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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68)—장강도하의 단풍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3-18 09:31:20 ] 클릭: [ ]

국공량당의 대결전인 료심, 회해, 평진 등 3대 전역이 끝난후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눈길을 전국해방에 돌렸다. 중국인민해방군 각 야전군은 추풍에 락엽쓸듯이 화북대지를 휩쓸고 그 예봉을 직접 장강이남 국민당 본거지인 남경과 상해로 돌렸다. 회해전역을 마친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은 한동안의 휴식, 정돈을 거치면서 배를 장만해 장강이남으로 출격할 만단의 준비를 마쳤으며 제4야전군은 하남, 호북 경내로 진격함으로써 국민당 백숭희집단 수십만대군을 견제하고있었다.

한편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로 된 국민당은 난국을 수습할 여력도 없었다. 그들은 선진적인 군함과 비행기에 수십만 대군을 가지고 적극 방어한다면 해방군을 얼마든지 막아낼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장강천험을 사이두고 공산당과 남북대치국면을 형성할 망상을 하고있었다. 국민당 통수부는 공산당과의 이른바 평화담판을 진행하는 한편 병력을 정비하고 민심을 수습하며 대량의 재물과 문화재를 대만으로 옮기는데 신경을 쓰고있었다.

장개석은 탕은백(汤恩伯)을 남경, 상해, 항주를 수비하는 경호항경비총사령부(京沪杭警备总司令部)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백숭희(白崇禧)를 화중공산군토벌총사령부(华中剿共总司令部) 총사령으로 임명해 해방군의 공격을 막게 하였다. 탕은백은 수하 45만 병력을 상해로부터 강서성 호구(湖口)에 이르는 800리 장강연선에 배치했고 백숭희는 본부 25만 병력을 강서성 호구로부터 호북성 의창에 이르는 천여리 장강연선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100여척의 군함과 300여대의 비행기를 동원했다.

국민당의 수법을 손금보듯 잘 아는 모택동과 당중앙지도부에서는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고 전국을 해방하자!》라는 구호를 제기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 그리고 중원군구와 화동군구 도합 100만병력을 집중해 탕은백의 수비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백숭희집단을 견제하기로 결정했다.

평진전역이 끝나서부터 제4야전군 선견병퇀인 40군과 43군은 서둘러 남하하기 시작했다.

40군 119사 경위영 제2련 련장 김지한(해방후 사진).

제4야전군 156사 행군로선도(156사 로젅사 리복룡 제작).

47군 허진협 전사의 혁명일기, 연변박물관에 수장.

허진협전사의 혁명일기 한부분.

평진전역후 47군의 남진 행군로선도.

40군 119사 경위영 2련 김지한련장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들은 2월하순부터 꼬박 43일간의 강행군을 거쳐 하남성 신양(信阳)부근에 도착해 휴식정돈하였다. 통현을 떠난 그들은 매일 70리내지 80리길을 걸었으며 한주일에 하루씩 휴식하였다. 그들은 보정, 형대, 한단에서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길가에는 해방군을 위로하기 위해 백성들이 준비한 과일, 닭알, 담배 등이 가득 놓여있었다. 하지만 전사들은 규률을 엄수하면서 함부로 먹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해방군의 씩씩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우렁찬 혁명가곡을 부르며 행진하였다.

강도높은 행군에 전사들 모두가 지쳐버린군 하였지만 행군을 멈출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당원과 간부들이 솔선적으로 힘들어하는 전사들의 이불짐과 총을 메주었다. 해방군장병들은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누구 하나 대오에서 떨어질세라 부지런히 행군했고 주둔지에 도착해서도 물을 긷고 마당을 쓸고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43일간의 간고한 장거리 행군을 거쳐 119사 경위영 2련은 사단부로부터 《규률을 엄수하고 의지가 굳은 모범련》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선견병퇀 40군이 하남경내에 이르렀을 때 안양(安阳)에는 국민당 잔여세력이 계속 대항하려 하고있었다. 선두에 선 120사는 안양을 공략하려 했지만 상급에서는 적을 소멸하는 임무는 후속부대에 맡기고 계속 전진할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전사들은 안양을 에돌아 신향(新乡)에서 황하를 건넜다. 이들은 4월에 하남성 신양(信阳), 호북성 광수(广水), 응산(应山) 지역에 집결하였다.

평진부근으로부터 남하할 때 제4야전군 각 부대는 모두 새로운 전사들을 보충했다. 조선족부대도 례외없이 개편했거나 기의한 국민당군 병사들을 접수하게 되였다. 38군 산포영 1련 1패는 모두 조선족 장병들이였는데 이때 6명의 한족 신입전사들을 보충받았다. 1패 전사들은 패장 윤종구만이 한어를 좀 할수 있었기때문에 처음에는 언어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 보다는 실제행동으로 형제적인 우의를 나누었다.

탄약반 부반장 김철수는 자기가 탄 새 세수수건을 신입대원 류귀에게 주었고 화식반 반장 리복림은 자기의 새 신을 신입대원 장규득에게 주었다. 그리고 간고한 행군길에서 신입대원들이 힘들어하고 불평을 할것 같으면 조선족장병들은 주동적으로 그들의 이불짐과 무기를 나누어 메주었으며 또 혁명노래를 배워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들도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 순조롭게 행군임무를 완수하여 상급으로부터 《단결전투모범패》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편 조선족장병을 많이 포함한 흑산-대호산의 영웅부대 47군은 고안(固安)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은 4야전군 선견부대가 남하한후 남겨진 신향과 안양의 적을 소멸할 임무를 맡았다. 47군은 궁지에 빠진 신향의 국민당군을 투항시키고 또 속전속결의 작전방법으로 안양을 해방하였다.

이와 같이 수개월간 부지런히 남하한 제4야전군 각 부대는 호북성경내에서 백숭희집단과 대치하면서 상급의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1949년 4월 20일, 남경국민당정부가 국공량당 대표단이 작성한 《국내평화협정》에 서명하지 않자 이날 저녁부터 중국인민해방군은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도강작전을 펼쳤다. 수백문의 대포가 울부짖었고 수천척의 나무배가 일제히 돛을 올리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제2야전군과 제3야전군은 신속히 강을 건너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선봉부대는 공격예봉을 직접 국민당정부의 수부인 남경에 돌려 4월 23일 남경을 해방하고 5월 3일에는 항주를 해방했으며 5월 22일과 27일에는 남창과 상해를 각기 해방했다. 이와 동시에 백숭희집단이 국민당 동부장강방어선을 돕지 못하도록 제4야전군도 작전을 개시했다. 선견병퇀 40군은 기타 후속부대와 함께 무한을 집중공격하였고 43군은 156사를 선두로 도강작전을 개시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156사는 원 동북민주련군 독립 6사로서 대부분 연변지역의 자제병으로 구성되였으며 특히 조선족 장병이 많았다. 156사 466퇀은 원 독립6사 16퇀이고 467퇀은 독립6사 17퇀이였으며 468퇀은 독립 6사 18퇀이였다. 466퇀은 2개 련과 2개 패가 한족부대이고 모두 조선족장병으로 구성되였으며 467퇀은 1영을 제외한 2영과 3영이 모두 조선족 장병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그리고 468퇀은 한족부대였지만 퇀경위련은 조선족장병들로 구성되였다. 조선족 로간부 지병학(池炳学)은 466퇀 부퇀장으로 있었고 최채는 466퇀 부정위 겸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혁명가 전우가 이 부대의 초기 정위를 맡았고 박근식이 467퇀 초대 퇀장이였다. 그러므로 156사의 근 3분의 2가 조선족장병들이였다.

항일로간부 최명세.

156사 466퇀 3영 교도원이였던 연길시의 항일간부 최명세로인은 2007년 여름 답사팀을 만났을 때 도하작전 경위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는 11월하순에 심양서북쪽에서 떠나 관내로 출발했습니다. 만리 장성을 넘어서 북경과 천진사이에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 사단이 43군에 포함되였습니다. 평진전역이 끝나고 49년 2월 27일에 남하행군을 시작하였는데 우리 156사가 선두에 섰습니다. 그리하여 직접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것이 단풍전투입니다. 장강이북에 도착한것은 아마 4월말일것입니다.

장강도강전투는 5월 14일에 시작했습니다. 먼저 단풍을 치고 15일 저녁에 단풍전투에서 로획한 배를 가지고 도강하였습니다. 선두부대 한개 패가 배 한척에 올라서 거기에 중기관총을 걸고 강을 건넜습니다. 우리 뒤를 이어 156사 주력부대와 43군이 모두 단풍으로부터 장강을 건너 남진했습니다. 그후 제2야전군이 남창을 해방한후 병력이 부족했기때문에 우리 156사가 남창에 가서 제2야전군을 교체해 남창수비임무를 맡았습니다. 남창에서 한동안 있다가 우리 영은 명령을 받고 파양호에 가서 경위임무를 수행했습니다.》

43군 도강작전의 선봉임무를 맡은 156사는 신속히 장강북안의 단풍진(团风镇)에 접근해 작전준비를 하고있었다.

호북성 황강시(黄冈市)에 속하는 단풍진은 무한과 약 50킬로메터 떨어진 옛 진으로서 장강의 물길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크게 굽이져 흐르고있었다. 단풍진대안은 적의 수비가 비교적 적은 산간지대였기에 아군의 도강작전에 아주 유리하였다. 156사 부사장 전우는 부대 선두공격임무를 맡은 466퇀을 찾아 직접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명령에 따라 466퇀은 단풍진 부두와 그 부근의 3개 거점을 점령하고 적을 소멸함과 동시에 적이 모아두었던 선박을 탈취하기로 했다.

1949년 5월 13일 저녁 466퇀 수천명 장병들은 감쪽같이 지정된 지점에 집결한후 신주(新洲)-단풍간 도로를 따라 달렸다. 저녁 10시 30분에 이들은 모두 공격출발지인 반석교(板石桥)에 모였다. 이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밝았다. 주공임무를 맡은 3영 장병들은 부두를 향해 접근하면서 두길로 나누어 부두 동쪽과 동북쪽의 1호, 2호 거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때 서쪽의 3호 거점으로 달려가던 1영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아군의 야간습격을 발견한 국민당군이 사격을 가했던것이다. 1호거점으로 달리던 9련은 강언제를 따라 적진에 접근한후 공격을 개시했다. 앞장서 달리던 9련 차춘모(车春模)련장은 뜻하지 않게 복부에 총탄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투를 지휘하다가 통신원 최창준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9련 1패 1반의 림수현 반장은 중기관총 화력의 엄호하에 적 보루에 접근한후 수류탄으로 보루를 폭파하였고 그 뒤를 따르던 전사 오창근은 련속 수류탄을 던져 달려나오는 적을 소멸했다. 공격개시 2분만에 1호 거점을 점령한 전사들은 부두의 선박을 전부 탈취하였다.

한편 퇀경위련은 수심이 1메터 되는 늪을 지나 적진에 접근한후 신속히 부두 동북쪽의 2호거점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부두서부에 위치한 3호 거점은 치렬한 쟁탈끝에 퇀 산포를 동원해 점령하였다. 5시간의 전투에서 466퇀 장병들은 적 487명을 소멸하고 단풍진을 해방했으며 68척의 대형선박을 로획하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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