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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5)—천진해방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3-03-09 21:21:15 ] 클릭: [ ]

1948년말에 이르러 개털모자에 두터운 솜옷을 입은 동북야전군 장병들이 관내에 진입해 북평, 천진 지역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자동화무기로 무장했을뿐만 아니라 구경이 큰 대포에 장갑차, 땅크까지 몰고 만리장성을 넘어온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병》이나 다름없었다.

동북야전군 《선풍》부대인 40군은 남원비행장을 통제하고 신속히 북평서남부에 진을 쳤으며 흑산-대호산전역을 겪은 《철혈》부대 47군은 하북에 진입한후 140사를 나누어 46군과 함께 당고부근에서 적 3000여명을 소멸한후 군량성(军粮城)을 점령하였다. 그후 140사는 또 적의 화약창고가 있는 신하진(新河镇)을 공격해 2,400여명 수비군을 소멸하였다.수차의 전투를 거친후 47군은 명령에 따라 북평 통현(通县)에 도착해 북평과 천진사이의 련계를 차단하고 북평동남부에 포진하였다.

북평에 웅거한 국민당 《화북공산군토벌》 총사령인 부작의는 일찍부터 장개석 국민당의 패배를 인식하고있었다. 때문에 그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이동할것을 요구하는 장개석의 명령을 극구 거부하였다. 그리고 동부출해구를 확보하지도 않고 자기 본거지인 수원으로 철수할 생각만 하고있었다.

이를 미리 간파한 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화북야전군 주력을 동원해 장가구를 포위했다. 북평으로부터 수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장가구를 확보하기 위해 부작의는 직계부대인 35군을 급파해 장가구를 탈환하려했다. 화북야전군은 신속히 남진해 신보안에서 35군까지 포위해놓았다. 급해난 부작의는 16군과 104군을 파견해 신보안의 포위를 풀고 35군을 구하려 했지만 이때 이미 관내로 진입한 동북야전군과 부딛치게 되였다.

16군과 104군은 개털모자를 쓴 동북야전군에게 전멸되였고 35군도 화북야전군과 동북야전군에 의해 소멸될 운명에 놓이게 되였다. 동북야전군이 나타나자 부작의는 절망에 빠지고말았다. 그는 동북야전군이 이처럼 신속히 나타날줄을 생각하지 못했으며 수원으로 철수하려던 계획이 허무하게 무산될줄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도처에서 개털모자를 쓴 동북군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받은 부작의는 할수 없이 공산당과의 담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12월중순 《평명일보(平明日报)》사 사장인 최재지(崔载之)를 담판대표로 평진전선사령부에 파견했다. 동북야전군 참모장인 류아루가 평진전선 사령부 대표로 이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화북련합정부》를 건립하고 부작의의 군대를 보류해둔다는 대방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1948년 12월 22일 화북야전군 제2병퇀은 신보안을 공격해 35군을 전부 소멸하였고 이튿날에는 장가구를 해방하였다.

아직까지도 군벌사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부대보류와 련합정부를 꿈꾸는 부작의집단에게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동북야전군은 단호히 천진공격전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견고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13만 병력으로 수비하고있는 천진을 신속히 해방하기 위해 동북야전군은 5개 군 35만 병력을 동원했으며 투입할수 있는 대량의 대포와 땅크를 집중했을뿐만 아니라 공병과 폭파부대를 비롯한 특종병을 다 투입하기로 계획하였다.

동북야전군 특종병부대 공병들은 1948년 12월중순에 산해관을 넘어 하북인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황도부근에 주둔하고있었다. 그들은 1949년 모택동의 신년연설을 학습하면서 군중들과 련환모임을 준비하고있다가 명령을 받고 급급히 천진방향으로 이동하였던것이다. 특종병 공병 6련 위생원이였던 김장규로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2월 16일 산해관에 도착했다. 금방 국민당이 오래지 않다. 산해관에 가서 있으면서 48년 원단을 쇠려고 대조랑 땅땅 마른게 걸려있는데 그걸 뜯고 하면서 군민만회를 한다. 이런 연출할 연습을 했다. 나도 거기에 참가해 연습하고 49년말 새벽에 명령이 왔다. 48년도 명령에 따라 샀던걸 다 인민에게 주고 정월 초하루날 진황도에 가니 700리인데 닷새오라. 행군하는 짐, 쌀을 쥐어야하지 쌀, 탄알, 이불을 메야 하지. 총도 가져야 하지. 공병부대도 다 한가지지뭐. 99식하고 38식. 수류탄은 세개 다섯개 무겁지뭐. 그게 전부 생활이지뭐, 40근 넘다. 쌀도 며칠 먹을걸 ……그러니깐 공병은 삽 하나씩 가지고있다. 다른건 마차가 있다. 마차에 싣고 가는데 당산을 걸쳐서 그쩍에  주서가 사망한후 만의가 특종병 사령으로 왔다. 60이 다 되는분이다.》

1949년 1월 14일 오전, 천진해방전투가 시작되였다. 동북야전군은 수백문의 대포를 리용해 한시간동안 포격을 가한후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아군장병들은 40여대의 땅크를 앞세우고 동부, 서부, 남부로 천진을 공격하였다.

보병부대가 신속히 성곽을 돌파하려면 반드시 넓고 긴 호성하를 신속히 통과해야 했다. 주력부대인 38군의 공격을 보장하는 호성하다리부설임무는 공병 1퇀이 맡게 되였다. 공병 1퇀 2영 6련은 련장 한명, 패장 한명에 사무장 세명을 제외하고는 138명이 모두 조선족장병이였다.

다리부설임무를 맡은 공병 6련 장병들은 일제히 앞장서 달렸다. 그들은 철배와 여러가지 도구를 들고 호성하에 도착한후 서슴없이 찬물속에 뛰여들어 철배를 묶어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적아쌍방의 포격에 호성하의 얼음은 모두 깨여져 살얼음이 그냥 물우에 떠있었던것이다. 호성하에 도착하니 2패 송천화패장이 적탄에 맞아 희생되고 김영도를 비롯한 6명 전사가 부상당했다. 김창룡지도원은 침착하게 전사들을 지휘해 철배를 하나하나 이어놓았다.

(김장규) 《그래 며칠 늦어 정월 14일 6시 반에 치기 시작했습나다. 신호탄 셋 놓고 우리가 선발대로 출발했는데 우리 1종대를 따라 공격했습니다. 공병이 4개 영이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다 분배했습니다. 우린 동쪽에 배치되였습니다. 그래 포를 170문 걸어놓고 신호총 세발 쏘면 포사격을 가했지요. 15분 한다던게 10분도 안되여 포격이 끝났습니다. 천진수비군은 금탕교의 물을 끌어들여 방어선을 하느라고 2메터 깊이에 13메터 길이로 파놓았습니다. 우리는 다리를 놓기 위해 돌격대와 같이 나갔다... 우리가 철배를 놓고 다리를 놓았다.》

포화를 무릅쓰고 가져온 도구를 다 사용했지만 다리를 다 부설하지 못했다. 왜냐 하면 호성하의 너비가 정찰할 때와 달라 몇메터 더 넓었던것이다.

《12메터라고 정찰했는데 13메터였습니다. 적의 또치까를 마스고 와서 했습니다. 다리를 놓고 거길 막 건너갔지요. 다리야 일본놈들이 철발로 몽땅 이어놓습니다. 1절 2절 4절까지 이렇게 연못가지를 놓고 거기우에 널을 놓습니다. 그냥 철발을 메고 들어가 다리를 부설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물속에 들어가 받들어야 합니다. 이건 사람도 못 메고 작은 산포도 건너갑니다. 그런데 철발이 부족해서 다리를 완수할수 없었던것입니다….》

휴대한 장비가 부족하자 김창룡지도원은 윤성기부련장을 시켜 38군 공병영과 련락하게 하는 한편 3패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적의 장비와 도구를 빼앗으려 했던것이다. 라영필패장은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적의 화력을 제압하라고 명령하고 이 틈을 리용해 적의 보루를 폭파할것을 황충경부패장에게 명령했다.

보병못지 않게 용감하게 돌진한 황충경 전투소조는 적 보루에 접근한후 수류탄묶음을 적 화구에 집어넣었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적 보루가 폭파되자 전사들은 일제히 달려가 보루를 점령하고 다리부설에 필요되는 철근과 목재를 구해왔다. 이들의 노력으로 200메터 달하는 호성하에 철근과 널판으로 이루러진 다리가 부설되였다.

김창룡지도원이 신호탄 세방을 쏘아 다리부설이 완성되였음을 알리자 아군공격부대는 신속히 달려와 무사히 호성하를 건넜고 땅크도 다리를 건너 적진으로 달려갔다. 옷은 물에 흠뻑 젖었지만 자기들이 부설한 다리로 자동차와 전차들이 안전하게 지나가는것을 본 공병 6련 장병들은 《만세! 만세!》하고 환호하였다.

천진해방에 참가한 가교 6련 장병들의 영웅적 행동(선전사진).

영웅 6련의 기념사진.

6련의 위생원이였던 김장규로인의 청장년시기의 모습.

연길에서 진료소를 운영하고있는 김장규로인.

동북야전군 38군과 45군은 동서 량쪽으로 천진성곽을 돌파하고 시내로 돌입해 들어갔고 기타 부대도 모두 적의 첫 방어진을 돌파하고 시내로 돌입했다. 전투는 자못 치렬하였다. 놈들은 거리마다 골목마다에 수비진을 쳐놓았고 주요 길어구의 층집을 완변한 보루로 만들어 아군의 공격을 막고있었다.

38군 113사 337퇀 3영 7련과 8련은 대부분 조선족장병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진종일 싸운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 서관대가를 따라 고루(鼓楼)방향으로 공격하고있었다. 부대의 앞장에 선 7련이 고루거리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구령!》하는 소리가 들여왔고 주변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강한 불빛이 일제히 7련 장병들을 비추었다. 전사들은 누구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신속히 흩어져 땅에 엎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숨겨진 건물과 적또치까에서 기관총탄이 일제히 쏟아져나왔다.

불빛이 밝았기 때문에 적의 사격에 아군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때 조선족반장 초정규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동보총으로 주변의 가로등을 까부셨다. 아군 전사들의 정확한 사격에 주변은 다시 어둠속에 잠겼다. 이 틈을 타서 7련 6반 전사 고영문은 40근에 달하는 폭파약을 들고 적의 또치까로 달려가 폭파하였다. 기타 전사들도 앞의 붉은 층집 창구로 련속 수류탄을 던졌다. 적의 또치까가 폭파되자 초정규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신속히 층집에 뛰여들어가 적의 기관총을 빼앗은후 20여명 포로를 압송해가지고 나왔다.

7련 장병들은 계속해서 고루를 지나 금탕교쪽으로 공격해갔다. 그들은 뜻하지 않게 조우한 적 트럭과 기병대 10여명을 소멸하고 경찰국을 점령하였으며 1월 15일 새벽녘에 금탕교를 점령하였다. 한편 38군 114사 장병들도 용감히 싸워 금탕교부근으로 접근해갔다. 부대의 앞장에 선 3영 9련은 강을 따라 전진하고있었다. 그런데 바른편 강기슭 3층건물에서 적의 총탄이 쏟아져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아군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급해난 9련 지도원은 부대의 유명한 폭파수 고광동을 불렀다. 그는 공병을 따라 강을 건너간후 적의 건물에 접근해 건물을 폭파해버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술이 가득 담긴 군용물통을 내밀었다. 가장 믿어운 전사를 죽음에로 내모는 지도원의 심정이 술에 담겨있었다. 고광동도 말없이 물통을 받아쥐고 꿀꺽꿀꺽 술을 마신후 20킬로그람 되는 폭파약을 안고 공병을 따라 어둠속에 사라졌다.

공병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간 고광동은 감쪽같이 적 건물에 접근한후 가만히 2층에 기여올라갔다. 2층 건물에서 폭약을 터치면 자기도 쉽게 몸을 피할수 없었다. 하지만 고광동은 죽음을 각오하고 단연히 도화선을 당긴후 미리 보아두었던 창문으로 몸을 던져버렸다. 이윽고 《꽝~》하는 굉음과 함께 적 건물이 폭파되였고 적의 사격도 멎었다. 머리를 숙이고 꼼짝 못하고 기다리고있던 전사들은 일제히 금탕교쪽으로 돌진해나갔다.

9련 지도원이 눈을 감고 폭파수 고광동의 희생을 가슴아파 할 때 뜻밖에 물에 함빡 젖은 고광동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어찌된 일인가?》 지도원은 너무 반가워 고광동을 덥썩 끌어안았다. 고광동은 2층에서 뛰여내렸는데 바로 강물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고 보고했다.

서란에서 만년을 보내는 고광동로인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있었다. 《천진전투는 낮에 했는데 11월인가 12월쯤일겁니다. 천진에 막 달아가며 지뢰를 막 다 묻어놓았지요, 천진이 큽니다. 내가 우리 부대의 땅크를 처음 보았습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한줄로 공격했는데 천진주변에 물도랑이 많았습니다. 땅크가 못 가는데 공병이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련장이 날 보고 올라오라 했습니다.

저 보고 2층에 올라가 적의 보루를 터지고 오라했습니다. 작약은 서너근 되였습니다. 공병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가 적 층집 건물에 접근했습니다. 그런 다음 2층으로 올라가 터치고 왔습니다. 아래층에서 터치고 오면 임무 완수가 아닙니다. 꼭 2층에서 터쳐버렸습니다. 그래 도화선을 당기고나서 죽고 안죽고 2층 문을 콱 차고 뛰였습니다. 다행히 물에 빠져 살아났습니다. 그래 살아서 영웅이 되였지요.》

《중요한 폭파임무를 맡길 때면 술을 줍니다. 그냥 죽을 각오를 하고 임무를 완수하라는겁니다. 영웅모범대회에서도 보통 서근반되는 대병의 술을 줍니다. 전 그걸로 두모금이면 다래요. 그래 주보라고 소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있는데 안됩니다. 나이가 83인데 얼마전까지 한근반 마실수 있었습니다. ……》

고광동로인의 제대증명서.

천진해방전투에서 폭파임무를 완수한 고광동로인(서란).

이처럼 동북야전군 각 부대의 조선족장병들은 천진해방전투에서 모두 용감히 잘 싸웠다. 그리고 49군 기관총수 신경용도 천진전투에서 30여명 적을 사살해 대공을 세우기도 했다.

1949년 1월 15일, 총공격 개시 14시간만에 동서로 협공했던 38군과 45군은 승리적으로 금탕교에서 회합함으로써 천진시를 두토막으로 갈라놓았다. 그러자 금성철벽이라고 자랑하던 천진수비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국민당군도 모두 전의를 잃고 다투어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9시간만에 전반 천진이 해방되였다. 영웅적인 동북야전군 장병들은 13만 천진 수비군을 소멸하고 국민당 수비군 두목 진장첩을 생포하였다.

천진해방 첩보가 서백파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동북야전군의 천진전역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천진해방전투는 대도시를 해방하는 훌륭한 전례로 된다면서 이를 《천진방식》이라고 불렀다.

실로 천진해방전투는 동북야전군이 관내로 진입한후 진행한 첫 대규모적인 도시공격전으로서 부대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주었을뿐만 아니라 서로 눈치만 보고 기회를 기다리던 국민당장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국민당 장교들은 드디어 아군의 진정한 정규작전의 위력을 느끼게 되였고 해방군의 막강한 실력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였던것이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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