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겨레홍군8]최음파 소속 홍군학교 찾아내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5-13 11:10:38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 (8)

리 함

1

1932년 5월 1일,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로농홍군 동로군 부대에서는 복건 장주의 중산공원에서 만여명의 군민들이 참가한 “홍군 장주공략 승리 군민경축대회”를 가지고 밤에는 계속하여 “만인군민련환대회”를 성황리에 펼쳤다. 무대아래는 관중으로 나타난 모택동, 림표, 섭영진, 라영환 등 홍군지도자들과 인산인해를 이룬 홍군장병들, 장주 각계 대표들, 시민군중들이고 무대우는 꼭두각시극을 흥나게 노는 당지 장주 예술인들과 중앙혁명근거지 홍군학교 8.1극단 문예일군들이다.

홍군학교 8.1극단 하면 조선인 최음파를 빠뜨릴수가 없다. 중앙혁명근거지 군민들로부터 “홍군음악가”, “우리의 바이올린수”로 불리우는 최음파는 5월 1일 이날 자기의 절친한 조선인 친구이고 홍군비행사인 진덕근이 “맑스”호 비행기를 몰고 장주하늘에 올랐고 자기는 “만인군민련환대회” 무대에 오르니 신나기만 하다.

흥겨운 장주무대에서는 성수난 8.1극단의 어린이들이 “해군무”와 민서산가(闽西山歌) “쪽진 머리 자르고 홍군이 되네”(剪掉髻子当红军)를 부르며 돌아가고 장주에 머무르던 대만 출신 “시씨네 네 자매”(施家四姐妹)들과 남양 귀국화교들은 “대만초군무”(台湾草裙舞),마술 “항일전선지원”(抗日支前) 등으로 열띤 종목들을 이어간다. 이어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와 가무 공연이 펼쳐진다. 박수소리, 구호소리 천지를 진감한다. 장주력사가 시작되여 이같이 혁명군민들로 들끓는 장관이 언제 있었던가.

서금시 도심에 자리한 네채로 된 홍군학교 옛 건물(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이로부터 보면 1932년 4월의 복건 장주전역과 장주전역승리 기념활동들에는 조선인들인 정강산 중대장, 대대장으로 불리운 진룡학과 홍군비행사 진덕근, 홍군음악가 최음파 등 세 홍군장병들이 참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들중 진룡학과 진덕근은 이미 앞에서 소개되였다면 최음파는 누구일가. 본문은 최음파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먼저 1931년 11월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에 홍군학교가 세워지자 선참 홍군학교 문화교원으로 활동한 서금의 홍군학교를 찾아보기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땅의 우리 겨레는 최음파 소속 홍군학교가 서금 어디인가를 모르고있었다. 한데서 여름방학 기간인 2013년 8월 겨레 홍군장병들 발자취를 좇아 강서 정강산-서금 등지 현지답사길에 오를 때 주요과업의 하나로 당년 홍군학교 옛터 찾기로 잡아보았다. 필자는 부분 자료의 주장에 따라 중앙혁명근거지 서금 엽평의 1차 쏘베트대회 개최지—사씨사당(谢氏祠堂)을 홍군학교 자리로 알고있었지만 엽평 혁명사적지의 강사들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 서금 사주패로 옮겨가기전 홍군학교 옛터는 어디란 말인가?)

2013년 8월 30일 엽평 혁명사적지를 두번째로 찾았을 때 현지 강사들과 물으니 력사연구가들이 아닌 강사들은 잘 모르고있었다.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것 같았다. 별수없이 혁명사적지 책매대에서 중앙혁명근거지 관련 연구서들을 사가지고 돌아섰더니 “홍색기억”이란 중앙쏘베트구역 이야기집 제1책에서 홍군학교 자리를 서금성내 부자묘뒤 양씨사당(瑞金城内夫子庙后杨氏祠堂)이라고 밝히고있었다.

2

이 단서에 따라 찾고찾으니 양씨사당은 서금성내 중심광장 서남켠에 위치한 옛 건축물로 필자앞에 나타났다. 제대로 말하면 서금시 중부를 이루는 상호진 상양주민위원회(象湖镇上阳居委会) 구내로서 기세가 웅장한 네채의 거대한 사당이 련이어 일어서 가관을 이루고있었다. 동북으로 자리하고 서남향으로 앉은 양씨사당은 전체 면적만 해도 3056.73평방메터나 되는 나무와 벽돌구조 건물체로서 홍군학교로 불리우는 중앙혁명근거지 중앙군사정치학교가 들어선것은 1932년 여름의 일로 알려진다.

양씨사당이라고 밝히고 주체사당을 이루는 홍군학교 유적지의 첫채 사당은 중국로농학교 총부로 나타난다. 총부 대문밖은 높이 2메터나 되는 담장이 일어서고 두마리의 돌사자가 포진하고있어 신비하고 엄엄한 기분을 안기지만 대문을 넘어서서 양씨사당으로 다가가면 내리드린 “중국로농홍군학교” 간판과 “중국로농홍군학교총부” 붉은 소개판, 왼쪽 높은 담장의 중국로농홍군학교 소개가 맞아주어 친절한 기분속에 젖어들게 한다.

중국로농홍군학교 총부로 된 양씨사당에 들어서면 숱한 나무기둥을 이루며 일떠선 옛 사당이 펼쳐지며 그속에서 삼삼오오 모여 마작을 놀거나 트럼프를 치는 로인들이 인상적이다. 그제날의 홍군학교는 오늘날 당지 로인들이 모여 즐기는 오락장소로 되여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당의 왼쪽벽에는 몽타쥬(剪影)를 이룬 홍군학교의 색바랜 이모저모 옛 사진들과 문자설명들이 걸려있어 여기가 홍군음악가 최음파 소속 홍군학교임을 알려준다.

홍군학교 총부 건물안은 당지 사람들의 휴식터로 쓰이고있다(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양씨사당의 두번째채와 세번째채는 “시성태사”(时省太祠) - “맹주태사”(孟舟太祠)로 알려지는 홍군학교 정치부 건물과 교무부 건물이지만 입구 대문이 굳게 잠겨져있어 안을 들여다 볼수조차도 없다. 양씨사당의 네번째채는 “시태종사”(时泰宗祠)로 알려지는 홍군학교 교도부 건물로 나타나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지금은 서금시미술가협회, 홍군학교미술관, 서금서원 극본창작기지, 서금 박아(博雅)예술관 등이 공동으로 빌어쓰는 미술관으로 되여있고 건물내 기둥들과 천정들을 정히 붉은 칠을 하고 수건도 말끔히 하였지만 당년에 홍군학교 교원들의 사무실과 주숙지로 쓰이였음은 엄연한 사실이렷다.

홍군학교 교도부 바로 오른쪽 옆칸이 2층으로 된 홍군학교 교장들 사무실과 교직원 숙사였음이 더욱 그러하다. 여기의 칸칸마다 민가를 이루어 시골마을을 련상시키지만 2층으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밟으며 아래우를 오르내리노라면 홍군학교 교원들, 그속에 섞인 홍군음악가 최음파의 숨결소리 들리는듯싶고 어디에선가 막 달려나올것만 같다.

이곳 서금 양씨사당 관련자료에 따르면, 양씨사당은 명나라 만력무신(明万历戊申) 년간인 1608년에 양씨들간의 화목과 우애를 위해 지어진 옛 건축물로서 네채의 건축물 실내와 천정 모두가 아름드리 나무기둥들과 견고한 나무들로 정제하게 지어져 4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이그러짐 하나 없이 세인들 앞에 위풍당당히 나타난다. 양씨사당앞은 또 수양버들 늘어진 길고 널다란 늪이다. 그러던 이 옛 양씨사당이 지난 20세기 80년대 중엽에 이르러 준엄한 현실문제에 직면하게 되였다.

3

1986년 청명을 맞아 서금 양씨종족리사회(杨氏宗族理事会) 성원들이 이곳 사당에 모였는데 누군가 양씨사당을 허물어 부동산개발로 한다는 소문을 꺼냈다. 뜻하지 않은 소문으로 의론이 분분할 때 이들 양씨대가문의 양가주(杨家珠)로인이 여기를 혁명유적지로 만들면 사당을 보호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양씨대가문의 양가화장군이 일찍 중앙혁명근거지 시절에 이곳 사당의 홍군학교에서 학습했다고 말한적이 있다고 터놓았다. 또 한 사람은 이 사당이 그 시절 현쏘베트대표대회 회의장이였다고 회고하였다. 이에 희망을 보아낸 양씨들은 힘을 합쳐 관련자료를 수집하며 《홍군학교춘추》(红校春秋)란 책을 써냈는가 하면 복건 복주군구의 양가화장군을 방문하며 홍군학교 분포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이들 양씨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8년에 그 시절의 서금현인민정부는 양씨사당을 “중국로농홍군학교총부유적지”(中国工农红军学校总部旧址)로 정식 비준하였다. 그 이듬해 1999년에는 총부를 이루는 사당부터 나머지 세채의 사당을 홍군학교 정치부, 교도부, 교무부로 차례로 붉은 패쪽을 걸며 보호조치를 대였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양씨사당은 이들 양씨종족을 위해 봉사하던데로부터 일약 승화하여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궤도에로 들어섰다. 홍군학교란 이 홍색력사는 옛 양씨사당에 새로운 생기와 생존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홍군학교 건너편 민가 층집에서 내려다보니 수건중인 북쪽켠 홍군학교 구락부가 보인다(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이미 앞의 련재글에서 밝혀보았지만 1931년 11월, 강서 서금에서 열린 중화쏘베트 제1차 대회에서 산생한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정규적인 첫 홍군학교-중앙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이해 11월 25일에 소경광(肖劲光)과 등평(邓萍)등을 교장과 교육장 등으로 임명하였다. 중앙군사정치학교는 홍군의 련과 패 간부를 양성하는 종합성 학교로서 11월 하순부터 제1기 학원들을 모집한 뒤 보병과, 정치과, 특과(特科,기관총-포병-공병 등 특종련을 포함) 등 3개 과로 나누어 교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2009년 7월 서금을 처음 현지답사할 때 필자는 홍군학교 옛터를 찾아내지 못하고 일부 자료의 주장대로 중화쏘베트 1차 대회 개최지-엽평 사씨사당을 홍군학교 자리로 보았었다.

2013년 8월의 두번째 서금 현지답사에 의하면 중앙혁명근거지 홍군학교는 처음 엽평의 사씨사당이 아닌 서금 성남(瑞金城南)의 천후궁(天后宫)에 자리잡았다는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중화쏘베트공화국 주석 모택동이 홍군학교에서 《쏘베트운동사》를 강의하고 홍군총사령 주덕이 《유격전술》을 강의하였다. 1931년 12월말에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 주은래는 상해로부터 서금에 와서 홍군학교의 군사표현을 본후 기쁜 나머지 대리교장 하장공(何长工)과 이렇게 말했다.

“이 학교는 국공합작시기의 황포보다 더 잘 꾸리고있습니다. 홍군에 이런 학교가 있기에 우리의 허리는 더 굵고 더 단단하게 되였습니다.”

4

과연 그러했다. 중앙혁명근거지의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중앙군사정치학교의 규모는 갈수록 커져 서금 성남의 원래의 천후궁 학교교사로는 판판 부족이였다. 한데서 1932년 2월경 중앙군사정치학교는 널직하게 트인 서금성 중부의 양씨사당으로 옮겨앉고 학교이름도 “중국로농홍군학교”로 바꾸었다. 교장은 선후로 하장공, 엽검영, 류백승이 맡고 학과도 원래의 보병과, 정치과, 특과로부터 퇀정위훈련반, 상급간부대(上级干部队), 사호대(司号队), 측량반 등으로 늘어났으며 학생양성방향도 홍군의 중고급 군정간부 양성으로 잡고 홍색 수도 서금의 위수과업도 맡아나섰다.

그럼 서금 홍군학교의 설립과 함께 홍군학교 문화교원으로 배치된 우리 겨레 홍군음악가 최음파는 어떠했을가. 당년의 홍군학교는 양씨사당으로 옮긴후 훈련부에 군사교원 70여명에 정치교원 30여명, 문화교원 10여명을 두었는데 최음파는 10여명 문화교원중의 한 사람이였다. 홍군학교에는 또 학교 정치부주임이 직접 지도하는 구락부가 조직되고 구락부 산하에 문화, 체육, 연극(戏剧) 등 관리위원회를 두었는데 최음파는 연극관리위원회의 주요성원으로 매주 한차례 가지는 학교의 문예야회와 연극공연의 주력으로 뛰였다. 연극중의 편곡과 바이올린 연주 등이 의례 최음파의 몫이라는건 중앙혁명근거지 군민들이 익히 아는 일이였다.

인젠 떠날 때도 된것 같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올가. 그러노라니 차마 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최음파가 활동한 홍군학교 구락부 옛터를 확연히 보아내지 못한데서 더욱 그러하다. 양씨사당의 네번째채-“시태종사”(时泰宗祠)가 홍군학교 교도부 옛터와 “구락부”라지만 구락부로서의 믿음이 잘 가질 않는다. 아마도 서금땅을 다시 한번 밟으라고 부르는것만 같다. 과연 서금땅 홍군학교 옛터를 다시 현지답사할 기회는 종시 오고야말았다.

홍군학교 구락부 정면 입구 모습(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2015년 8월 25일 오전 10시, 고속철역 소흥북역에서 상해-룡암행 고속철에 올랐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다큐팀 팀장 김광현을 비롯한 연변의 세 기자를 안내하여 복건 영안과 장정, 강서 서금 현지답사길에 올랐던것이다. 세번째로 서금을 찾은것은 8월 27일, 서금시 상호진 상양주민위원회 구내에 자리잡은 홍군학교 옛터는 여전하지만 홍군학교 기본으로 되는 네채의 거대한 사당은 한창 수건중에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2년전 2013년 8월 30일 이곳 홍군학교 옛터를 처음 찾았을 때 거두지 않은 네채의 사당은 스산하게 안겨지더니만 항일전쟁승리 70돐에 제하여 그제날 홍군학교는 드디여 크나큰 중시를 받으며 새 모습을 갖춰가고있었다. 기분이 둥둥 뜬 우리는 네채의 홍군학교 사당 전체를 한 시선속에 담으려고 학교앞 늪을 에돌아 홍군학교 맞은편 층집에 올랐다. 우리의 시야에는 네채의 사당 바로 북쪽 밖으로 수건중에 있는 또 한채의 사당이 비껴들었다.

민가로 된 층집을 내린후 다큐팀 촬영사로 나선 젊은 친구 림광호씨와 함께 다섯번째 건물로 된 사당을 찾으니 옛날 홍군학교 구락부 건물이였다. 우리의 홍군음악가 최음파가 활동하였던 그 구락부 말이다. 홍군학교 구락부 건물은 다른 네채의 사당에 비하여 낡음도와 파괴도가 심하여 건물골격외 거의 전부를 털어내고있었지만 그리도 뜨거이, 그리도 감명깊게 다가설수가 없다.

홍군학교 구락부 옛터를 그예 찾아내고야말았다. 그때의 그 기쁜 심정은 한량없다. 당년 중앙혁명근거지 문예활동의 중심을 이룬 홍군학교 구락부는 우리의 카메라와 텔레비촬영에 고스란히 담겼다. 홍군음악가 최음파의 형상이 보다 마음에 깃을 내린다.

림광호촬영사가 헐망한 홍군학교 구락부 옛터에 이르러 텔레비촬영을 기획한다(오른쪽 사람, 2015년 8월 27일 현지촬영)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