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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97]‘팔굽걸음'으로 엮어낸 생명의 찬가(3)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3-26 14:24:28 ] 클릭: [ ]

 -1급지체장애인 서순애 행복 찾아 수십성상--효심, 애심의 천사

 효비를 세우다

 
서순애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상으로 조합해낸 부모의 합영 사진.

순애는 아버지가 돌아가는 그 날까지 순애를 등에 업고 삶의 리치를 하나씩 깨우쳐주신 정경을 못잊어하며 ‘바다보다 깊은 아버지 그 사랑’에 보답할 길 없는 것이 생의 제일 큰 아픔이란다. 가슴 찢기는 아픔 속에서, 가난 속에서 눈물과 한탄을 웃음과 노래로 바꾼 어머니, 순애의 상점경영 도전을 위해 경쟁자들을 설복해 물러서게 하고 한달씩이나 돈 꾸러 다니다가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에도 “순애야, xxx네가 한 이틀 기다리면 다문 얼마라도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맙냐? 좀만 더 기다려보자!”며 웃으시며 말하던 어머니, 83세의 고령까지 순애의 손발이 되여주고 삶의 등대가 되여준 어머니, 그랬음에도 순애를 보며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순애는 가슴에 묻었다 한다.

순애는 아버지 장례날 후로는 아버지의 산소를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묘비를 널로 새겨 세웠던 당시의 가긍했던 처지가 세월과 더불어 점점 순애 머리 속에 하나의 비애로 박혀졌다. 2005년에 돌아간 어머니의 유골이 아버지묘소에로 합장되였을 때 순애는 자기가 반드시 부모님 묘소에 대리석 묘비를 세워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 2011년 추석에 즈음해 서순애는 아버지가 돌아간지 33년 만에 부모님 령전에 끝끝내 대리석 묘비를 세웠다.

한편 부모님 묘비를 세우려고 작심했을 때 순애의 마음 한가운 데는 할머니도 계셨다. 순애의 할머니는 순애가 태여나기 전해에 돌아가셨지만 순애는 어머니가 40년간 할머니를 공경하고 의지해 살아온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40여년 들어왔기에 할머니에 대한 정도 은근히 깊어졌다고 한다. 하여 부모님 묘비 먼저 순서로 순애는 할머니 묘소를 찾아가 성묘하고 묘비도 세워드렸다.

순애네 오빠들은 순애가 워낙 의지가 강하고 그 마음이 절절해 부모님 묘비를 세우는 일은 순애한테 겸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는 부모님에게 평생 ‘아픈 손가락’이였잖아요. 비록 부모님의 묘비의 락관은 오빠네로 새겨놓았으나 그 묘비는 나를 낳아 키워준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그리움과 늦어진 위로의 마음을 담은 내 마음속의 효비(孝碑)라 생각합니다.”

‘아나다’와 ‘지배인(老板)’의 로맨스

 
“어서 업히워요”, 외출을 서두르는 서순애와 그녀의‘아나다’.

서순애한테는 8년 동안 같이 생활하고 있는 채태천(59세)이란 ‘남자친구’가 있는데 순애는 그를 ‘아나다’로 애칭한다.

휠체어에 순애를 앉혀 ‘일전미’ 머리방에 온 순애의 ‘아나다’가 순애를 휠체어에서 머리 씻는 자리에로, 머리를 손질하는 자리에로 훌쩍 훌쩍 안아다 앉혀주는데 시종 해빛 웃음을 짓는 순애는 어린애마냥 두손으로 ‘아나다’의 목을 그러안으며 ‘아나다’의 품에 안겨 이리저리로 옮겨진다…

순애의 머리카락 손질을 다 마친 머리방의 미발사는 머리방을 나오는 순애네 부부한테 “내가 아까 그만 그 감동스러운 장면을 록화 못해서 아쉽네요. 두 분이 너무 보기 좋아요.”하며 고개 숙여 인사한다.

머리방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는 그렇게 ‘아나다’ 한테 안아달라 해야 하고 업어달라 해야 하는 처지여서 “안아달라”는 말을 ‘안아다’로 줄이여 ‘당신’의 일본어 발음인 ‘아나다’와 ‘혼용’한다는 유머러스를 순애는 말해준다. 일본어를 자습해 일본어 문장을 읽고 쓸 수 있는 순애는 웃으면서 ‘아나다’가 어쩌면 ‘여보’, ‘당신’ 할 남편을 상상한 적 없는 자기한테 있어서 채태천씨에 대한 지금이나 앞으로의 적절한 호칭인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채태천은 서순애를 ‘지배인(老板)’의 중국어 발음으로 ‘로반’이라 호칭한다.

채태천은 순애네와 잘 알고 지내온 한 촌의 사람이다. 체소한 편인 그는 농사보다는 시내에서 보이라공 등 삯벌이를 오래했고 13년째 화룡제3중학교의 숙직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기자에게 서순애를 두고 “울바자 안에 갇혀있는 ‘꾀꼴새’로 알던 데로부터 그토록 살자고 애쓰며 상점 ‘로반’으로까지 당당하게 서는 것을 지켜 보면서 팔다리 성한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녀가 존경스럽고 돕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총명하고 자상한 그녀와 같이 지내는 것이 내 삶의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영원히 내가 존경하는 ‘로반’입니다.”라고 속마음을 터놓는다.

채태천도 뇌출혈로 크게 앓아 부모가 생전에 남긴 살림집까지 병치료에 밀어넣고 삶의 저곡에 빠진 시기가 있었다. 상점에 다니면서 점점 순애한테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단다. “아침에 눈 떠 천정이 보이면 내가 살아있구나 한다”는 말을 던지며 가게문을 나서는 채태천씨의 뒤모습이 순애한테는 점점 애처롭고 쓸쓸하게 안겨왔다고 한다.

2011년 9월 순애가 할머니 묘소에도 묘비를 세워드리자고 할 때 순애 오빠네가 다 외지에, 외국에 나가있을 때였다. 순애는 ‘아나다’의 자전거 뒤좌석에 방석을 해 깔고 오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산행길에 올랐다. 땡볕에 갈밭, 가시밭을 헤가르며 순애의 ‘아나다’는 순애가 오빠와 통화하며 알쏭달쏭 지휘하는 대로 이리저리로 헤매여가면서 온통 땀벌창이 됐어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순애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할머니 묘소를 찾아준 ‘아나다’가 고마운 건 두말할 것 없고 그 일을 통해 나는 또 한번 ‘아나다’의 직심을 보았으며 사랑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다.”고 말한다.

경비일을 하면서 짬시간이 나지면 순애의 가게일을 돕는 것이 ‘아나다’ 생활의 전부로 되였다. 순애집 문을 늦은 밤이면 밖으로 잠그어주고 이른새벽에는 와서 열어주고 부족한 상품을 보충해 도매해오는 일도 발 빠른 ‘아나다’의 당연지사였다.

지금 순애는 보장주택 2층 아빠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나다’ 는 늘 순애를 안마해주고 업고 내려와 휠체어에 앉혀 해빛쪼임도, 산책도, 쇼핑도 시킨다. 문밖으로 나와 해빛쪼임도 바로 못한 순애는 ‘아나다’를 만나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자기가 살고 있는 화룡 시가지를 산책하며 눈에 익히고 가슴에 담고 있단다. ‘아나다’ 의 등에 업히워 아빠트를 오르내리며 여기저기를 다니고 할 때면 문득문득 아버지의 등에 업히웠던 때가 떠오른다면서 이젠 ‘아나다’의 등이 자기의 행복한 귀속이라고 생각한단다.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서순애는 연변대학의학원사체기증등록접수쎈터에 사체 기증 신청서를 제출한 신청인 가운데의 한사람이다. 그는 우리에게 정녕 생명의 보귀함을 알게 하고 걸어다닐 수 있음에… 살아있음에 고마와해야 하며 그 누구도 분발하지 않을 리유가 없음을,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은 분투해서 쟁취하는 것임을 수십성상 ‘팔굽걸음’으로 절절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서순애가 연변대학의학원사체기증등록접수쎈터에 남긴 편지.

기자는 서순애한테서도 연변대학의학원사체기증등록접수쎈터에 보관된 것과 똑같은 그의 사체 기증 신청 등록서를 보았다. 그 등록서와 함께 서순애는 집 서류함에서 다른 한부의 사체 기증 신청 등록서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서순애 ‘아나다’ - 채태천의 것이였다. 채태천은 “나도 ‘로반’ 가는 길을 따라가야 그 세상에 가서도 ‘아나다’ 로 될 수 있잖아요?”라고 말하면서 웃음 짓는다. 두 사람은 2016년 7월 30일, 연변대학의학원을 찾아갔을 때 같이 그 등록서를 완성했는데 서로가 상대방의 ‘위탁인(受委托人)’란에 자기 이름을 싸인해놓았다. 서순애는 사체 기증 결단은 자기네가 행복 속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단 순애는 ‘아나다’가 애처로와 아직 ‘아나다’의 사체 기증에 대해 ‘의견을 보류’ 하고 있었다.

서순애가 의학원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수고 많은 의학박사님들 안녕하십니까?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저와 같은 병이 더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발병되였다 하더라도 무상치료 해줄 것을 바랍니다. 저의 장기(사체) 기증이 세계 의학계에 저그마한 힘과 도움이 되였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장기 기증인 서순애 2016년 7월 30일”

지금 서순애의 체중은 25키로그람밖에 안된다. 사체 기증 신청 시는 서순애가 ‘내 생명이 종착역에로 다가가는구나’로 느낄 지경으로 지금보다 체중도 훨씬 줄었고 컨디션이 많이 나빠졌었다고 한다.

“편지의 날자는 그 날로 밝혀졌으나 그 뜻은 어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나의 념원이고 뜻입니다. 비로소 내 생에 해야 할 마지막 일을 마쳐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증 의향서를 체결한 지 2년 반이 지났고 당시 보다는 몸이 많이 회복되기도 했으나 그 뜻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며 서순애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서순애와 그의‘아나다’가 2019년 설명절을 맞으며 남긴 기념사진.
 
 
상점 경영에 그냥 미련을 둔 그는 ‘거스름돈 찰’ 등 공구들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젖 먹던 힘을 다한 ‘팔굽걸음’으로 자립한 서순애는 로인절이면 로인들에게 부식품을 보내드리거나 성금을 내놓는다.

어려운 이웃 돕는 데 힘 닿는 한 서순애는 열성을 다한다.

‘5.12’ 문천지진이 일어난 후에도 서순애는 리재민들을 걱정하여 의연금 200원을 ‘희망복리원’을 통해 전달했다.

2013년 상점을 휴업한 후 순애는 지체할세라 한가지 민생심사(心事)를 제안한다. 상점에서 봉착했던 행인 화장실난제에 근거하여 그 손으로 화장실환경건설에 대한 소견을 또박또박 쓴 편지와 성의금 100원을 ‘아나다’가 ‘운전’해준 휠체어에 앉아 시정부 대청에 가 관련 부서에 교부했다.

진작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삶을 보람차게, 행복하게 살려는 만단의 각오가 되여있는 서순애이기에 요즘 그는 또 위챗상 경영에 도전해나섰다. 며칠사이에 쌀 500키로그람을 팔았다.

서순애의 생명의 찬가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끝)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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