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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70)-남창 위수임무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3-03-21 13:00:20 ] 클릭: [ ]

중국인민해방군 100만대군의 장강도하작전이 승리한후 해방군은 추풍에 락엽 쓸듯이 남경, 항주, 남창, 상해를 해방했을뿐만아니라 화중의 중요도시 무한 3진을 해방함으로써 압도적인 기세로 국민당 잔여세력을 몰아붙였다.

수만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제4야전군은 의창, 사시, 강릉 전투를 거쳐 백숭희집단을 호북경내에서 몰아내고 곧바로 호남경내로 밀고들어갔다. 급해난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사처로 다니며 난국을 수습하려 애를 썼다. 그는 호종남, 백숭희, 여한모, 송희렴의 세력을 리용해 어찌하나 사천을 중심으로 한 서남지역을 지켜내려 시도했으며 해방군의 남진을 막아보려 했다.

1949년 5월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전국을 향해 진군할데 관한 명령을 내렸다. 우선 제4야전군은 제2야전군의 일부와 함께 광서와 광동으로 진격해 백숭희집단을 섬멸한후 운남으로 진격하게 했다. 그리고 제2야전군 주력은 귀주로부터 사천성 동부와 남부를 공격하여 호종남집단의 퇴로를 막고 제1야전군 18병퇀은 진령산맥을 넘어 호종남집단을 추격해 사천분지에서 적의 주력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명령을 받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8월초부터 세길로 나누어 남진해 백숭희집단을 소멸하려 했다. 13병퇀 주력은 직접 광서 류주를 향해 진격함으로써 백숭희집단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고 12병퇀 주력은 형양(衡阳), 보경(宝庆) 지역에서 정면으로 적의 주력을 공격하기로 했으며 15병퇀은 곧바로 광동으로 진입하기로하였다.

한편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제4야전군에서는 40군의 153사를 무한에 남겨 경비임무를 맡게 하였고 43군의 156사를 남창에 파견해 남창과 강서성 경비임무를 맡게 하였다.

남창시 감강기슭의 등왕각.

남창시 팔일광장.

남창시를 순라하고있는 156사 장병들.

남창 팔일철교.

1949년 8월 11일, 팔일대교에서 찍은 기념사진(오른쪽 두번째 림만송영장).

조선족장병이 다수를 차지하는 156사는 1949년 6월 2일에 인민해방군의 탄생지인 남창시에 입성했다. 해방된지 얼마 안되는 남창시는 도처에 국민당 특무들이 잠복해있었고 공업생산이 파괴, 중단되였을뿐만아니라 상점, 가게들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있었다. 남창 경비임무를 맡은 156사 장병들은 우선 발전소, 수도국, 량식창고, 공장설비들을 확보하고 정상적인 운영을 회복한 다음 사회질서를 유지하기에 힘썼다.

도시 보다도 농촌의 상황은 더욱 간고하고 복잡하였다. 당시 국민당패잔병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각 부락에 무기를 팔았기때문에 많은 농촌의 지주세력이 무기를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해방군에 대항하였으며 또 부락과 부락간의 싸움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남창수비임무를 맡았던 156사 467퇀 2영 6련의 정관채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행군하여 강서성 남창에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백성들에게 총이 많았습니다. 왜냐하고 물으니깐 국민당이 팔았다는것이였습니다. 국민당 패잔병들이 총을 백성들에게 팔아치우고 달아났던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총을 가지게 되였고 부락과 부락이 막 싸우는 판국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16퇀은 남창시밖으로 나가 토비숙청을 하였고 우리 17퇀은 남창시내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18퇀은 어디로 갔던가? 아, 구강으로 갔습니다. 위수임무가 쉽지 않았는데 가장 큰 곤난이 말이 통하지 않는것이였습니다. 현지 토배기말을 우리가 알아들을수 없어 손짓발짓하면서 겨우 의사전달을 하군 했습니다.

다음은 얼마나 더운지, 고생이 막심했니다. 너무 더워 잠을 잘수 없어 고생했지요. 그리고 양자강의 홍수를 막는다고 동원해 물과 싸우던 일도 기업납니다. 남창시민들은 홍수방지에 온힘을 다하는 우리를 보고 많이 좋아했습니다. 참....그러다가 조선전쟁에 나갔지요. 그랬습니다. 아마 4월 26일경에 신의주에 도착했을겁니다.》

남창과 강서성의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156사 사단부에서는 남창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정안(靖安), 여간(余干), 무주(抚州) 등지에 4개 조선족영을 파견하였다. 후에는 466퇀과 467퇀 퇀부와 직속 경위부대까지 다 동원해 농촌에 보내 농촌정권건설을 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468퇀을 강서성의 중요한 도시인 구강에 파견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하지만 경비임무와 농촌정권건설임무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156사 각부대는 대부분 조선족장병으로 구성되였기 때문에 우선 언어소통부터 잘 되지 않았다. 표준 중국어도 잘 못하는 그들이 방언을 쓰는 현지인과 접촉하고 그들을 설득한다는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다음은 국민당 잔여세력과 무장한 부락세력이 수시로 아군 장병과 백성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게다가 6월부터 강서성은 우기에 들어서서 강물이 불어 많은 피해를 조성하고있었다. 156사 장병들은 남창시와 주변 큰강의 저수지 언제거나 강뚝을 확보하기 위해 밤낮 없이 싸웠으며 생명을 무릅쓰고 홍수속에서 백성들을 구해냈다. 동북으로부터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악전고투해온 강철의 대오인만큼 장병들은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 홍수를 전승하였으며 남창시와 주변 농촌 백성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였다.

남창시와 그 주변이 안정된후 156사 각 퇀은 각기 지방으로 내려가 사업하게 되였다. 466퇀 3영은 명령을 받고 남창시에서 약 100킬로메터 떨어진 매장(梅庄) 지역으로 떠났다. 그 부근의 여간현과 진현(进贤县)의 두 부락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서로 중기관총에 박격포까지 동원했다고 하였다.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려면 민간에 널린 무기부터 회수해야 했다.

466퇀 3영 교도원이였던 연길의 최명세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3영 장병들은 매장으로 가는길에서도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3영 600여명 장병들은 이틀간의 간고한 행군을 한후 배를 리용해 삼양(三阳)을 거쳐 매장진으로 가야 했다. 이 지역은 우리 나라 두번째로 큰 담수호인 파양호(鄱阳湖) 남부와 군산호(军山湖)가 잇닿은 곳으로서 호수와 섬이 많은 고장이였다. 장병들은 물이 많이 불고 파도가 거센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돛배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조속히 매장에 가서 부락무장을 해제해야만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도중에서 그들은 폭풍우를 만났다.

거세찬 파도와 폭풍우속에 질겁한 배사공은 돛을 내리고 배에 엎드려 련신 절만 할뿐 좀처럼 노를 저으려 하지 않았다. 배는 파도속에 맴돌았고 수시로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이때 머지 않은 곳의 작은 섬을 발견한 아군 장병들은 신속히 수영에 능한 전사들을 선정해 허리에 굵은 바줄을 매고 대안으로 헤염쳐가게 했다. 그들은 섬에 도착한후 바줄을 나무에 동지고 안깐힘을 다 써서 배를 당겨 고정시켜놓았기에 배 한척도 전복되지 않고 모두 무사할수 있었다.

사공들은 《해방군은 참 대단하다》고 치하하면서 기뻐하였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후 3영 장병들은 련을 단위로 흩어져 각기 부락투쟁이 심각한 진가장(陈家庄), 하가장(贺家庄), 뢰가장(雷家庄), 리가장(李家庄)을 포위하고 모든 무기를 바치라는 통고를 냈다. 하지만 통고의 제한 기일이 지났지만 부락사람들은 무기를 바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저항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군 장병들은 선전사업을 강화하고 애민사업을 전개하는것으로부터 착수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먼저 문화수준이 높은 전사들을 선정해 애민공작대를 조직하고 마을 빈곤한 농민들의 농사일을 돕고 부업을 돕게 하면서 지방말을 배우도록하였다.

워낙 벼농사에 숙달한 조선족장병들은 훌륭한 일솜씨로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친숙하게 지내게 되였다. 그리고 물고기잡이와 석재캐기도 부지런히하여 현지인들을 도와주었다. 이렇게 두달이 지나자 현지인들도 해방군과 접근하기 시작했으며 주동적으로 찾아와 마을상황을 이야기해주군 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 전사들은 그들에게 신문을 읽게 하고 정책교육을 진행하였다.

466퇀 3영 조선족장병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9월의 어느날 밤, 하가장에 주둔하고있던 9련 전사들이 야간보초를 서다가 배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려는 수상한 청년 셋을 붙잡았다. 소문이 퍼지자 현지 농민들이 찾아와 세 청년의 신분을 확인하였다. 하나는 지주집 셋째 아들이였고 다른 두 청년은 일반 농민의 자제였는데 이들은 부락의 무기를 감추어둔 자들이였다. 이들은 외지에 숨어있다가 마을 상황을 알아보고저 가만히 잠입했다가 떠나려던중 우리군 보초병에서 발각되였던것이다.

영부에서는 이들을 심문하기 시작하였고 당의 정책을 적극 선전하였다. 마을 농민들도 찾아와 이들을 설득하면서 해방군의 좋은 점을 많이 이야기했다. 이렇게 되자 사흘만에 세 청년은 무덤으로 위장한 곳에 숨겨두었던 무기를 파내 해방군에게 바쳤다. 그리고 지주집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다른 곳에 숨겨놓았던 무기도 모두 바치게 하였다.

최명세로인이 당시 무기를 회수하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우리 퇀은 남창에서 갈라졌는데 한족장병들이 많은 1영이 구강으로 가구 우리 2영과 3영이 남창시를 지켰습니다. 도시 질서가 회복되고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고 상점들도 문을 열자 우리는 다시 남창시 주변 농촌으로 나갔습니다. 농촌의 씨족 무장이 살벌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촌에 가서 무기를 거두어들였는데 처음엔 잘 되지 않았습니다.

파양호에서 물고기를 잡는 여러 부락들은 무기를 가지게 되자 서로 자기 구역이라고 싸우게 되였습니다. 처음에는 욕하고 주먹질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에는 중기관총에 박격포까지 쏘면서 싸웠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공산당과 공산당부대를 잘 모르고있었기에 백성들도 우리를 돕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각 부락에 전사들을 보내 벼농사를 돕게 했습니다. 우리는 벼농사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곧 백성들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전사들은 모두 왕청, 연길, 룡정, 화룡에서 모인 조선족청년들이니 농사도 잘했습니다.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되자 일부 농민들이 찾아와 지주들이 무기를 감추어둔 곳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얼마 안되여 민간에 널린 무기들을 전부 거두어들이고 평화를 찾게 했습니다.》

하가장 부락무장을 전부 회수한후 3영 장병들은 무기들을 하가장과 대립되여있던 진가장에 가져다 전시하면서 무기를 내놓을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당의 정책과 해방군의 좋은 점을 안 진가장의 농민들과 교원, 개명인사들이 적극 설득했기에 이곳에서도 무기를 순조롭게 회수할수 있었다.

서로 이웃해있으면서 다년간 대립하고 싸워왔던 하가장과 진가장이 모두 무기를 바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 기타 마을에서도 감추어두었던 무기를 모두 내놓았다. 그리하여 아군 장병들은 훌륭하게 농촌지방무장을 해제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현지 백성들과도 깊은 정을 맺게 되였다.

156사 466퇀 2영 장병들의 남창 진주 기념사진.

156사는 이와 같이 언어소통에 저애가 있었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 현지인들과 친숙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의 신뢰를 받게 되였고 경비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게 되였다. 이는 156사가 강서경내에 숨어있던 국민당 특무와 잔여세력을 깨끗이 숙청하고 평화롭게 공화국 창건을 맞이하는데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였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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