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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4)—북평 남원비행장 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3-03-09 09:12:38 ] 클릭: [ ]

전반 동북이 해방됨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물질적 토대가 든든한 전략적 후방이 있게 되였을뿐만 아니라 근 100만에 달하는 전략 예비대를 가지게 되였다. 이로써 전반 해방전쟁의 정세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정신력과 작전능력면에서 언녕 국민당군을 초월한 인민해방군은 이때에 와서는 수적으로도 국민당군을 릉가하였다. 국민당군 총병력은 전쟁전의 365만명으로부터 290만으로 줄어들었고 인민해방군은 28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늘었다.

서백파에서 전반 해방전쟁을 지휘하고있던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는 동북해방과 함께 눈길을 다시 서주와 북평에 돌렸다.

동북에서의 대결전인 료심전역이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화동야전군과 중원야전군 60만대군을 지휘해 동부의 강소성 해주로부터 서부의 하남성 상구, 남부의 안휘성 회하기슭으로부터 북부의 산동성 림성에 이르는 드넓은 전장에서 국민당 서주 《공산군토벌총사령부》의 80만 대군과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있었다. 기동령활한 화동과 중원 야전군은 도처에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해 국민당군을 분할, 소멸하면서 회해전역의 고조를 일으키고있었던것이다.

한편 화북전장도 소홀히할수 없었다. 동북해방군 근 100만 병력을 확보한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동북해방군을 동원해 북평과 천진에 진을 치고있는 국민당 부작의집단을 소멸할 계획을 무르익히고있었다.

원래 국민당 화북 《공산군토벌》총사령인 부작의의 상황은 비교적 안전했다. 자체로 60만 대군을 가지고있었을뿐만 아니라 동부의 위립황 수십만 군사가 있었고 남부에도 서주 《공산군토벌총사령부》의 수십만병력이 협동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에 와서 동북의 위립황집단은 전멸한데다가 서주 《공산군토벌총사령부》의 수십만 대군도 곤경을 겪고있었던것이다.

부작의는 자기가 장악하고있는 60만 병력을 밑천으로 미국의 후원을 받아냄으로써 계속 북평과 천진을 사수하다가 상황이 어려우면 자기 본거지인 수원으로 철수하려 하고있었다. 그도 장개석의 패망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에 자기 타산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동북이 해방된후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50여일간의 련속되는 료심전역을 거친 동북야전군은 지칠대로 지쳤기때문에 한동안의 휴식과 정돈을 거친후 관내로 진입하도록 결정하였다.

명령에 따라 동북야전군은 1948년 11월 6일부터 휴식정돈에 들어갔다. 이때 서주방향에서 화동야전군은 국민당 황백도병퇀을 소멸하고 중원해방군도 막강한 공세에 들어갔다. 해회전역은 관건적인 시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갈수록 고립되고있는 부작의집단을 제자리에서 포위,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화북야전군의 병력만으로는 부작의집단을 포위할수가 없었다.

모택동은 동북해방군을 신속히 관내로 진입시켜 천진, 당고, 당산을 장악함으로써 부작의집단이 배길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고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1948년 11월 23일,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동북야전군 12개 보병종대와 포병종대, 철도병종대는 주둔지를 떠나 대거 관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팔로군, 신사군이 동북으로 진출할 때부터 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3년전, 좁쌀에 보총을 들고 동북으로 나온 10만명 팔로군, 신사군은 3년후에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80만 강철의 대오로 관내에 진입하게 되였던것이다.

각 부대는 23일 황혼녘에 출발하였고 심양부근의 부대는 이튿날 황혼녘에 출발하였다.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그들은 낮에 휴식하고 밤에 행군하였다. 동북야전군 42군과 43군, 특종병부대는 북쪽으로 희봉구를 에돌아 진입하였고 40군, 44군,45군, 46군, 47군은 금주로부터 랭구(冷口)를 통해 행군하였다. 그리고 38군과39군, 49군이 제2진으로 그 뒤를 따랐다.

관내로 진입하는 동북야전군.

평진전역 상황도.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산해관을 진입하는 동북야전군.

동북야전군은 한주일간 비밀리에 행군하다가 선봉부대가 적과 접촉하면서 동북야전군의 관내 진입작전이 폭로되자 더는 숨기지 않고 일제히 산해관을 통해 진격하였다. 산해관지역 백성들이 다투어 달려나와 해방군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자동차나 말로 끄는 산포, 야포, 류탄포들을 재미나게 구경하였으며 또 흙먼지를 날리며 위풍당당하게 지나가는 땅크부대도 보았다.

당시 부작의는 서부의 장가구로부터 동부의 당고에 이르기까지 60만대군을 1200여리의 교통선에 길게 장사진을 쳐놓았던것이다. 희봉구를 거쳐 먼저 북평지역에 도착한 동북야전군 42군은 화북야전군을 도와 장가구를 해방하고 부작의의 최정예부대인 35군을 소멸하였으며 랭구를 거쳐 진입한 동북야전군 40군은 북평 통주를 거쳐 남원비행장을 공격하였고 47군은 북평과 천진사이에 깊숙이 진입해 적의 련락을 차단해놓았다.

도시포위작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적의 비행장을 장악하는것이였다. 많은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동북야전군 40군은 북평에 이른후 통주를 거쳐 남원비행장을 공점할 임무를 맡았다.

1948년 12월 17일, 40군 118사 354퇀은 북평남부 30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위치한 남원비행장을 점령하고 폭격기 25대와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19일 국민당군은 남원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96군 56사의 두개 퇀 병력을 집중해 반격해나왔다. 적은 10여문의 산포로 남원비행장부근의 아군진지를 공격하면서 16대의 땅크를 앞세우고 공격해왔다. 전투는 자못 치렬하였다. 354퇀 각 부대는 자기 진지를 사수하면서 118사 사단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사단부에서는 사단포병부대를 집중해 적을 사격하도록 명령하고 또 산하의 특무영을 354퇀에 지원보냈다. 특무영 2련은 조선족련이였다.

원 동북야전군 40군 118사 특무영 2련 지도원이였던 정병남로인은 남원비행장 수비전투에 직접 참가한분이다.

(정병남)《평진전역에서 우리 7사 40군 118사는 북평 남원비행장에서 싸웠습니다. 우리 사단은 남원비행장을 해방하고 25대의 비행기를 로획했습니다. 우리는 118사 354퇀을 도와 비행장보위임무를 맡았습니다. 우리 련은 남원비행장서부에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진지를 만들기 위해 폭약으로 포장도로를 폭파해 반땅크호를 팠습니다. 19일 오후 적 96군 56사 두개 퇀이 16대의 땅크를 앞세우고 공격해왔습니다. 적은 우리 중점진지를 우회해 공격해왔습니다. 우리 정면에는 땅크 3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적의 보병을 소멸하자 땅크도 물러났습니다. 전투에서 우리는 353퇀과 배합해 적 땅크를 소멸하고 100여명 적을 격살하면서 남원비행장을 성공적으로 보위했습니다.》

특무영 2련 련장은 림흥식이고 부련장은 강봉수였으며 정치지도원은 정병남이였다. 이들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남원비행장 서북쪽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2련 장병들은 포장도로를 파서 깊이 3메터, 높이 2메터인 반땅크함정을 파놓았으며 부근의 큰 물도랑을 리용해 철조망을 쳐놓았다.

12월 19일 오후 2시부터 국민당군 96군 56사 두개 퇀 병력이 공격해왔다. 특무영 2련 조선족장병들의 진지앞에는 땅크 3대를 앞세운 100여명 보병이 나타났다. 적은 반땅크호를 만든쪽을 피해 비교적 높은 둔덕에 위치한 2패 진지를 중점 공격하였다. 정병남 지도원은 2패 진지로 달려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들은 화력을 집중해 먼저 땅크뒤를 따르는 적 보병을 소멸한후 곧바로 돌격해나갔다. 보병이 흩어지자 적 땅크도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경위영의 포병들이 적진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경위영 2련 조선족장병들은 100여명 적을 소멸하고 적 땅크 다섯대나 까부셨다.

40군 118사 경위영 2련 조선족장병들을 거느리고 남원비행장에서 싸웠던 정병남로인은 40군 사급간부로 리직한후 장춘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떴다. 다행히 답사팀은 2007년 3월 《영원한 기념비》답사 좌담회에서 정변남로인의 소중한 기억을 기록할수 있었던것이다.

지금의 남원비행장.

40군 로전사 정병남.

정병남(뒷줄 좌로 첫번째)이 광주에서 전우들과 함께.

장춘에 계시는 40군 로전사들(앞줄 좌로부터 세번째 ,정병남, 권상준, 전운백).

1945년말에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선전을 듣고 100여명 조선족청년학생들을 데리고 참군하였던것이다.

(정병남) 《그때 우리 부락만 하여도 80여명이 참군했는데 100여호가 조선집입니다. 몇년전에 제가 마을에 가서 렬사비를 세우려고 반가점에서 렬사증을 조사하니깐 아직도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이 17명이나 되였습니다. 렬사증을 받은 사람이 17명이였습니다. 한족이 하나였습니다. 여기에는 참군한 다음 가족이 이사간 사람들은 통계가 안되였습니다. 16명이나 되였습니다. 전부다 림강보위전에 참가하고 료심전역까지 참가하였습니다. 그 다음 일부분은 조선에 나가서 항미원조에서 희생되였습니다. 일부분은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였습니다. 나는 개원에서 온 조선인부대를 거느리고 특무영에서 문화간사로 있었습니다. 부지도원, 지도원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림강보위전, 추기공세, 동기공세, 료심전역에 참가했습니다. 우리 중대는 7사 지휘부를 보호하였습니다.》

1948년 12월중순에 이르러 동북야전군 39군, 40군, 42군, 48군은 북평을 포위하고 43군, 47군, 38군과 화북야전군 7종대는 북평과 천진사이의 련계를 차단하였으며 45군, 46군, 44군, 49군 그리고 특종병종대 주력은 천진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눈 감짝할사이에 장가구, 신보안, 북평, 천진, 당고 등지에 포위된 부작의는 부대를 통일적으로 지휘할수 없게 되였고 앞뒤를 돌볼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본거지인 수원으로 철수할수도 없고 배길로 도주할수도 없게 된 그는 할수 없이 12월 중순 담판대표를 파견해 담판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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