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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23)학교가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1-29 09:42:00 ] 클릭: [ ]

학교마다 맑스주의연구회 세워지고

청년학생들 민중 속에서 반일사상 선전

실오리 같은 비가 차분히 내리는 7월11일(2004년), 룡정제1중학교 교정은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다들 대성중학교 옛터를 참관하러 온 관광객들이였다. 회색벽돌로 건축한 교사는 원래의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하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현관 1, 2층 사이에 ‘私立 大成中学校’라는 글이 옥칠로 새겨져있었다.

교사는 동서의 길이가 36.5메터이고 남북 너비는 8메터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이 교사는 학교의 교무실로 사용되였댔는데 허물고 다시 지은 후 지금은 학교력사전시실로 되여 많은 손님들을 끌고 있다. 전시실에는 룡정을 빛낸 력사인물들과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의 은진, 동흥, 영신 등 학교의 력사를 반영한 사진과 도편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관객들 앞에서 예쁜 녀학생 해설원이 한창 청아한 목소리로 해설하고있었다. 관객들은 녀학생의 해설사를 들으면서 력사의 현장을 재현한 사진 앞에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군 했다. 비장한 력사의 시각을 실감하게 하던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맑스주의의 보급운동은 청년들 속에서 세찬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룡정의 여러 학교는 혁명적 청년을 양성하는 중심지로 되였는데 맑스주의연구소조 등이 많은 학교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룡정의 대성, 동흥 등 학교들은 ‘공산주의 온상’이라고 불리우기까지 했습니다.”

해설원 녀학생은 “대성중학교는 혁명적 청년세대를 양성하는 중심지가 되여 맑스주의전파활동을 각지 조선족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 의하여 1921년에 창립되였다. 창립 초기에는 7명의 교원과 160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교원들이 공교회의 유지인사들이였기에 교수내용은 자연 공자의 사상이였으며 ‘사서(四书)’ , ‘오경(五经)’, ‘명심보감(明心宝鉴) ’ 등을 주요 학과목으로 삼았고 공자의 봉건륜리도덕을 교수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조기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룡정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에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가운데는 맑스주의사상을 접수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 의해 많은 조선문으로 된 맑스주의간행물들이 학교에 전파되여 들어왔는데 맑스주의사상은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전파되였다. 1922년 조기공산주의자들인 리주화(李周和), 리린구(李麟求)의 지도 밑에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조직, 10명의 소조원들이 포섭되였다. 소조원들은 저녁마다 리주화네 집에 모여 동흥중학교의 교원 정중섭에게서 〈과학적사회주의리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미구하여 동흥, 은진 등 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찾아와서 광명회에 가담하게 되여 연구소조는 소조원이 30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광명회의 활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였는데 하학 후와 일요일에 학교의 교실을 리용했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농촌마을에 내려가서 ‘동학(冬学)’반이나 야학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농민들을 모여놓고 문화오락활동을 전개하는 기회에 맑스주의의 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열정적으로 선전했고 대중 속에 반일투쟁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광명회의 많은 학생들은 학습을 통하여 차츰 로씨야10월혁명의 승리를 지지했고 중국의 ‘5.4’운동의 영향으로 반제반봉건적인 신문화운동을 제창해나섰다. 소조원들은 학교내에서 봉건미신을 타파하고 ‘공맹지도’를 페지하는 한편 민주와 과학을 제창할 것을 주장하면서 투쟁의 예봉을 공교회에 돌리였다.

1922년 4월 1일 아침, 학교의 규례 대로 공자제를 지낼 때였다. 광명회의 진보적인 학생들의 선동을 받은 전교 학생들은 누구도 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학교를 개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에 답복을 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교사지붕의 다락에 올라가 ‘공자위패’ 를 뜯어버리고 전교 학생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학우회에서 학교를 인수, 관리한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은 공교회 인사이며 보수적인 교무주임인 림봉규를 몰아내고 수학교원인 현기형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했다.

학우회에서는 교원들과 협상하여 학교운영방안과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각종 종교의식을 무조건 페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동맹휴학한 4일 만에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종교와 철저히 분리시키고 복학하였다.

1923년 3월, 조기공산주의자인 김사국(金思国)이 로씨야 연해주에서 룡정으로 왔다. 그는 방한민(方汉民), 김정기(金正琪), 리명희(李明熙) 등 인사들과 힘을 합쳐 대성중학교의 부설학교로 《동양학원(东洋学院)》을 꾸리고 교사 아래층 2칸을 내여 대성중학교 제1회 졸업생들을 위주로 7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동양학원에서는 공산주의 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리론을 기본교수내용으로 삼고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동양학원은 연변의 첫 무산계급민주주의교육을 창시한 학교로 되였다.

하여 동양학원은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동양학원을 큰 화근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고 했다. 1923년 8월, 일제는 저들의 주구들을 사촉하여 야밤에 학교마당에다 작탄을 매설하여놓고는 령사관 경찰들을 출동시켜 사출해낸 후50여명의 사생들을 체포하는 ‘작탄매설사건’을 조작, 끝내 동양학원을 페교해버렸다. 체포된 대부분 학생들은 인차 석방되였으나 김정기 등은 조선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갔다. 김사국과 리명희 등은 로씨야로 망명할 수 밖에 없게 되였다. 하여 공산주의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대성중학교는 한때 저조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1926년 가을, 공산주의자 박재하 등이 대성중학교의 복교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연길의 공교회학교 대동중학교와 련합하여 대성중학교 옛터에다 대성중학교를 복교하고 교장을 맡았다.

1928년 여름, 중공동만구역위원회 서기 주동교가 대성중학교에 파견되여 중어를 가르치는 한편 ‘맑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사’를 가르쳤고 새로운 맑스주의대오를 건설했다. 1930년10월, 대성중학교에는 중공지하당지부가 건립되였다. 1934년 일제는 대성중학교 3층 지붕이 고려시대의 건축특색을 띠고 있다는 트집을 잡고 방학동안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서 허물어버렸다. 그리고 일본교원 가쯔다와 사도오를 박아넣었다. 또 교원과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학교동쪽 문밖에 접수실 같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총령사관의 분주소를 앉혔다. 이를 반대하여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에 악이 오른 일제는 대성중학교를 “공산당을 길러내는 소굴이다”라고 비방했다.

동흥중학교

룡문교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을 건 학교가 있다. 피혁공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두고 있는 이 학교가 바로 동흥중학교 옛터이다.

조기공산주의자들의 활동진지였고 맑스주의전파에 앞장섰던 룡정동흥중학교

“동흥중학교도 대성중학교처럼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 전파와 혁명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교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림민호 같은 많은 우수한 혁명인재를 키워냈지요.”

동흥중학교에 대한 박창욱선생의 소개였다.

동흥중학교는 한시기 연변의 반일투쟁에서 이름 높던 간도국민회사법부장을 맡고 있다가 국민회군 안무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최익룡과 공산주의자 박재하, 김소연 등에 의하여 1921년10월 1일 창립, 최익룡이 교장으로 추대되였다. 학생들은 당지와 연변 각지에서 온 청소년이 위주였고 로씨야 연해주와 조선,남만, 북만 등 각지에서 온 청소년들도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1925년12월부터 신학제를 채용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였고 사회주의에 배치되는 학과목을 페지하고 학교내에서 〈혁명가〉도 불렀다.

동흥중학교는 창립 초기부터 맑스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진보적인 학생들은 맑스주의단체들에서 발간한 《새벽종》 등 간행물과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는 출판물을 들여다 학습하였다.

1923년,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온 공산주의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의 지도하에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 등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가 결성되였고 같은 해 상해로부터 림호(林虎) 등이 학교내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투쟁을 발동하였다. 이미 사회주의사상을 접수한 교직원과 학생들은 종교미신과 봉건가부장제사상을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를 제창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교육종교분리’를 주장, 학교가 종교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였다.

1924년 4월, 룡정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1925년 4월에는 교원 김성호의 지도 밑에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인 ‘독서회’가 세워졌다.

동흥중학교 사생들도 대성중학교 사생들과 마찬가지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 후 대중 속에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렸다. 학생들은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농촌에 내려가서 야학을 꾸리고 어린이들과 실학청년 및 녀성과 장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고 ‘혁명가곡’을 배워주었으며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리고 강연회, 변론회 등을 통하여 청장년과 녀성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체득시켰으며 그들을 반일민족해방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림민호, 김세광 등은 고향인 장흥동(화룡시 동성향 태흥촌)에서 ‘동구청년회’를 조직하고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대중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여러가지 문체활동을 통해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면서 투쟁의 불길을 지폈다. 로창률은 소오도구(화룡시 동성향 흥영촌)에 내려가서 ‘청년회관’을 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6년 10월, 룡정에서 성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산하에 4개 지부를 두었는데 지부성원 거의다 룡정의 각 중학교 교원들이였다. 그들중 박재하, 김소연 등은 동흥중학교 교원들이였다.

학교운영권을 둘러싸고 교내에서 치렬한 투쟁이 벌어졌는데 조선총독부의 심복들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할 것을 주장했으며 박재하, 김소연, 전룡학 등 사회주의사상을 갖고 있는 교원들은 총독부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결과 일제순사들의 감시 밑에 박재하, 조병삼 등은 교사직에서 해임되고 14명의 학우회 대표들은 학적을 취소당했을 뿐만 아니라 체포, 구금되였다.

1926년 11월 29일, 일제의 간섭과 타협파들의 매국적 행위에 격분한 동흥중학교 137명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집단적으로 대성중학교로 전학해갔다. 그 투쟁은 거의 1년간 진행되였는데 이듬해 2월25일에 또다시 제2차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많은 학생들이 대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 10월, 동흥중학교에 중공지하당지부가 성립되였다. ‘9.18’사변 후 일본문부성과 조선총독부에서 심사비준했거나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나 교원과 학생들은 일치단결하여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을 반대하여 조선어사용을 견지하였고 조선어로 편찬한 국어, 조선력사와 조선지리를 가르쳤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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