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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0)-약수동의 두 항일투사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24 14:28:26 ] 클릭: [ ]

약수동의 버드나무

새롭게 세운 약수동항일기념비의 오른쪽에는 보기만 해도 름름한 천지만엽의 울창한 버드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버드나무 주위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깨끗이 정비되여있었다. 버드나무 그늘 밑에는 자그마한 하얀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는데 비석주위를 붉은 벽돌로 다져놓아 아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비석과 버드나무는 나지막한나무바자에 둘러져있는데 바자에다 자그마한문까지 달아놓아 드나들 때 그 문을 여닫아야 했다. 비석 앞면에는 ‘抗日烈士朴相活永垂不朽’ 란 글자가 진붉게 새겨져있었다.

자그마한 바자문을 열고 들어가 비석 뒤면을 살펴보니 ‘박상활동지의 혁명간력’ 이 새겨져있었다.

비석을 옹위하고 있는 버드나무는 1924년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박상활은 어린 시절 구학서당에서 한창 글을 익히며 눈을 틔워야 할 나이에 먹고 살 근심 때문에 부득불 공부를 그만두고 농쟁기를 들고 부모를 따라 밭일을 해야 했다. 1924년 룡정 동흥중학교에 다니는 약수동의 청년들과 가까이하면서 반일사상의 영향을 받은 박상활은 반일혁명의 길에 나설 큰뜻을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박상활은 집뜨락에 버드나무를 떠다옮긴 후 안해와 나어린 동생을 불러놓고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항일렬사 박상활 기념비

“난 이 나무와 생사를 같이하겠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버드나무처럼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며 자랄테요. 혁명승리의 기발이 하늘가에 높이 날릴제 버드나무는 혁명을 위해 자랑을 느낄 것이며 민족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렬들을 그릴 것이요.”

얼마 후 약수동에서도 비밀리에 초기 맑스—레닌주의단체가 조직되였다. 박상활은 이 단체에 들어가 야학교도 꾸리고 소작농들 속에서 혁명의 불씨를 뿌려갔다. 쏘베트정권의 일원으로 직접 신춘의 교양을 받은 박상활은 ‘5.30’ 폭동에 참가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에 바삐 돌았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바로 그 날 박상활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때로부터 박상활은 평강구쏘베크정부에서,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에서, 안도현도구거우적위대의 책임자로, 동북항일련군 제1군2사의 군수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 박상활은 2사에서 6사로 파견되여가던 도중 발에 엄중한 동상을 입고 유격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상처는 빵처럼 팅팅 부었고 발가락은 썩어 앙상한 뼈가 다 들여다보였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절단수술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병원에는 마취약이며 수술칼 같은 약과 의료기재가 없었다. 이에 박상활은 결연히 말했다.

“나는 두발을 잃더라도 살아야겠소. 살아서 끝까지 항일을 해야 하겠소. 이제부터 우리 함께 절단수술을 합시다.”

박상활은 통졸임통을 펴서 톱을 만든 후 수술에 달라붙었다.

동무들아 준비하자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 침략자를 때려부시고

용진 용진 나가세 기승스럽게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

나가자 판가리 싸움에 …

모진 아픔으로 하여 이마로 콩알같은 비지땀이 굴러떨어졌지만 박상활은 지그시 참으면서 이 사이로 <유격대행진곡>을 내뱉었다. 마취도 시키지 않은 다리를 통졸임통을 펴서 만든 무딘 톱으로 절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 톱날이 뼈를 썰 때의 아픔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그저 항일혁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 하나가 있었기에 뻗칠 수 있은 것이다.

력사학자 리광인씨는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2》에서 이 때를 이렇게 쓰고 있다.

첫날에는 엄지발가락 하나를 잘라냈다. 좀만 힘을 들여도 휘여드는 톱이라 일은 도무지 축나지 못했다. 수술톱이라면 한겻이면 끝을 보련만 밤낮 사흘간에 겨우 한쪽 발 다섯 발가락을 잘랐을 뿐이였다.

박상활은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지들은 연신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시체같이 굳어진 그의 몸을 주물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자리를 더듬어 톱을 찾았다. 당황해난 동지들이 하루만 쉬고 계속할 것을 애원했으나 어느 결에 톱은 그의 손에 쥐여졌다.

옹근 엿새 동안의 ‘전투’ 를 거쳐 절단수술은 끝났다. 그것은 격동 없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격렬한 ‘전투’였다. 그것은 또한 전대미문의 영웅서사시였다.

그 해 음력 12월 4일, 간첩의 밀고로 병원이 적들이 포위에 들게 되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운신 못하던 박상활은 불사조마냥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적을 유인하여 동지를 구하려는 불타는 정신은 그에게 나래를 돋쳐주었다. 박상활은 두손을 눈 속에 깊숙이 박으면서 몸을 움직여 기여나갔다. 눈우에는 박상활이 기여나간 자리가 눈띄이게 깊숙이 패였다. 벼랑가에까지 다달은 박상활은 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저 멀리서 접근해오는 왜놈들을 분노의 눈길로 쏘아보면서 큰소리로 웨쳤다.

“이 놈들아! 혁명자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서슴없이 몸을 날려 벼랑으로 굴러떨어졌다. 적들은 박상활의 자취를 따라 벼랑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사이 전사들은 안전히 전이했다. 버드나무, 약수동의 버드나무는 력사의 견증자로 되여 오늘도 설레인다. 항일혁명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친 희생된 주인의 넋을 기리고저 하늘하늘 춤추고 있다.

불굴의 녀투사 김순희

연변에는 조선민족의 영웅적 기개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아주 많다. 그중에도 약수동의 녀투사 김순희의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다.

김순희는 1910년 안도현 소사하에서 태여났다. 그는 선배들의 영향 밑에 일찍 항일혁명에 참가했다. 김순희는 1931년 2월과 3월 두차례에 거쳐 비밀리에약수동에 다녀왔다. 눈 온 뒤의 발자국처럼 그가 왔다 간 뒤에는 꼭 흔적이 남군 했다. 김순희는 당지의 군중들을 동원하여 학교를 꾸리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듯 혁명도리를 알기 쉽게 이야기했다.

 
항일렬사 김순희

1931년 4월, 김순희는 약수동적위대 대장 송태익과 결혼하였다. 약수동에 온 김순희는 적위대 대원으로 활약했고 약수동에 대한 적들의 토벌이 가심해지자 적위대는 산으로 들어갔다. 김순희는 마을에 남아 군중들을 이끌고 지주와 투쟁하면서 식량과 의복 등 필수품을 적위대에 공급해주었고 소선대를 이끌고 적후사업을 감쪽같이 수행하였다.

약수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던 투도구의 일본령사분관과 경찰서에서는 1932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 사이에 련속 세차례나 약수동을 대 ‘토벌’ 했다.

11월 4일, 이른새벽이였다. 200여명 되는 일본수비대, 경찰, 자위단 놈들이 갑자기 약수동을 3면으로 포위했다. 왜놈들이 어둠을 타서 세린하쪽으로 에돌아 기여들었던 탓으로 마을에서 몇리 떨어져있는 도끼지광(진화)의 첫 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 보초선인 마을부근의 조개산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을은 이미 포위에 든 뒤였다. 당조직에서는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간부, 유격대원, 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을 즉시 피신시켰다. 허나 만삭이 된 김순희는 조직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마을에 남아있었다.

마을에 뛰여든 토벌대놈들은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놈들은 주구놈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수색했다. 놈들은 10여채의 집과 학교에 불을 질렀다. 연기와 불길이 삽시에 마을을 뒤덮었다. 집안에서 이 참상을 내다보던 김순희는 갑자기 일제놈들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제꺽 물동이를 팔에 끼고 나서려고 했다. 문득 정지문이 벌컥 열리더니 왜놈들이 우르르 쓸어들어와서 김순희의 가슴에 총창을 들이댔다.

“어디로 가?”

“물 길러 가요.”

“흥, 물 길러 간다구? 잔말 말고 따라왓!”

김순희는 태연히 문을 나섰다. 토벌대놈들은 김순희를 보고 마을의 몇몇 아낙네들과 함께 점심을 지으라고 윽박질렀다.

마을에는 보초를 섰거나 앓아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적위대 부대장 정태경, 리덕길, 소선대 대장 김두봉 등도 붙잡혀 정태준네 뜨락에 끌려왔다.

김순희는 적들이 자기의 신분을 알고 있다고 직감했다. 정명화아주머니가 순희더러 동떨어져있는 적위대원 허룡남네 집으로 피하라고 눈짓했다. 순희의 일거일동을 은근히 살피던 토벌군은 순희를 붙잡아놓고 심문을 들이댔다.

“네 년이 김순희지?”

“그렇다! ”

“빨갱이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네 서방은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식량은 어디다 감췄느냐?”

“모른다!”

그러자 놈들은 다짜고짜로 물매를 들이댔다. 그래도 모른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으니 놈들은 모난 참대저가락을 손가락새에 끼워넣고 마구 비탈았다. 순희는 이발을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 악형을 들이대다가 나중에는 정태순로인네 집마당으로 끌고갔다. 거기에 이미 적지 않은 동지들이 끌려와있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동지들의 눈에서 큰 힘을 얻은 김순희를 더욱 견정하게 적들과 맞섰다.

놈들은 총박죽으로 순희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빈정거렸다.

“이년아, 네 년 배속에 뭐가 들어있느냐?”

“몰라서 묻느냐? 잘 나면 놈들을 잡을 영웅이구 못나면 대문거리를 쏘다니는 너희들같은 놈일거다!”

김순희의 말은 서슬 푸른 칼날인냥 놈들의 가슴을 찔렀다. 악에 바친 놈들은 더욱 미쳐날뛰였다.

“빨갱이년! 공산군 어디 갔어?”

“기다려라, 이제 곧 네 놈들을 잡으러 올거다!”

야수같은 놈들은 김순희를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만삭이 된 배우에 널판자를 올려놓고 두끝을 마구 내리눌렀다. 순희는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정신을 차리군 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니 이번에는 주전자로 고추물을 입에 쏟아넣었다. 모진 고통을 참으면서 몸을 뒤척일 때 배속의 새 생명마저 야수같은 일제놈들에게 불행을 당해야 될 일을 생각하면 심장에 칼이 박히는 것 같았지만 김순희는 입을 악물고 참았다.

“이 년, 말하지 않을테냐? 네 혀바닥이 견디나 이 피대가 견디나 어디 한번 보자!”

갈퀴같은 피대가 련속하여 순희의 입을 열려고 날뛰였다. 그러나 그건 망상이였다. 순희는 악 소리치면서 입을 악물었다. 혹시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에 비밀이라도 루설될가봐 순희는 이발로 혀를 물어 끊은 것이다. 순희는 크게 입을 벌리더니 끊어진 혀와 뻘건 피를 놈들의 얼굴에 확 뱉었다.

악에 바친 놈들은 조짚을 집안에 넣고 김순희 등 8명을 꽁꽁 묶어 그 속에 가두었다. 최후의 순간이 닥쳐온 것을 직감한 사람들은 목청껏 구호를 웨쳤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놈들은 한바탕 기관총을 련사한 후 추녀 밑에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는 련달아비장한 구호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때 김순희는 22세였다. 약수동은 김순희와 같은 우리 민족 항일투사 60여명이 뜨거운 피를 뿌린 곳이기도 하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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