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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73)—대용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4-02 12:49:04 ] 클릭: [ ]

1949년 10월,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대부분 병력이 국민당 백숭희집단과 치렬한 형양-보경전역을 치르고있을 때 4야전군의 47군은 호남성서부로 진격하였다. 형양-보경전역의 아군 우익을 담보하는 한편 사천성을 공격하려는 제2야전군과 협동하는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호북성 의창과 사시전투가 있은 후 47군은 호남성경내의 석문현(石门县)에서 공화국의 창건을 맞이한 후 호남성 서북부의 상덕(常德)과 자리(慈利县)현에 집결해있었다.

상덕과 자리현 동북부에는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담수호인 동정호가 있고 서부에는 중국의 유명한 풍경구인 장가계(张家界)가 있다.장가계는 귀부신공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산과 물을 가지고있어 세인의 발길을 모으고있는 곳이다. 이곳 산들은 붓대처럼 곧추 하늘높이 치솟아있으며 수천수만의 산봉은 각이한 조형을 이루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있다. 그리고 산과 산 사이로는 수천갈래의 계곡이 흐르고있는데 그 물이 맑고 물살이 급한것으로 소문이 높다. 게다가 이곳 날씨는 늘 안개가 자욱해 장가계 산수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해주고있다.

가릉강

의창시 기념관의 렬사명록,박씨,김씨 성을 가진 부분적 렬사도 있음.

장가계시(옛 대용현)

장가계의 옛 지명은 대용현(大庸县)이였다.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1994년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대용시로 확대된 대용현을 다시 장가계시로 공식 명명하였다. 하지만 해방전쟁이 채 끝나지 않았던 1949년말과 1950년 상반기, 대용현은 산수가 아름다워 유명한것이 아니라 토비가 많아 악명이 높았다. 의창에서 패퇴한 국민당 송희렴의 패잔병과 현지 토비들이 산세가 험하고 숲이 깊은 지형을 리용해 곳곳에 잠복해있으면서 수시로 나타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해쳤으며 때로는 준비없는 해방군을 불의로 습격하기도 했던것이다.

의창사시 전투가 끝난 후 송희렴 패잔병 122군의 세개 사단이 대용현에 주둔하고있었다. 122군 군부와 217사 사단부는 대용성에 설치되여있었고 기타 부대는 그 주변에 포진해있었다. 국민당군은 대용성을 병풍처럼 둘러있는 산과 풍수(灃水)라는 강을 천연장벽으로 간주했고 현성주변에 높은 담을 쌓고 많은 보루를 축성해놓았다.

1949년 10월, 47군은 대용현을 공격, 점령함으로써 호남과 사천으로 통하는 길목을 확보하여 제2야전군의 본격적인 사천진입작전에 유리한 조건을 창조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였다. 명령에 따라 47군 139사는 자리현에서 풍수를 따라 정면으로 대용을 공격하기로 하고 141사는 석문으로 출발해 구계(九溪), 상식(桑植)방향으로 공격함으로써 송희렴군의 대용지원을 막고 대용의 적이 사천이나 귀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949년 10월 15일 새벽 각 부대는 자욱한 안개를 리용해 신속히 지정된 목표를 향해 일제히 진격하였다. 139사 416퇀과 417퇀 장병들은 계구진(溪口镇)부근에서 두시간의 격전을 거쳐 국민당 345사 35퇀을 물리쳤다. 오후에 이르러 139사 주력은 대용과 십여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다.

139사 지휘부에서는 국민당군이 크게 저항하지 않고 도주하기에 급급한 상황으로부터 미루어보아 대용현의 국민당군 주력도 감쪽같이 도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독안의 든 쥐를 놓쳐버린다는것은 군인에게 있어서 패배와 다름없는 치욕이였다. 지휘부에서는 417퇀에 원 계획을 바꾸어 지름길로 곧장 진격해 적이 도주하기전에 퇴로를 차단할것을 명령하였다.

417퇀 장병들은 명령에 따라 기암괴석과 작은 관목나무들이 뒤덮인 산을 타고 간고하게 전진하였다. 두시간 남짓이 걸어 부대는 대용현 동부에 도착한 후 감쪽같이 풍수를 건너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416퇀도 이미 지정된 곳으로부터 대용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기타 부대도 대용현에 대한 철통같은 포위를 마무리하고있었다.

흑산저격전에서 명성을 떨쳤던 강철8련의 조선족장병들은 박영선련장의 지휘하에 장가요(张家瑶)에서 단번에 170여명 적군을 생포하고 가장 먼저 대용현의 자오대산(子午台山)을 점령하고 적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단단히 통제하였다. 위치가 높은 이곳에서는 대용성을 손금보듯 환히 내려다 볼수 있었기때문에 대포를 걸어놓으면 적이 나오지 못하도록 잘 통제할수있었던것이다.

8련의 반장 리두섭은 기타 아군주력이 도착하자 자오대산 진지를 넘겨주고 전사들을 거느리고 신속히  적의 지휘부가 위치한 대용중학교로 달려갔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국민당 병졸들을 제치고 그냥 총소리가 요란한 쪽으로 달려갔다. 리두섭은 어둠속에서 포로를 잡고 대용중학교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뒤 신속히 거리를 지나 대용중학교 2층 건물에 접근하였다. 학교건물 창구로는 눈먼 국민당군의 기관총사격이 요란하였다.

리두섭은 전사 백득현과 함께 남먼저 문을 박차고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에서 달려오는 적 몇놈을 쏘아눕히자 기타 놈들은 모두 손을 들고 투항하였다. 그는 포로를 백득현에게 넘기고 신속히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달려갔다. 그는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요란한 교실문을 박차고 들어가 뒤에서 적 기관총수를 쏘아눕히고 《꼼짝말앗!》하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질겁한 놈들은 모두 손을 들고 돌아섰다. 리두섭은 총끝으로 한쪽구석에 모이라고 포로들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땅!》하는 총소리가 울리면서 리두섭은 가슴에 련속 총 세방을 맞았다. 다른 교실에서 군관 한놈이 권총을 겨누고 문어구에 섰던 리두섭에게 총을 쏘았던것이다. 리두섭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총을 쏜 적군관을 쏘아눕히고 다시 교실안의 포로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꼼짝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총에 맞은 그는 몸을 지탱할수 없어 금방 쓰러질것만 같았고 콩알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슴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피줄기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 모아 벽에 붙어서서 계속 포로들을 지키고있었다.

2층의 총소리를 듣고 전사 백득현도 달려왔다. 그는 급히 리두섭을 도와 포로들의 무기를 회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보낸 후 리두섭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리두섭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채 이미 눈을 감아버렸다.

한편 139사의 기타 부대들도 신속히 국민당군 사단부를 제거하고 허겁지겁 도주하는 적군을 하나하나 생포하고있는중이였다. 대용현 해방전투는 날 밝기전에 승리적으로 끝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개 자욱한  대용부근의 지형

대용의 고적들

2009년 2월 《영원한 기념비》취재팀은 47군 조선족장병들의 전투적로정을 따라 대용현에 찾아갔다. 지금의 장가계시이다. 강남이라 하여도 구질구질 내리는 비와 짙은 안개속에 잠긴 장가계시는 마냥 춥기만 하였다.

당시 국민당군 사단지휘부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장가계시인민무력부자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낡은 건물이 사라지고 반듯한 새 건물이 있을뿐이였다. 건물앞 운동장에서는 몇몇 젊은 군인들이 롱구경기를 하고있었다.  현지 당사연구일군인 담종옥(覃仲玉)로인은 기자들을 기꺼이 맞아주면서 대용해방전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국민당군 군부가 설치되였던 문묘는 49년 당시 유교의 공자님을 모시는 곳이였습니다. 지금과는 다릅니다. 문도 이곳으로 들어오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곁에 중학교가 있었습니다. 국민당군 122군 군장 장소훈은 문묘에서 기거하고 사령부 지휘일군과 경위병들은 중학교에 있었습니다.》

《해방군은 먼저 대용현의 가장 위치가 높은 자오대산을 점령하고 그곳으로부터 적을 통제하여 꼼짝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문으로 공격해 문묘와 중학교를 점령하였습니다. 국민당 장소훈군장은 병사들에게 투항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일부는 계속 저항하다가 전부 소멸되였습니다. 전투에서 조선족전사들도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여기가 바로 자오대산입니다. 대용성은 산으로 둘러있습니다. 이곳은 렬사탑입니다. 조선족전사가 희생된 후 대용인민들은 그들을 릉원에 모셨습니다.》

대용의 렬사릉원은 아주 방대하였고 산기슭을 따라 축조되여있었다. 산중턱에는 키높은 혁명렬사기념탑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리고 릉원정자에는 커다란 돌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대용해방전투와 상서에서 희생된 해방군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촘촘히 새겨진 수천명 렬사명단가운데는 김씨, 박씨, 최씨를 가진 렬사이름도 많았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렬사들도 많았다.

기념탑과 정자를 지나 산뒤편쪽으로 가면 길게 배렬된 렬사묘소들이 있었다. 묘소는 돌로 만든 비석과 담으로 단단히 다져져있었다. 그가운데서 우리는 《리두섭렬사지묘》를 발견하게 되였다. 렬사의 략력은 없었기때문에 현지 사학자들도 리두섭렬사에 대해 자상히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대용해방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것만으로도 우리의 렬사는 현지 인민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여있었다.

연변의 사학자와 《강철8련》전우들의 회억에서 우리는 리두섭렬사에 대해 알게 되였다. 그는 1928년 조선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태여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흑룡강성 오상에 이주해 살던 그는 1945년 10월에 마을을 지키기 위해 오상현 대대에 입대하였다가 기타 전우들과 함께 팔로군 359려에 편입되였다.

이 부대가 바로 흑산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던 10종대 28사 83퇀 3영의 《강철8련》이였다. 그후 리두섭은 백룡산전투, 흑산전투, 의창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공을 세웠고 대용성해방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대용해방전투가 있은 후 47군 139사 당위원회에서는 리두섭에게 대공 3차를 기입해주고 전투영웅칭호를 추인했으며 모택동메달을 추수하였다.

렬사릉원으로 오르는 계단

키높은 렬사기념탑

렬사기념탑의 부조

조선족렬사 리두섭의 묘소를 가리키는 현지 당사일군

대용현 옛거리

《천하명승》을 자랑하는 중국의 장가계, 바로 이곳을 해방하기 위해 47군의 수많은 조선족장병들이 용감히 싸웠던것이다.대용인민들은 대용을 해방하기 위해 희생된 렬사들을 잊지 않고 정중히 모시고있다. 리두섭렬사는 먼 타지에서 희생되였지만 우리는 더욱 그를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장가계에 가면 명승지에만 도취되지 말고 이 아름다운 고장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많은 렬사들이 희생되여 이곳에 묻혀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며 이곳은 옛날 대용현이라는 곳으로 우리 민족 장병들이 해방한 곳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리두섭과 같은 렬사들을 가진것으로 하여 자랑스러워 해야 할것이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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