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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22]장정전 무정은 홍군특과학교 교장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8-22 13:28:49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22)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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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2월부터 1933년 3월에 이르기까지 국민당 장개석은 중앙혁명근거지와 홍군에 대한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포위토벌을 련속 발동하였지만 번마다 우리 중앙홍군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33년 9월 하순에 이르러 국민당군의 4차 포위토벌을 격파하는 반포위토벌전에 나선 중앙홍군은 8만여명으로 늘어나고 무기장비는 날로 다양해졌다. 홍군무기의 다양화와 반포위토벌전의 현실은 현유의 중국로농홍군학교(홍군학교)를 홍군대학으로 발전시키고 반포위토벌전에 수요되는 여러가지 전문학교를 꾸릴것을 바라고있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1933년 10월 17일에 중대한 명령을 반포하였다.

현 홍군학교 조직구성을 새로 편성하게 된다. 원 고급반 상급반을 홍군대학으로, 제6기퇀을 홍군 제1보병학교로, 제7기퇀을 홍군 제2보병학교로, 공병영, 포병련, 중기관총련, 방공 및 장갑차 련을 홍군특과학교로 개칭하며 유격대훈련반을 유격대학교로 개칭한다.

중앙홍군내에서의 여러가지 홍군학교 편제는 인민군대의 학교구성이 홍군의 여러 병종 초급, 중급, 고급 양성체계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이 양성체계에서의 중요한 하나는 홍군대오내의 포병지휘관과 포수를 되도록 빨리 양성하여 반포위토벌전의 수요에 적응하는것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군위직속 포병퇀 퇀장을 맡았던 현임 홍군학교 포병과 주임 무정을 지체없이 새로 조직하는 홍군특과학교로 소환하여 포병과 주임—포병인재를 키우는 중책을 맡아나서도록 하였다.

홍군특과학교 옛터 일각 (2009.7.12현지촬영)

홍군특과학교는 원 홍군학교의 공병영, 포병련, 중기관총련과 방공련, 장갑차련을 갈라내온 신형의 특과학교로서 홍군시기 우리 당이 꾸린 여러가지 홍군학교들 가운데서 특수성을 띠고있었다. 이는 우리 군 력사에서 첫 기술병종 인재를 양성하는 전과학교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중대한 조치였다. 우리 군 학교들은 단일학과(单一学科)로부터 여러가지 다학과(多学科)로 나아가는 제1보를 힘있게 내딛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력사적 전변시기에 무정은 군위의 명령을 받고 홍군특과학교가 자리한 서금 무양에 들어섰으니 무정장군 발자취 현지답사는 절강 소흥으로부터 강서 남창으로, 남창에서 다시 홍색수도로 불리우는 그제날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으로 이어졌다.

2009년 7월 8일 오전 8시 35분, 절강 소흥을 출발한 쾌속뻐스는 장장 9시간을 들추더니 오후 5시 30분에 강서성 소재지 남창중심뻐스부에 이르렀다. 8.1봉기가 일어난 남창과 옛 홍색수도 서금으로 간다고 하니 금방 대학 1학년 공부를 마친 딸애 설이가 따라나섰다. 남창에서 저녁식사를 에때운 우리 부녀간은 대낮같이 밝은 부근의 8.1광장으로 가서 현란히 솟아오른 “8.1남창봉기기념탑”을 선참 찾아보았다. 이튿날 7월 9일에는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종종 돌아치며 남창봉기기념관, 남창시 제2중학교내 엽정지휘부 옛터, 남창시민족박물관내 하룡지휘부 옛터, 강남 3대루각의 하나인 등왕각, 강서혁명렬사기념관, 주덕군관교도퇀 옛터, 여러 남창봉기 격전지들을 차례로 탐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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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오후에는 남창-서금행 뻐스에 오르니 418키로메터, 다섯시간쯤을 달리니 오매에도 찾고싶던 서금땅이다. 7월 11일은 옛 홍색수도 서금의 주요 혁명사적지들인 엽평이며 사주패며 모택동 등 중앙지도자들의 장정출발지-운석산이며를 돌아보니 하루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중앙혁명근거지 주요 현지탐방의 하나인 무정소속 홍군특과학교 옛터로의 탐방은 7월 12일로 잡아보았다.

7월 12일 새날 아침 서금의 류숙지에서 사주패 홍군대학자리를 찾으니 사주패에서 홍군특과학교 옛터가 자리한 서금시 무양진까지 거리가 20키로메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주패에서는 무양까지의 뻐스를 바랄수가 없어 택시를 잡으니 18키로메터 거리를 20여분만에 끝내준다. 때는 오전 9시라 답사시간은 제법 순조롭게 번져가는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무양진거리에서 이사람 저사람 물어도 누구 하나 홍군특과학교 자리를 안다는이가 없다. 무척 안달을 떠는데 딸애의 제의가 고맙다.

“아빠, 서금에 와보니 택시보다 손님 싣는 오토바이가 더 흥성한것 같아요. 손님실이에 재미를 들인 오토바이수들이 알수 있지 않을가요?!”

“응, 도리가 있어!”

순간 머리가 확 트인 나는 지나는 사람들보다 오토바이를 주의하여 살피다가 뭔가 기다리는 한 오토바이수를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홍군특과학교자리를 아는가고 물으니 안다고 한다. 언제인가 홍군특과학교를 찾는 사람을 안내한적이 있다고 동을 단다. 그러면서 이곳 무양진거리를 지나 멀지 않은 밭가운데라며 오토바이 료금이 10원이면 된다고 시원스레 나온다. 어딘가 믿음이 가는 오토바이수로 보였다.

알고보면 홍군특과학교는 서금성에서 서남으로 18키로메터 떨어진 회창(会昌)현성과의 사이 면강(绵江)의 중류-무양진(武阳镇)의 한 평지 밭가운데 위치하고있었다.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무양은 모택동 등 중앙지도자들이 생활하며 싸운 고장이고 온 근거지의 모범구역으로 이름난 홍색고장이였다. 흥이 난 오토바이수는 지금도 무양에는 “모택동동지의 옛집” (毛泽东同志旧居)과 “춘경생산우승기대회 옛터”(春耕生产赠旗大会旧址), “장정의 첫 다리”(长征第一桥), 홍군특과학교 옛터 등이 있다고 자랑하며 우리를 먼저 진내 무양촌에 자리한 무양교로 안내하였다.

홍군장정제1교-무양교 다리우 모습과 다리어구에 씌여진“홍군장정제1교”글 (2009.7.12현지촬영)

고마운 오토바이수였다. 무양교는 1934년 10월에 전이도중의 홍9군단이 그해 10월 8일에 건넜다고 하여 “장정제1교”로 불리우는데 장정 그 시절과 그후 오래동안 간편한 나무다리로 되여있었다고 관련자료들은 전한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장정제1교는 1988년에 세워졌다는 콩크리트화된 다리이고 너비 6메터에 길이 111메터라지만 많이 낡은 상태로 우릴 맞아주었다. 다리상태가 어떠하든 홍9군단이 통과한 “장정제1교”우에 섰다는것이 그리도 신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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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는 다시 달리더니 밭가운데 있는 길가 한 옛집앞에 멈추어섰다. 옛집을 보니 강서풍격을 가진 전형적인 옛집인데 세개 출입문으로 된 중앙부 정문우에 검은 판에 노오란 글씨로 된 “추씨종사”(邹氏宗祠)편액이 보인다. 급기야 떠오르는것이 있어 이 옛집이 당년 “춘경생산우승기대회”가 열린 그 옛집이 아닌가고 물으니 오토바이수는 어떻게 아느냐며 옳다고 수긍하여준다.

“홍군특과학교 바로 옆에 추씨종사가 있다는 자료를 언녕 보아 알고있지유.”

“그래요, 전문가는 전문가입니다. 이곳 당지 사람들은 물론 홍군특과학교와 추씨종사 자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나는 손님실이를 하다보니 무양진내의 이모저모를 알수 밖에 없습니다.”

오토바이수와의 대담에 딸애는 재밌다고 한다. 머나먼 중앙혁명근거지 무양진에 와서 말씨가 전혀 다른 이곳사람들과 척척 어울리니 아빠가 의젓하다는 딸애. 력사의 현장에서 어울리는 아버지 모습을 처음 보니 그런가부다. 나는 허허 웃으며 이런 일은 보통일이고, 강남땅에 와서 북경표준어가 통하지 않는 당지 로인들과 어울릴 때면 지방 젊은이들을 통역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딸애가 히히 웃어준다.

무양진 밭가운데의 추씨종사 옛 건물 (2009.7.12현지촬영)

딸애보고 눈앞에 보이는 이 추씨종사가 1933년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모택동이 직접 사회하고 동원보고를 한 중앙혁명근거지 춘경생산운동대표대회 즉 춘경생산우승기대회가 열린 옛터이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첫 로동모범이 떠오른 곳이 바로 여기라고 하자 딸애는 이번 중앙혁명근거지 현지답사길에 실제로 배우는것이 아주 많다고 내심을 알린다. 그러는 추씨종사는 평소는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종일 닫겨진 상태로 있었지만 80여년이 지난 오늘도 옛집은 그대로 도고히 서서 우릴 맞아주니 기분은 내내 좋기만 하다.

추씨종사 건물에 걸맞게 서금시 무양은 1930년 봄 이후 서금현혁명위원회 산하 무양구혁명위원회(그해 7~8월간에 무양구쏘베트정부로 개칭)가 설립되여 혁명활동이 활발한 고장임을 나는 알고있었다. 1931년 11월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수립된후 무양사람들, 특히 부녀들이 쏘베트경제건설-생산운동에 총궐기하여나선 일, 1933년 봄에 중앙정부에서 춘경생산시합운동을 벌리자 무양구와 구 산하 석수향(石水乡)에서 많은 선진전형들이 배출되여 중앙정부와 중앙정부 주석 모택동의 표창을 받은 일, 1933년 5월의 춘경생산우승기대회는 이런 분위기속에서 이곳 추씨종사에서 성황리에 열린 일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는 추씨종사에 이어 바로 서북쪽가에 자리한 홍군특과학교 옛터로 발길을 옮기였다. 옛터는 논밭을 방불케 한 조금 낮은 지대이고 이미 무너진 특과학교 건물의 기초돌들과 허물어진 벽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풀들이 엉성한 옛터 주변과 옛터내 홈들에 물이 고인데서 바지를 걷어올려야 하였다. 다행히 구두가 아닌 여름철 간편한 신을 신은데서 무너진 벽체사이를 마음대로 누비고 다닐수 있었다. 내가 우리 겨레의 전설적영웅 무정장군이 1933년 10월, 이 건물에 설립된 홍군특과학교에서 포병과 주임을 맡았다가 얼마후 제2임 특과학교 교장을 맡았다고 하니 딸애는 흥분을 금치 못한다.

홍군특과학교 옛터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딸애 (2009.7.12현지촬영) 

딸애는 이모저모로 부지런히 카메라를 누르는 날 보고 그 시절 특과학교 교장이면 어느 급별인가고 물어온다.

“특과학교 관련자료로 보아 학교기관으로 훈련처와 교무처, 정치부가 있고 학교 산하에 중기관총영, 포병영, 공병영 3개 영을 두고 매개 영마다 산하에 각기 3개 련씩 두었으니 명실공히 홍군퇀장급은 될걸.”

“그 시절 홍군퇀장이면 낮은 급별은 아니지 않아요?”

“낮은 급별이라곤 볼수 없지만 그 시절 조선사람 양림이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선후로 홍군 23군 군장, 중앙혁명근거지 남방전선의 최고군사지휘기관-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 나선데 비하면 낮은 편이지.”

이야기가 여기까지 미치자 그러면 조선사람인 양림과 무정은 장정길에 오른 그후 홍군대오에서 누가 급별이 더 높았는가고 묻는다. 이 물음은 난처함을 던져온다. 어인 영문이지 홍1군단 군단장 림표켠에서 활동하던 양림은 1934년 10월 장정이 시작된후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급강하하다가 장정이 끝난후 홍군보충사 사장, 홍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활동하지만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켠에 선 무정은 중앙군위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으로부터 홍3군단 참모, 홍군총부 작전과장으로 급상승함을 보이니 무어라고 말해야 할가.

“서로간 급별이 가장 높을 때를 비교하면 홍군군장 급별은 되니 비슷비슷하다고 보아야겠지!”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사람으로서 홍군군장 급별이면 엄청난 급별이네.”

나의 결론적인 급별비교에 딸애는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경탄해마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도 물판에 뛰여들며 허물어진 담벽들을 주의하여 살펴본다. 호기심이 부쩍 동한 대학 1학년생 딸애에게 홍군특과학교 건물의 유래와 이 건물이 언제 무너져내렸는지 알려주었으면 좋으련만 어디에서도 관련자료를 찾아내지 못하여 유감이기만 하다.

홍군특과학교 옛터에서 나오니 바지와 신은 진흙과 흙탕물 범벅이다. 마침 길가에 흐르는 물이 있은데서 말끔히 닦고 씻어낼수 있으니 다행스럽다. 귀로에서 나는 딸애에게 홍군특과학교 관련자료를 열성껏 소개하면서 그래도 리해가 따르지 못할 때 갖고 간 자료들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니 아래는 관련자료로 보는 홍군특과학교의 그 시절 현실이다.

4

1934년 2월 15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규정하여 발표한 “특과학교 학원선발조건”(关于特科学校选送学员的条件)에 따르면 특과학교 학원들은 년령이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신체가 건강하고 전투경험이 있으며 최소로 1년간 기관총련에서 반장이거나 자격 있는 전사가 돼야 하며 정치립장이 견정하고 사업에 적극적이며 배우려 하고 성분이 좋아야 하며 문화정도가 식자 100자 이상이여야 했다.

그번 학기 학원들이 곧 졸업하게 될 때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1934년 6월 12일에 또 “각 부대들에 특과학교 기관총과 학원들을 배치할데 관한 조건과 배치명액” 명령을 반포하면서 배치학원들의 년령은 반드시 18세 이상, 30세 이하로서 신체가 건강하고 정치립장이 견정하며 사업에 적극적이고 배우려는 로농분자여야 하며 식자정도를 제한하지 않는다, 만 1년의 전투경험이 있는 반장과 자격이 있는 전사로서 선발인원이 모자랄 때에는 반년이상 전투경험이 있어야 하며 홍군학교 훈련을 받지 않은, 부대제발에서 비교적 약한 패장을 보내 훈련시킬수 있으며 보내온 학생들은 반드시 절반이 반장 혹은 비교적 약한 패장이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홍군특과학교 관련 여기 군위의 두가지 명령은 특과학교 기관총과 학원들을 상대한것이지만 특과학교 다른 병종 학원들에도 통하였다. 특과학교에서는 학원들 소수만이 군위 규정 조건에 부합되고 대다수가 입대전 농사를 지었거나 글을 모르는 현실앞에서 “적게 강의하고 많이 해보며 교실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 는 전문 교수원칙을 제정한것이다.

무정은 포병과 주임으로 부임한후 교수기재의 결핍을 깊이깊이 느꼈다. 포병전업에서는 적게 강의하고 많이 해보며 교실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는 특과학교의 교수원칙이 먹혀들지가 않았다. 실물이 없이는 모두가 공담으로 흐를수가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무정은 군위와 홍3군단과 련계하여 홍3군단의 크로백 대포를 끌어왔다. 1930년 7월 장사진공전에서 로획한 이 크로백은 무정과 깊은 인연을 가진 대포로서 포병교수실천에서 더없이 귀중하고 유일한 대포였다. 무정이 학원들에게 크로백 대포에 깃든 감강 순라정 포격 등 이야기를 생생히 말해주니 흥미를 느끼지 않는 학원들이 없었다. 무정의 솔선수범과 생동한 강의로 학원들은 문화지식이 떨어져도 포사용을 척척 배워냈다.

홍군특과학교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직속단위로서 여러 병종들 가운데서도 포병전업을 첫자리에 놓고 틀어쥐였다. 이런 현실속에서 군위는 얼마후 포병과 주임 무정을 특과학교 제2임 교장으로 임명하고 홍군을 위하여 포병을 중심으로 보다 많은 여러 병종 인재들을 다그쳐 양성하도록 하였다. 무정은 직심이였다. 누구보다도 군위의 부임의의를 잘 알고있는 무정은 홍군특과학교를 빠른 시일내에 우리 홍군의 실제에 어울리는 특과학교로 꾸리여 군위와 동지들의 칭찬과 긍정을 받았다.

했으나 홍군특과학교 제2임 교장으로서의 무정의 신나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어 기본골자만을 한데 모아보았을뿐이다. 딸애는 이만큼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현지를 탐방한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기획중에 있는 무정장군 평전을 꼭 잘 써낼수 있을거라며 힘과 신심을 안겨준다. 강서 남창과 서금 등지 현지답사를 마친 우리 부녀간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2016년 8월 11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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