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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53] 새중국 첫 집단농장 세운 조선족 김백산

편집/기자: [ 량은실견습기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3 14:22:08 ] 클릭: [ ]

김백산, 조선족, 1920년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여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온 그는 10세부터 형님과 함께 길림성 화룡현 황진리툰,투도구일대와 액목현 옥산툰, 북대양툰 등 지역에서 잡일을 하는 한편 일본개척단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이 승리하자 군중들은 김백산을 자위대장으로 선발하였다. 1947년에는 돈화시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여 토지개혁운동을 이끌게 된다.

1948년초, 합강성에서는 수리농장(농장전신은 일본침략자들이 중국의 자원을 략탈하기 위해 화천현 경내에 건설했던 수리관개소)을 건설하고 연길, 림구, 발리, 밀산 등 지역에서 벼농사에 경험이 있는 조선족농가들을 동원해 황무지를 일구도록 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김백산선생은 1948년 봄, 돈화시의 80여세대 조선족농가들을 이끌어 령당맥하하류의 황량한 벌판에 집을 짓고 정착시킨 동시에 수리농장3농장을 설립했다. 자원의 원칙하에 김백산과 신자성은 5세대 농민들로 제5경작조를 조직하고 김백산은 조장 겸 제3농장의 생산위원을 맡았다.

이해 그들은 심각한 병충해를 이겨내고 농사에서 좋은 수확을 거두었다. 제5경작조는 무당 392근의 벼를 수확했고 재해를 입지 않은 밭은 무당 수확량이 460근을 넘어 년말에는 《김백산모범경작조》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에 이르러 제5경작조는 5호로부터 36호로 늘어났다. 소조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것을 감안한 김백산은 소조원들과의 연구끝에 쏘련의 모식대로 집단농장을 설립할것을 결정함과 아울러 상급지도기관의 허가도 받았다.

1951년 2월 21일, 성화집단농장설립대회가 삼장학교에서 진행되였다. 김백산은 농장주석으로, 리재근은 당지부서기 겸 농장부주석으로 당선되였고 김백산의 안해 김채금은 부녀주임으로 당선되였으며 대회에서는 농장규약을 랑독했다. 성화집단농장이 곧 새 중국의 첫 집단농장이였다.

성화농장이 설립된후 농장에서는 관개구의 합리적인 분포를 고려해 성화농장을 전록촌 동쪽(지금의 건국향 홍기촌 동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51년 3월, 눈이 녹기도전에 김백산은 리재근과 함께 전체 농장원들을 이끌고 농장건설에 뛰여들었다. 과로로 김백산선생은 엄중한 흉막염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업을 견지했다.

집을 지을 때 대량의 진흙이 필요했는데 인력으로 흙을 이기는것은 힘이 들뿐만아니라 속도도 느렸다. 김백산선생은 큰 못을 수축하고 물을 채운다음 소더러 진흙을 이기게 해 속도도 빨렸고 인력도 절약했다. 그 과정에 수레바퀴가 진흙속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수레바퀴를 나무발구바퀴로 바꾸는 방법을 내놓아 황무지개간속도와 로동효률을 높였다.

새 농장의 초토구조의 주택은 북경의 건물을 모방해 지었는데 구조가 새롭고 소박하며 우아했다. 곧게 뻗은 거리도 넓고 깨끗했다. 농장앞에 만든 화단에는 꽃들이 만발했다. 집집마다 방 두칸으로 주방 하나, 거실 하나씩 달린 구조였고 전등과 유선방송도 설치해주었다. 또한 집집마다에 철도관으로 우물물을 수송해 조선족녀성들이 다시는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다니지 않도록 했다.

성화농장은 농업선진기술의 보급과 응용을 무척 중시했다. 1951년에는 벼희식산종의 전통적인 작법을 솔선적으로 페지하고 줄을 맞추어 밀식하는 재배법을 대담히 실행해 대면적의 높은 생산량을 실현, 무당 593근을 생산함으로써 전해보다 39%이상 증산했다. 이건 당시 전 성적으로 최고기록을 창조한것으로 그로 하여 국무원의 표창도 받았다. 1952년에는 마라파종기로 벼한직파법을 보급했는데 성공을 이루었다.

1953년 김백산은 로농 리중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흙에 버무린 벼파종》을 실시하였는데 그것도 성공하였다. 이는 벼한직파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는바 지금까지도 그 작법대로 하고있다. 김백산은 리재근의 량종번식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일본에서 《석수백모》라는 벼원종을 인입한후 해마다 선종하여 당지 성장특점에 맞는 새 품종 《성화백모》를 배육해냈다. 그는 처음으로 벼원전화경작방법을 실현했고 벼원전화관리의 기초를 닦았다.

김백산선생은 기계화생산을 아주 중시했다. 농장 설립후 그는 전력탈곡기를 설치하고 선반, 전기용접기, 제초기, 파종기, 쟁기 등 설비를 구매해 경작, 탈곡, 김매기, 정미 등 작업에서 기본상 기계화를 실현해 기타 촌보다 앞서갔다.

군중문화생활도 뚜렷한 변화를 가져왔다. 농장을 설립하자 야학교를 꾸려 문맹을 퇴치하는 사업을 완수했다. 농장에서는 대량의 신문, 도서, 화보를 구매하여 군중들이 열람할수 있게 했다.

몇년간의 발전끝에 1960년에 이르러 성화농장은 초기의 36가구에서 209가구로 발전했고 토지는 1426무에서 7920무로 늘어났다. 또한 량식도 온당하게 증산했으며 각항 사업도 륭성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였다.

3년자연재해시기 김백산선생은 사원들을 거느리고 풀을 베고 가목사항무국에 가서 배를 만들며 힘든 이 시기를 헤쳐나갔다. 성화대대의 경제가 막 회복되고 각항 사업이 새로 시작되던 시기인 1962년 6월 27일 김백산선생은 향년 42세의 나이로 불행하게도 약물중독으로 가목사에서 세상을 떴다.

김백산선생은 생산관계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새 중국의 4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의 력사단계를 거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시기 그는 당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사회주의건설사업을 위해 큰 공헌을 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벼재배전문가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제2기,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여러차례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여러번 성과 전국의 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참고문헌: 흑룡강소식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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