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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온 기별-일본]도전을 멈추지 않는 IT엔지니어 김만철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12-12 12:21:28 ] 클릭: [ ]

일본의 주식회사 “다언어시스템연구소”사장인 김만철씨

1990년대말기 아메리카시장을 중심으로 인터넷관련기업에 대한 투자가 비정상적인 고조를 보이면서 닷컴(.com) 회사로 불리우는 수많은 벤처기업이 설립되였었고 그 주식 역시 1999년부터 2000년사이에 과속적인 상승선을 그었다. 소비자들과의 직접적인 전자상거래(e-commerce)가 현실화되면서 대학을 갓 졸업한 IT기술자들이 사업기획서 한장만으로도 여러곳으로부터 자금제공을 받을수 있었다는 그런 시대였다.

이 시기를 “닷컴버블시대” 혹은 “IT버블시대” (1999년~2000년)라고 한다.버블경기(景気) 즉 거품(泡沫)경기는 필경 마감이 약속되는 현상이다.

2001년 IT버블붕괴전까지의 2년간 일본에서는 전례없던 IT붐이 일었고 그 혜택을 받은 중국인들도 많았다. 따라서 버블붕괴이후 IT벤처회사나 중국인기술자들에 대한 타격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일전에 필자는 그 시련속에서 업계에 살아 남았고 꿋꿋이 창업10주년을 맞이한 IT기업가 한분을 만났다.

바로 여러 벤처기업이나 기존 IT 기업들이 직면한 각종 시스템트러블을 해결하여 적지 않은 실적과 신용을 쌓아온 주식회사 “다언어시스템연구소”(多言語システム研究所) 의 사장인 김만철씨이다.

컴퓨터와의 인연

고향이 길림성 왕청현인 김만철씨는 1988년에 길림공업대학 기계공학부 기계제조전업에 입학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촉하게 된 그는 컴퓨터를 사용해야 할 일부 전업과제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친구들의 과제까지 대신해줄 정도로 컴퓨터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컴퓨터유희에 흥미를 가지게 된 열여덟살 만철씨는 어느날 유희금지의 학교규정을 어겼다는 리유로 15원을 벌금하게 되였다. 생활비 100원중에서 떼내는 돈이라 아깝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유희에 대한 갈망을 억제할수 없었다.

“다언어시스템연구소”의 컴퓨터교실

고민하던중 그는 유희의 소리를 끄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밤낮으로 도서관에 파뭍혀 연구한끝에 끝내 버튼 하나로 필요에 따라 유희의 소리를 끌수도 있고 화면을 바꿀수도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유희를 놀기 위한 수단이였는데 그것때문에 오히려 너무나 많은 공부를 하게 되였다고 김만철씨는 말했다. 이것이 그가 컴퓨터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이다.

대학교 3학년때 프로그래머(程序员)자격증을 따낸 그는 휴일이면 늘 장춘 홍기가(红旗街)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는 컴퓨터를 포함한 전기제품상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새로운 정보도 많았던것이다. 녀학생들에게 쇼핑이 하나의 즐거움인것처럼 그에게는 홍기가에서의 시간이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였다고 한다.

자랄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느날 전자상가에 자리잡은 한 회사의 직원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바로 고객의 요구에 맞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어렵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던 분야였다. 결국 대학졸업할때까지 다섯종목의 시스템개발에 참여하였고 고생끝에 느끼는 희열을 여러번 감수하게 되었다. 플로피디스크를 자기힘으로 얻을수있다는 쾌감이 제일 컸다고 한다. 그것이 프로그램개발을 향한 첫 발자국이였다.

1992년 대학졸업후 장춘제1자동차공장에 배치받은 김만철씨는 가정사정에 의해 도문에서 생활하시는 부모님곁에 돌아 오려는 일념에서 연변석유정제공장에 보내줄것을 공장측에 요구했다

도문에 돌아온 그는 부업으로 지인이 경영하는 컴퓨터회사를 돕게 되었다. 컴퓨터도매업무로 북경 중관촌에 자주 다니는 과정에 복제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컴퓨터가 주로 회사직원들의 월급계산에 쓰이는것이 일반적이였고 컴퓨터시장이 갓 보급되기 시작한 때인지라 복제프로그램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없었던 그때, 기존하는 프로그램을 각 회사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제공하는 업무도 동시에 진행했다.

그후 도문대외무역운수공사 계산기실 실장으로 자리를 잡게 된 김만철씨는 1993년 연변건축공사 경영실로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게 되였다. 컴퓨터회사 경리직이였다.

당시 삼각채(三角債)에 시달리고 있었던 연변건축공사가 그에게 제공한 조건은 몇년동안 비여 있었던 낡아빠진 옛 건강려사건축물뿐이였다. 어이없는 제의였지만 열혈청년 만철씨에게는 자기능력을 증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도문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인맥과 동시에 여러 회사의 구체적인 사정에 대한 정보도 주었다. 일때문에 여러번 연변화연집단정보중심에 갔을때 사무실구석에 처박혀 있는 새 컴퓨터 몇십대를 본적이 있었다. 그는 재고제품인 28대의 컴퓨터를 사는 대신 일년후에 돈을 물겠다는 제의를 연변화연집단정보중심에 내놓았다 . 당연히 거절당했다. 한발 물러설 대신 한발 다가선 그는 일년후에 지금 제기한 처리가격에 1500원씩 붙혀서 돈을 물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거의 가치를 잃었던 재고상품 전부가 그의 손에 넘어 왔다.

아직 회사사무실도 없었던 김만철경리는 먼저 컴퓨터처리에 나섰다. 새 컴퓨터이지만 시간적으로 오래된 제품인것만큼 컴퓨터 한대를 사면 랭장고 한대를 선물하는 방식을 택했다. 동시에 월급계산시스템을 각 회사의 실정에 맞게 개발하여 컴퓨터와 셋트로 판매한 결과 두달기간내에 가져온 컴퓨터의 절반을 처리하여 회사자금 10만원을 마련했다.

다음은 사무실이 문제였다. 유리한장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건물을 번듯한 컴퓨터회사 사무실로 장식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만철씨는 풋면목이 있는 한 장식공사를 찾았다. 컴퓨터를 사라는 권고는 예상대로 거절을 받았다. 컴퓨터와 시스템값 대신 회사사무실장식을 맡아 달라는 만철씨의 수완은 상대쪽 사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렇게 설립된 회사는 연변각지에 컴퓨터를 판매하는 한편 나머지 중고컴퓨터를 리용하여 컴퓨터학습반을 꾸려 수입을 올리는 등 순조로운 길을 걸었다.

회사가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부장의 친척이며 여느 주임의 친구이며 하나둘 외상으로 컴퓨터를 가져가는 현상이 날마다 늘어났다. 자금은 점점 줄어들고 회사경영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IT외과의사

근 4년동안에 걸친 회사경영에서 큰 경험을 얻은 김만철씨는 더 넓은 세상을 바라고 1997년 9월 일본류학의 길을 택하였다.

일본어학교에서 언어공부를 하던 시절,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아침 8시까지 빵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힘든줄을 몰랐다. 당분간은 천엔(60원정도)으로 한주일을 살아야만 하지만 고생이 오래가지는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IT프로그래머 수요가 많다는 정보를 얻은 그는 거이 백여통의 전화를 걸었다 한다.

드디어 일본땅을 밟은지 넉달만에  IT파견회사에 취직한 김만철씨,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지인의 소개로 후지츠(富士通)와 같은 대기업 관련회사의 데이터분석, 서버분석,트러블해결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낮이 따로 없는 생활을 하였다. 하루에 두시간정도의 쪽잠을 자면서도 학생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일을 할수 있다는 행복감에 힘든 줄을 몰랐다는 그는 IT버블의 혜택을 맛본 사람중의 하나이다.

버블붕괴로 인해 처음에 취직했던 회사가 합병의 시련을 겪게 되였을 때에도 명석한 분석능력과 트러블제거기술을 가진 그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다. 그때 이미 과장의 직무를 가졌고 년수입 천만엔이상을 받았던 그는 그대로 정년퇴직까지 순조로운 길을 걸을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던 2003년 2월 회사가 국세청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모든 업무가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몇년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든 사장과 동료들과의 거리감, 무엇보다 격렬한 경쟁속에서 습관되여버린 심신이 가택대기상황에 적응을 못할정도로 쇼크였다.

실망한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귀향의 길에 올랐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중국국내는 당시 사스(SARS)로 인해 대혼란중이였다. 다섯달동안의 고민끝에 다시 일본땅을 밟은 그는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였다.

“다언어시스템연구소”의 직원들과 함께

상장기업인(上市企業)소프트브렌(Softbain)주식회사의 3차 면접이 끝나고 최종통지서를 기다리고 있을때의 일이였다. 일전에 면접보러 갔었던 도요엔지니어링그(東洋エンジニアリング)주식회사에서 여러번 련락이 왔다. 그의 경력이 욕심나서였다.

그때 도요엔지니어링그에서 개발한 전포, 공장 ,물류의 공급망시스템중 요코하마기요켄사오마이(横浜崎陽軒焼売)주문시스템에 트러블이 생겼었다. 한번 주문(発注)에 두시간반이 걸린다는, 거이 정지된 상태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였다.

1억3000만엔의 투자가 실패로 끝나게 할수는 없다는 각오로 경영진은 다른 회사에 꿈을 두고 있는 눈앞의 인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설복을 반복하였다. 그들 얼굴에 비낀 그늘이 상태의 엄중성을 말해주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설복은 저녁까지 계속되고 김만철씨 자신도 조금씩 거의 멎어버린 시스템이 궁금하기 시작했다.

우상인 송문주(宋文洲 소프트브렌주식회사 창시인. 산동성 위해출신)회장의 결제통지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당장 “외과의사”로 등극해 사오마이주문시스템을 “수술”하여 자기 능력을 검증해 보느냐…눈앞의 난제가 또 그의 도전심리를 자극했다.

결국 그는 이튿날부터 “외과수술”에 진입했다. “3주내에 끝내자”가 그의 좌우명이였다. 결과 열흘후에 문제의 “두시간반”이란 시간이 “30분”으로 줄어 들었고 두주일만에는 “8초”로 안정되였다. 시스템의 정상적인 회복은 회사를 궁지에서 구했고 그에 대한 신용도는 점점 높아갔다.

소프트뱅크(Softbank), 리쿠루트( Recruit), 유니시스(Unisys), 케이요D2(京葉D2)등 여러 유명기업들의 시스템개발과 관리, 그리고 트러블해결에 참여하면서 점차 경영자의 꿈이 김만철씨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경영자의 길

김만철씨는 난치병에 걸렸을때 자기병에 대한 리해결핍으로 더더욱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본적이 있었다. 외국인뿐만 아니라 의학지식이 결핍한 일본인환자들도 그러했다. 리해하기 어려운 의학용어를 디지털화면과 함께 구체적으로 설명받으면 환자의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는 환자와 의사간의 소통에 편리를 가져다 줄수 있는 터치패널진료기록시스템 개발을 준비하면서 경영자의 길을 걷게 되였다.

2006년 11월 주식회사 “다언어시스템연구소”(MSR)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다언어”,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대화수단인 여러가지 언어뿐만 아니라 각종 IT시스템에서 오가는 전문용어를 말한다.

여태껏 IT업계에서 기술자로서의 길을 걸어 온 김사장은 회사 첫 항목인 터치패널진료기록시스템개발에서 큰 경험을 얻었다.

투자개발자가 나서지 않은 형편에서 먼저 시스템개발을 추진시키는 반년동안에 회사기본금의 거의 절반을 소모해버렸다. 초기투자와 매달의 비용,그리고 회수기간 등 여러방면의 분석을 거듭한 끝에 기술자 김만철사장은 기업가의 립장에 서서 랭정하게 프로세스를 접을수밖에 없었다.

“아이디어만 갖고 사업을 추진하면 안된다. 먼저 판로를 찾고 모형에 투자하는것이 바람직하다” IT기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는 김사장이다.

시스템통합(SI)경험과 노하우를 배경으로 하는 주식회사 다언어시스템연구소는 경영레벨의 시점으로부터 정보화의 전략・업무개선지원의 컨설팅을 진행하는 한편 사용자의 수요에 맞게 시스템을 개발하여 기업의 경쟁력에 보탬을 주고 있다. 또한 소프트뱅크(Softbank)모바일주식회사의 MNP(핸드폰전화회사를 바꿀때 번호가 바뀌지않는 제도)트러블을 해결하는 등 업계의 앞자리에서 달리고 있다.

소프트뱅크(Softbank)모바일주식회사, SB크리에이티브 주식회사, 도요엔지니어링그 주식회사, 주식회사기요켄(崎陽軒)등 이름있는 회사들과의 거래는 “신용제일”과 “진정한 고객만족도”를 슬로건으로 하는 회사의 자본과도 같은 존재이다.

올해 창업10주년을 맞이한 김사장은 개인이 모이면 단체가 되고 단체가 모이면 큰 힘을 얻을수 있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였고 여러가지 기준과 질서를 준수하는 한편 정부의 여러 제도를 리용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다언어시스템연구소는 2009년부터 일본후생로동성에서 인정하는 “긴급인재육성・취직지원기금”에 의한 훈련을, 2012년부터는 “성장분야 인재육성장려금”, “일본재생인재육성장려금”에 의한 훈련을 시작하여 새롭게 IT전문직 인재육성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즉 IT업계에 부족한 전문인재를 각 회사실정에 맞게 배양하는 교육사업으로서 기술전수를 통한 사회공헌의 일환인것이다.

최근에는 일본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전문인재를 모집하여 일본에 있는 여러 회사에 소개하고 정사원으로 채용된 다음 일정한 기간동안 다언어시스템연구소에 와서 전문기술을 배우게 한다. 다음 학습비용의 대부분을 정부에 청구하여 조성금(助成金)제도의 혜택을 보게 한다. 이외에도 실업보험에 참가한 실업자들도 동일한 제도를 리용하여 재취직의 기반을 닦게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배양한 졸업인수는 1800명정도로 일본 여러 IT기업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김사장은 자랑스러워했다.

창업이래 넘은 세 고비

첫고비:리먼쇼크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인 리먼쇼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거래가 끊기고 손놓고 기다리는 형편에 처했다.

두번째고비:인재교육사업초기 일부 교육시설이 정부의 요구와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리유로 한동안 교육업무가 중단되였다.

세번째고비:교원과 학생간의 오해로 정부에 고발당하는 사건때문에 또 한번 교육업무가 중단되였었다.

첫번째 위기가 끝날 무렵에 회사에 남은 자금은 15만엔정도였었다. 그후에 있은 두번째 고비때에는 세번째 고비까지 겹치여서 회사의 손실액은 몇천만엔에 달했다.

아픈 고비를 넘길 때마다 “신용”과 “고객만족도”의 회사방침덕분에 더욱 단단하게 다져졌다는 김사장. 정부의 보조금제도를 리용하는만큼 모든 일에서 성실하게 접수하고 규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는 말한다.

두번의 큰 검사를 받은적 있었다는 다언어시스템연구소이지만 오히려 상상밖이라며 탄복하고 돌아가는 후생로동성과 동경로동국의 정부인원들을 보면서 국적과 상관없이 실적과 신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느꼈다는 김사장이다.

세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면서 최근에 여기저기서 거론되는 IT불경기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솔직히 IT업계는 여러가지 문제점에 직면하고 있다. 사실 요즘 인권비때문에 지탱하지 못하는 IT중소기업들도 많다. 교육사업만 하는것이 편할수도 있지만 우리 IT가족들에 대한 의리와 책임감, 그리고  IT외과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재일중국조선족경영자협회 회장이며 일반사단법인 화인(华人)기업신용협회 회장인 그는 회사경영외에도 조선족운동회 등 여러가지 재일조선족 커뮤니티활동을 주최하고 조직하는 면에서도 큰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김만철, 1970년생 혈액형 A형. 가정에서는 두 아들의 아버지.

중등의 키에 우렁우렁한 목소리. 예리한 눈빛에 까근하고 정확하고 한번 정하면 흔들림이 없는 강한 남자. 

아직은 밝힐수 없다는 개발중의 새 시스템이 하루빨리 성공의 폭죽을 터치길 바란다.

*IT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이라는 뜻으로서 전기통신,방송,컴퓨팅,통신망 등 사회 기반을 형성하는 유형 및 무형의 기술 분야이며 IT라는 용어는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에서 출판된 1958년 문건에 “새로운 기술은 하나의 확립된 이름을 아직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정보기술(IT)로 부르겠습니다."라고 언급한데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기재되여 있다.

리홍매 일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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