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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3)—동북해방과 심양위수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3-07 11:26:21 ] 클릭: [ ]

심양주변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가 심양을 공격하고있을 때 국민당 52군은 영구를 점령하고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동북인민해방군 9종대와 8종대, 7종대는 료서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영구로 급행군하기 시작하였다.

7종대 20사 58퇀 경위련은 화룡현 보안퇀과 돈화현 보안퇀 그리고 조양천군정대학 학원 230명으로 편성되였는데 모두 조선족청장년이였다. 영구탈환 임무를 맡은 그들은 련속되는 금주전역, 료서작전의 지대한 피로를 무릅쓰고 240리를 달려 영구에 가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길이 미끄러워 전사 리동선은 행군도중 100여차나 넘어졌다.

그러자 황동춘패장과 신학출반장은 리동선의 60근에 달하는 행장을 나누어 메고 달렸다. 언제나 락관적인 오락위원 지동철은 대오의 앞뒤를 다니며 전사들을 고무해주었다. 그는 각 패와 각 반 전사들을 동원해 노래시합을 시키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전사들을 골라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칠대로 지쳤지만 전사들은 정신을 놓치 않았고 사기를 돋구어 계속 달렸다.

1948년 11월 1일에 6주야의 간고한 급행군을 거쳐 9종대가 먼저 영구부근에 도착했다. 국민당 52군 군장 류옥장은 모든 중무기를 동원해 아군의 공격을 막는 동시에 몇척의 상선과 운수선으로 남은 부대를 수송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병졸들은 서로 살기 위해 악을 쓰고 배로 몰려드는 바람에 어선 한척이 선상에 불이 달려 침몰되였고 기타 배도 좀처럼 움직일수 없었다.

한편 9종대 장병들은 중무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과감히 공격을 발동했다. 적아 쌍방은 영구근교에서 서로 밀고닥치며 치렬하게 싸웠다.

11월 2일 새벽 밀물이 들무렵, 국민당 52군 군장 류옥장은 아수라장이 된 영구부두의 병졸들을 버리고 이미 탑재한 배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9종대보다 좀 늦게 도착한 동북인민해방군 7종대 장병들은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신속히 영구부두로 달려갔다.

7종대 20사 58퇀 경위련은 9종대와 국민당군이 싸우는 틈을 타서 적의 진지를 에돌아 먼저 부두에 도착했다. 이때 영구바다에는 국민당군을 탑재한 세척의 배가 항구를 빠져나가려 하고있었다. 전사들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일제히 사격했다. 뒤따라 온 포병부대도 신속히 포를 걸고 사격하였다.

아군의 사격에 적의 배 한척이 명중되여 불이 달렸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배 한척이 흰기를 내흔들었다. 결국 국민당 배 한척만이 도주했고 불이 달린 배와 흰기를 내든 배의 국민당병졸들은 모두 포로가 되였다. 240리 급행군을 거쳐 아군은 국민당 만여명을 생포함으로써 영구추격전을 승리적으로 마쳤다.

7종대 경위련 20사 58퇀 경위련 패장이였던 황동춘로인.

해방후에 남긴 7종대 20사 58퇀 경위련의 로전사 기념사진(앞줄 우로 세번째 황동춘).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10일까지 52일간 지속된 료심전역 대결전에서 동북인민해방군은 사상자 6만 9000명의 대가로 동북의 국민당군과 보안부대 47만 2000명을 소멸하였다. 게다가 비행기 16대, 땅크 76대, 철갑차 151대를 포함한 대량의 선진적인 무기를 로획하였다. 위대한 료심전역을 거쳐 동북인민해방군은 전반 동북경내를 전부 해방하였다.

료심전역이 끝난후 동북인민해방군은 대부분 휴식정돈에 들어갔고 부대번호도 새롭게 편성되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으로 개칭하였고 동북인민해방군 1종대는 38군, 2종대는 39군, 3종대는 40군, 4종대는 41군 이런 순서로 개칭되였다. 조선족장병이 비교적 많은 10종대는 47군으로 개칭되였으며 산하 28사는 139사, 29사는 140사, 30사는 141사로 되였다.

그리고 동북인민해방군 산하의 각 독립사도 새롭게 편성되였다. 조선족장병들을 위주로 한 독립4사는 166사로 개칭하고 심양위수임무를 맡았으며 독립6사는 156사로 개칭하고 동북야전군 제6종대에 편입되였으며 독립 11사는 164사로 개칭하고 장춘위수임무를 맡았다.

동북경내 모든 부대들이 승리의 기쁨속에 휴식정돈에 들어갔지만 갓 해방된 심양위수임무를 맡은 166사는 조금도 쉴틈이 없었다. 심양에 진입한후 166사 사단부는 야마다호텔, 지금의 심양시 료녕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66사 선전대에서 활동했던 심양의 서영화로인은 료녕호텔 사령부자리를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여기 이 광장이 옛날부터 유명한 중산공원입니다. 1948년 11월 2일 166사 우리 부대가 방호산 정위와 왕자인의 지휘밑에서 심양을 완전히 해방하고 이 중산광장에 와서 저기 보이는 야마다〈호테루〉, 지금은 료녕빈관으로 되여있습니다. 옆에는 공상은행이 있고 그옆에 경찰서 당시에도 경찰서였습니다. 그뒤에는 의과대학이라고 유명한 병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부근의 건물은 모두 제정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료녕빈관은 우리가 가장 먼저 들었던 곳입니다. 우리 166사 선전대는 2층 왼쪽에 들었고 다른데는 일반과원들이 들었고 3층은 사령부의 주요성원이 들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166사로 편성된후 독립 4사 1퇀은 496퇀으로, 2퇀은 497퇀으로, 3퇀은 497퇀으로 개칭되였다. 심양위수사령부 오수권사령의 명령에 따라 496퇀은 철서구, 497퇀은 심해와 북릉구, 498퇀은 화평구와 황고구에 위수임무를 수행하였다.

166사 496퇀 정치주임이였던 최강로인은 당시 사단지휘부가 위치했던 료녕호텔에 가서 임무를 맡던 일을 이야기했다.

《…1948년 11월 2일 전 동북이 해방되였습니다. 저는 료녕빈관에 설치한 우리 부대 사령부에 가서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 1퇀은 철서구를 가게 되였습니다. 당시 심양시군사관제위원회 책임자는 진운이였고 위수사령원은 오수권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분의 지휘를 받아가지고 심양시에 있는 기차역, 비행장, 장학량시대부터 만든 병기공장 그리고 철서구 일본놈의 여러 공장들을 접수하고 보호했습니다. 우리 166사는 상급 지도부로부터 〈전투장에서는 영웅이고 위술공작에서는 모범이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위수임무를 맡았을 때 부대 장병들속에서 사상파동이 생겼다. 많은 장병들은 후방에서 보초나 서는것을 원치 않았으며 관내로 진입해 싸울것을 탄원하였다. 이에 비추어 166사 사단부에서는 퇀이상 간부들을 모아놓고 동원대회를 열었다. 왕자인사장은 심양시 군사관제위원회와 심양시위수사령부의 지휘하에서 시내 각 공장과 교통시설, 물자를 보호하고 생산질서를 유지하며 공업생산을 회복발전시킴으로써 전국해방 전선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위원 방호산은 전쟁터에서 국민당군과 싸우는것 마찬가지로 평화적 환경에서 국가건설을 보위하는 새로운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심양이 해방될무렵 국민당 첩보원과 잠복한 특무들은 심양병기공장을 파괴하고 15만근의 화약이 저장되여있는 철서구의 창고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특무들 내부에 불화가 생기고 또 이를 신속히 파악한 아군의 신속한 진압을 받아 적의 계획은 무산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국민당군은 비행기를 동원해 철서구의 화약창고와 포탄창고, 병기공장을 폭격하였다.

철서구의 화약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166사 496퇀은 고사포련을 철서구에 배치하였고 밤낮으로 여러 창고와 병기공장을 순라하였다. 국민당 특무들이 기차역부근 물공급장치를 파괴하자 496퇀 3영 장병들은 물통에 물을 길어가지고 일제히 기차역에 달려가 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다. 그리고 기타 부대 장병들은 밤을 타서 화약창고에 접근하는 특무 한놈을 격사하고 한놈을 생포하였다.

하지만 국민당특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놈들은 계속 화약창고를 폭파하려 시도하였다. 496퇀 장병들은 자동차와 마차를 동원해 밤도와 창고의 화약과 포탄을 전선에 수송하였고 안전한 무기공장으로 이동시켰다.

심양시 철서구는 당시 각종 공장이 집결된 동북에서 가장 큰 공업기지였으며 화약, 포탄, 석유, 피복 등 많은 군수품이 여러 공장과 창고에 선더미처럼 쌓여있었다. 496퇀 장병들은 경계와 순라를 강화하는 한편 각 공장의 질서를 유지하며 여러 기업의 생산을 회복시켰다. 잠복했던 국민당특무들이 철서맥주공장의 로동자들을 기만하여 소동을 일으키려 하자 496퇀 장병들은 신속히 불순분자를 나포하고 주요 획책자인 공장주를 붙잡았다.

한번은 철서구고무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496퇀 조선족장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속에 뛰여들어 공장의 설비들을 꺼내왔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로동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조선족장병들의 행동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한편 166사 498퇀은 심양정거장과 심양병기공장, 황고구차량공장들을 보호하였고 497퇀은 심해, 대동구로부터 북릉구로 자리를 옮기면서 북릉비행장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였다. 뿐만아니라 166사 문공대는 여러 공장을 다니면서 로동자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였다. 문공대 대원들은 독특한 조선족 노래와 춤을 보여주었기때문에 가는 곳 마다 로동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66사는 심양을 해방한 그날부터 1949년 여름까지 8개월간 심양위수임무를 수행하면서 우리 당의 도시정책과 위수규률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들은 심양시의 중요한 공장과 교통중심의 시설, 생산설비를 실속있게 보호하여 공업생산의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담보하였다. 특히 보호구내 인민들의 정상적인 생산과 생활질서를 잘 수호하여 수차 국민당 특무들의 파괴시도를 파탄시켰다.

동북군구와 심양위수사령부는 166사를 자주 치하하였고 166사에 규률준수모범, 위수임무 완수모범이라는 높은 영예를 수여하였다.

심양 오가황소학교에 세운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

조선의용군 기념비앞에서 혁명가곡을 열창하시는 심양의 리홍광지대 로전사분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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