠진 국민당 53사 허경양(许庚扬)사장도 더 대항해봤자 죽음밖에 없을줄 알고 전향할 생각을 하였다. 30일 오후, 독립 4사 로철용 참모장은 적 53사의 담판대표를 만나보고 관련 상황을 상급에 보고하였다. 료북군구사령부에서는 보고를 받고 53사 허경양사장의 의거를 허락하였다.

독립 4사 정찰병이였던 최학만로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가 동릉으로 들어오는데 심양에서 크게 싸우지 않았습니다. 동릉에서 싸우고 여기 파편에 부상당했는데 그때 우리 병원이 있었소? 그냥 약만 바르고 부대를 따라 다니며 전투를 지휘했소. 동릉에서 싸웠는데 포격이 얼마나 심한지… 국민당 류탄포가 그렇게 심한데 정신 못차리겠소. 그때 얼마나 격렬했는지, 죽으면 죽고 해보자 이러는 판이였소. 그런데 령도에서도 일절 국민당이 동릉에 집중하니 여기 소수병력을 남기고 그냥 불질하게 하고 대부대는 60리 행군해서 뒤에서 공격하라고했소. 그래 우리는 배후로 들이쳤소. 북릉으로 해서 우리 어제 갔던 오가황 그쪽으로부터 쳤소. 이 새끼들이 당황해가지구 속의 흰 내의를 벗어 총끝에 내걸고 투항했소. 수태 투항했지뭐. 몇천명이 될거요. 총무더기가 농촌 초가집 세개만큼 컸소.》

10월 31일 오후 동릉방어선의 국민당 53사가 의거하였지만 207사 한개 퇀은 계속 반항하였다. 독립 4사는 다시 병력을 집중해 남은 적을 숙청하고 완고한 적퇀장 도의(陶毅)를 생포하였다.

심양근교 구참전적지.

독립4사 중기반장 최창수로인.

독립4사 정찰병 최학만로인.

독립4사 간부 최강로인.

심양근교 마관교전적지.

국민당 한개 사단의 의거를 접수하고 대항하는 한개 퇀을 소멸한후 독립4사는 심양에 당도한 기타 주력부대들과 함께 심양동부 수비를 뚫고 공격하였다.

11월 1일에는 동북인민해방군 1종대, 2종대, 12종대 그리고 여러개 독립사들이 일제히 심양시로 공격해 들어갔다. 독립 4사는 북릉지역으로 이동해 적 53군을 공격하였다. 아군장병들은 추풍에 락엽 쓸듯이 국민당군을 소멸하였다. 사기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국민당 병졸들은 다투어 무기를 놓았고 장교들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투항하기에 급급하였다. 독립 4사는 아군주력부대와 함께 국민당군 53군 30사의 투항까지 받아냈다.

심양수비가 뚫리자 동북공산당군토벌 총사령인 위립황은 급급히 기행기를 타고 도주하였다.

11일 1일 아군 공격부대는 심양시 은행청사를 공점하자 국민당 제8병퇀 사령관인 주복성(周福成)은 사령부 300여명 일군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청년군 207사의 일부는 동대영(东大营)과 교가워펑(乔家窝棚)에서 2주야를 완고하게 대항했다. 놈들은 심양수비 사령관인 주복성의 투항하라는 명령도 듣지 않았다. 11월 2일, 동북인민해방군은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청년군 207사 잔여세력을 전부 소멸하고 심양을 해방하였다.

11월 2일 독립 4사는 심양시 중심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북릉에서 동북대학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황고구를 지나 화평구에 이르렀다. 거리에는 국민당패잔병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있었고 각 곳에 장갑차, 대포, 자동차들이 널려 있었다. 전사들은 화평구의 국민당 동북공산군토벌사령부를 점령하였다.

원 독립 4사 1퇀 정치처 주임이였던 무순의 최강로인은 심양해방할 때의 동릉전투를 이야기했다.

《심양을 해방하는 전투는 동릉지구에 있는 국민당 한개 사단을 포위공격하는것으로 시작되였습니다. 거기서 우리 1퇀은 마관쵸전투에서 국민당의 땅크부대와 접전을 해 승리했으며 영장이하 7명이 희생되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덕분으로 국민당 한개 사단의 기의를 받아냈습니다. 혼하강옆에 있던 왕패부대 207사 역시 투항했습니다. 우리는 이어서 북릉지구로 진군해 국민당 한개 사단을 포위했는데 당시 이미 맥이 빠져버려 투항을 선포했습니다.

심양은 11월 2일에 해방 되였으며 우리 부대는 심양에 진입해 중산광장정면에 있던 과거 일본놈이 지은 야마도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군명칭도 인민해방군 166사로 고치고 산하에 486, 497, 498퇀을 두었습니다. 우리 퇀장 정치위원 참모장 등이 사령부에 가서 왕자인사장과 방호산정치위원의 명령을 받고 철석으로 진군해서 철서구위수임무를 맡았습니다. 저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때부터, 《리홍광지대》, 《독립 4사》로 개칭할 때까지 줄곧 이 부대에 있었고 부대 만여명 장병 모두가 조선족이였다는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 우리 부대는 심양해방후 해방군 166사로 명칭을 바꾸고 심양위수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해방전쟁시기 동북에서의 국민당 통치중심이였던 심양은 1948년 11월 2일 오후 5시에 완전히 해방되였다. 피로를 모르고 용감히 싸운 동북인민해방군 장병들은 심양해방전투에서 국민당 13만 4천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심양해방후 독립4사 사령부가 설치되였던 료녕빈관앞에서 로전사 촤강(우), 서영화(좌).

희생된 전우들을 찾는 로전사.

렬사릉원의 무명렬사 위패.

심양교외 렬사릉원의 기념비.

1945년 11월 심양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리홍광지대로, 독립 4사로 재편성되면서 림강보위전, 휘남전투, 철령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3년만에 다시 심양에 돌아와 심양을 해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동북해방을 위해 피흘려 싸운 이들의 전투적 업적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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