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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21]조남기장군님 뵙던 날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8-16 11:11:23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21)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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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기화전》에 싸인하시는 조남기장군

지난 2015년 9월 초순 연길과 대련에서 무정장군의 8촌동생 김하수로인과 그의 따님 김천희씨를 현지취재하고 남방땅 소흥으로 금방 돌아왔는데 북경의 조남기장군님께서 뵈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길과 룡정에서의 취재를 이어준 공무원 출신인 리영씨와 조남기장군을 뵈면 어떨가 하는 의향을 내놓았더니 조남기장군께서 흔쾌히 동의하시고 부르신다는 기쁜 소식. 그날은 9월 20일, 국경절을 며칠 앞둔 해빛 찬란한 날이였다.

항공편으로 절강 소흥에서 북경에 이르고, 연변에서 북경에 이른 우리 일행은 리영씨와 김천희씨 그리고 나 셋이였다. 관련 전용차로 수도 한 구역의 조남기장군님 저택에 이르자 장군님은 벌써 정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조남기장군께서 연변에서 사업하실 때 장군님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는 리영씨, 리영씨와 장군님의 저택 상봉은 그리도 감동적이다.

때는 정오를 바라보는 9월 20일 오전 11시 35분, 우리들 인사 차례가 오자 사진으로는 익히 보아온분이라지만 장군님을 직접 뵙기는 처음이라 전신에 긴장감이 쫙 흐른다. 지난 30여년간 겨레의 발자취 좇아 수많은 사람들 만나고 수많은 고장을 찾아다녔지만 전례없는 일이다. 아마도 중앙지도자의 한분으로 계셨던 일대 위인을 대하는 위압감이리라. 그러나 그 긴장도 잠간, 장군님의 자애로운 모습과 스스럼없는 우리 일행 맞이는 친부모님을 만나는 심정이라 할가, 긴장감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장군님은 객실에서 먼저 리영씨와 무랍없이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리영씨의 소개로 나에게로 눈길을 돌리시더니 나의 두손을 꽈악 잡아주시였다. 나는 일순 몸둘바를 모르다가 소흥에서 갖고간 평전-《홍군장령 양림》과 금방 출판된 《백포 서일장군》,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 세 책을 드렸다.

“동무가 쓴 책들이요?”

“네!”

장군님의 우리 말 물으심에 내가 대답 올렸더니 조남기장군님은 정말 큰일을 한다며 다시 나의 두손을 잡아주시며 머리를 끄덕이셨다. 이어 내가 연변인민출판사 2004년 10월 출판으로 된 조선글 장편전기-《조남기전》을 내놓으며 잘 보았다고 하니 장군님은 “동무도 보았구만!”라고 하시면서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곤 우리들의 청에 의해 기념사진에 선선히 응하신다.

조남기장군님을 모시고

리영씨는 오늘의 손님 주인공은 리동무라며 기념사진 첫 순서를 나에게로 돌렸다. 조남기장군님은 나를 신변으로 끌며 친절히 어깨를 잡아주셨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일찍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앙위원, 전국정협 부주석 등 나라와 군대의 중요직책을 력임하신 중앙지도자의 한분이신 조남기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같이 기념사진을 찍다니 정녕 꿈만 같다. 리영씨는 이 행복의 순간을 놓칠세라 샤타를 눌렀다. 다음은 김천희씨고 그 다음은 리영씨 차례이다. 이번에는 내가 카메라를 잡았다.

장군님은 우리 셋과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우리와 자리를 같이 한 큰아들 조건(赵健)씨와 싸인하겠으니 싸인필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그 분부에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리영씨에 따르면 장군님은 년세도 있고 하여 지금은 웬간해서 싸인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아드님 조건씨가 싸인필을 가져오자 장군님은 리영씨와 나의 조선글 이름을 어떻게 쓰는가고 물으신다. 리영씨가 조선글로 나의 이름 세 글자를 써드리니 장군님은 《조남기전》 속표지에 우리 글로 나의 이름 세 글자를 정히 쓰고 중문으로 “조남기”라고 싸인해 주신다. 나는 이 잊을수 없는 순간을 카메라에 정성스레 담았다.

2

이때 장군님의 아드님 조건씨가 장성출판사(长城出版社) 출판으로 된 중문 《조남기 화전》(赵南起画传) 세 책을 갖고 객실에 들어섰다. 장군님은 세 책 모두에 중문으로 “조남기” 이름 석자를 정성 다해 싸인해서야 시름을 놓으셨다. 나는 세 책 모두에 싸인하는 그 진지한 모습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조남기화전》을 펼치니 조남기장군님의 인생발자취가 쭈욱 펼쳐지는데 “제1장 혁명에 투신하여” 앞에 1988년 중앙군위주석 등소평동지와 찍은 사진과 강택민, 호금도, 호요방, 리선념, 양상곤 등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주석 위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장군님의 위인됨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진책은 너무도 귀중했다.

접견기간 장군님은 나를 바로 곁에 앉으라고 하시고는 우리 말로 이것저것 물으셨다. 지금까지 조선족력사연구를 하면서 양림장군, 무정장군 등 위인들의 평전과 여러 렬사전기들, 여러 연구저서들을 내놓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큰일을 한다!”면서 양림이나 무정은 혁명선배님들이고 일대위인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면서 양림과 무정 두 동지는 모택동동지와 주은래동지, 주덕동지, 등소평동지, 양상곤동지 등 중앙지도자들이 잘 안다고 하시는 장군님이다.

아~~여느 책이나 여느 자료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남기장군님의 말씀,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은 홍군고급장령들인 양림과 무정을 익숙히 알며 평가하고있었구나, 마음이 그지없이 후더워났다.

장군님은 이어 겨레위인들과 겨레력사를 연구하는 일을 계속 잘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였다. 지난 30여년을 우리 력사와 씨름하며 걸어온 걸음걸음,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보람을 또 한번 가슴 뿌듯이 느끼였다. 남은 여생에 내가 하는 일을 보다 잘해야겠다는 다짐이 보다 굳어져갔다.

 내가 갖고 간 《조남기전》에 조남기장군님 친필싸인 남기셔

마음이 훈훈해난 내가 “장군님의 전기를 보면 1987년 10월 당13차대회기간 군위부주석 양상곤동지와 조남기장군의 단독담화에서 양상곤동지가 전문 중국혁명을 위해 싸운 조선족동지들의 위훈을 회고하시면서 광주봉기에서의 양달부, 홍군장정에 참가한 양림과 무정 등을 언급하며 높이 평가하셨더군요.”라고 하니 장군님은 모두가 사실이라며 미소를 피워올리셨다.

양상곤동지와 조남기장군의 담화내용은 곡애곡, 증범상 지음으로 된 《조남기전》 제22장 “ ‘특무혐의’ 풍파”에서 잘 나타난다. 그날 양상곤동지는 담화에서 “우리는 오늘 속심을 나누는데 나는 동무와 공동히 중국혁명을 위해 세운 조선족동지들의 위훈들을 회상하려 하오.”라고 하시며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가락들을 꼽으면서 일찍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피흘리며 싸운 조선족혁명자들을 일일이 회상”하시였다.

“우리 당이 가장 일찍 발동한 세차례의 무장봉기가운데서 수많은 조선족동지들이 우리들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인민군대의 창건에 참여했소. 례하면 광주봉기에 조선족동지들이 적어도 250명이 참가하였는데 양달부동지는 명포수로서 봉기군의 포병지휘관이였소. 전투가 긴장할 때 손수 포를 조준하여 장발규의 제4군 군부를 명중했더랬소. 봉기총지휘부 호위대의 성원들은 일부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오고 일부는 중산대학에서 왔는데 대다수가 조선족동지들이였소. 봉기가 실패했을 때 그들은 쌀가마니로 바리케트를 쌓고 진지를 마지막까지 굳게 지키면서 봉기군 주력의 철퇴를 엄호하였소. 섭영진동지는 당시 이 호위대를 친히 지휘하여 반격해오는 적들과 싸웠소. 그는 매번 광주봉기를 회상할 때면 언제나 이 조선족 호위대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하였소.”

중국혁명에서의 조선사람들 관련 뜻깊은 회고, 이 회고로 보면 양상곤은 중국공산당이 선후로 조직한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에 수많은 조선동지들이 참가한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대해서는 환히 리해하고있음을 회고사실로부터 보여주었다.

3

“나는 1931년에 쏘련에서 귀국하였소. 1933년에 중앙근거지에 가서 사업하였는데 장정을 할 때 팽덕회동지와 함께 3군단을 지휘했었소. 당시 중앙홍군가운데서 두 조선족동지가 나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겨놓았소. 한 사람은 양림동지인데 당시 군사위원회의 간부퇀에서 진갱동지가 퇀장이고 송임궁동지가 정위이고 그가 참모장이였소. 일찍 금사강을 강행도하하는 전투를 지휘했으며 1936년 2월에 동쪽으로 황하를 도하하는 전투중에서 희생되였소. 다른 한 사람은 무정동지인데 대혁명시기에 입당하였고 장정할 때는 군사위원회 제1종대 3제대 사령원 겸 정위였소. 아주 우수한 지휘원이고 자격도 아주 오랜 사람이였소. 연안시기에 팔로군총부의 포병퇀 퇀장으로 있었고 후에 조선에 돌아가서 사업하였소.”

중앙홍군이 장정할 때 양상곤동지는 중앙홍군의 주력부대의 하나인 홍3군단 정위여서 조선동지들인 양림과 무정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더우기 양상곤동지가 홍3군단 정위일 때 무정은 홍3군단 군단참모 겸 포병지휘관이여서 조석으로 같이 지내며 두터운 전투적인연을 맺았었다. 그런 양상곤동지여서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동지와 더불어 무정동지를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양상곤동지의 회고에 조남기동지가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인 리철부를 떠올리자 양상곤동지는 “리철부동지도 알고있다”고 말씀하시며 일찍 북방국에서 사업할 때 또 한 조선족동지가 심각한 인상을 남겼다며 개란탄광대파업 지도자이고 익동지구위원회 서기인 주문빈도 회고하시였다. 그러면서 “동북항일련군과 해방전쟁에 대해 말한다면 조선족동지들의 기여는 더구나 많은것”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였다.

 
조남기장군님 모신 김천희씨

두시간 남짓한 담화에서 조선동지들에 대한 회고를 마무리면서 양상곤동지는 “우리 중국혁명승리의 기치에는 조선족동지들의 선혈도 묻어있다”, “조선족동지들이 중국혁명에서 세운 공훈을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거요.”라고 하시며 절절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셨다.

조남기장군은 양상곤동지와의 그날의 담화를 개략적으로 회고하시면서 “감동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다시 말씀하시였다. 그날의 담화에서 조남기장군은 조선족선배 리철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양상곤동지와 같이 해방전쟁중에서의 조선족동지들의 공적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그러는 양상곤동지와 조남기장군이 그지없이 우러러보인다.

또 리영씨에 따르면 언제인가 등소평동지가 장군님과 중국혁명에서의 조선족들의 위훈을 말씀하면서 무정동지가 그 걸출한 대표라고 하셨다는데 그때가 언제인가고 여쭤보았다. 조남기장군은 1985년 3월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으로 부임하였을 때라고 밝혀 주시였다. 그러면서 등소평동지는 “중국인민의 위대한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가운데서 조선족동지들은 중국인민들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 혁명과 해방을 위하여 거대한 대가를 내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정동지를 그 걸출한 대표라고 하셨다고 동을 달았다.

4

알고보면 등소평동지는 그 시절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동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1938년 1월, 팔로군총지휘부 선전부 부주임으로 사업하던 등소평동지는 팔로군 129사 정치위원으로 전근되면서 사장 류백승과 함께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웠다. 당년 등소평은 팔로군 129사 정치위원 겸 중공중앙 북방국 태항분국 서기였다. 태항분국은 산하의 태항(太行), 태악(太岳), 기로예(冀鲁豫), 기남(冀南) 및 그에 소속된 항일근거지의 항일민주정권을 지도하고있었다.

그때 팔로군 129사 사령부는 하북 섭현의 적암촌(赤岩村)에 자리잡고있었다. 적암촌에서 청장하를 건너면 바로 중원촌(中原村)으로서 중원촌에는 조선의용군 사령부와 의용군 장병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서로 청장하를 사이둔 가까운 거리여서 무정동지는 강 대안의 적암촌으로 자주 다니며 등소평동지와 이만저만한 관계가 아니였다. 1943년 봄에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가 중원촌에서 동쪽으로 12키로메터 상거한 하남점진 남장촌(河南店镇南庄村)으로 옮겨간 뒤에도 그 인연은 여전하였다.

어느날, 팔로군 129사 사부의 장향산이 하남점에 가서 무정을 찾으니 코수염을 기른 무정은 검은색 중국식 솜저고리를 걸치고 수판알을 튕기고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무정의 지도하에서 대생산운동에 궐기하면서 방직공장과 병원, 상점 등을 꾸리면서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창 분주히 보내고있었다.

사부로 돌아간후 장향산은 조선동지들의 형편을 즉각 등소평정치위원에게 보고하고 등소평은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조선동지들의 이런 자력갱생정신은 참 훌륭하오. 우리는 그들을 잘 보살펴줘야 하오. 그들에게 말해주오. 경비는 의연히 몽땅 지불해줄테니 생산에서 남은 돈을 그들의 개선에 돌리도록 하고 신체에 주의하도록 말이요. 신체는 자본이니깐. 그들은 조선혁명의 자본이란 말이요!”

등소평정치위원과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 사이 생생한 이야기의 하나였다. 나는 무정장군 평전을 집필, 출판하는 의의를 보다 더 가슴뜨거이 받아들이게 되였다.

장군님을 모신 소중한 시간이 빨리도 흘렀다. 그날 나는 여러가지 이야기내용을 준비했지만 년세가 계신 장군님이여서 많은 시간을 점할수가 없었다. 누구나를 물론하고 세월을 비켜갈수 없다고, 장군님의 얼굴과 거동에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비껴있었다. 그래도 장군님은 또 동행한 김천희씨와 무정장군의 친지라니 기쁘다면서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지금의 룡정이 어떠하냐, 공업이 춰서지 못하고 연변과수농장만으로는 안되겠는데 하며 걱정도 내비치셨다. 민족의 경제발전을 념려하시는 장군님이였다.

조남기장군님 아드님과 기념사진 남기고

어느덧 접견시간은 빨리도 흘러 한시간이 지나갔다. 우리가 장군님의 옥체건강을 축복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자 조건씨는 우리를 바래며 우리 셋과 차례차례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조남기장군님을 뵙던 날, 이날은 2015년 9월 20일, 내 일생에서의 잊을수 없는 순간순간이였다. 리영씨의 알선으로, 무정장군 평전이 주요화제로 되여 흐른 삶의 순간순간이였다. 조남기장군님을 뵙던 그날의 여운이 내 가슴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큰 메아리로 널리 퍼지고 있다.

2015년 10월 10일, 강남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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