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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3)

편집/기자: [ 정현관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01 10:35:29 ] 클릭: [ ]

김춘범 공인회계사, ‘털 끝 하나 뽑지 않는 구두쇠’

1934년 2월에 출생한 김춘범은 제1자동차공장의 첫 6명 국가 공인회계사(注册会计师)중의 한분이다. 제1자동차공장에서 40년동안 일하면서 항상 성실, 근면, 검소로 자신을 요구했으며 이 중에서도 성실한 사업작풍은 그의 40년간 근무 인생의 기본원칙이였다.

제1자동차공장 건설 당시를 회억하는 김춘범

김춘범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1951년 겨울에 졸업을 앞두고 16살 나이에 참군해 항미원조전쟁에 나갔다가 1952년에 돌아왔고 그해 가을에 길림성재정전과학교에 입학, 1954년 7월 졸업과 동시에 세워진지 불과 일년밖에 안되는 장춘제1자동차공장 동력처에 배치받았다.

“여기에 옛말이 하나 있습니다. ” 김춘범로인은 길림재정전문학교 입학 당시가 인상이 깊었는지 이 이야기를 꼭 하겠다고 하였다. 입학통지를 받고 학교에 가는 길이였다. 새벽에 길림역에 내려 걸어가는데 무언가 발에 걸려 주어보니 돈봉투였다. 그것도 64원이나 되는 돈봉투였다. 가정도 곤난했고 배불리 먹지도 못했던 그 시절 64원이란 엄청난 유혹이였다. 하지만 성실한 김춘범은 그 돈을 고스란히 학교에 바쳤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 신입생이 하도 성실하다면서 많이 관심해주었습니다.”김춘범로인은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2년간 학업을 마치고 1954년에 배치받은 곳이 제1자동차공장 동력처의 회계일터였다. 김춘범이 배치받았을 때만 해도 공장은 한창 건설초기였다.

김춘범의 기억에 따르면 그 당시 공장에 소속된 로동자보다 전국 각지에서 온 지원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숙사가 없어 공장과 아주 멀리 떨어진 제1백화상점 부근의 허름한 려관에서 생활했습니다.” 아침이면 김춘범은 동료들과 같이 걸어서 장춘역 부근의 초대소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전차로 공장에 출근했다.

제1자동차공장 열처리직장 정치처 동사자들과 함께 있는 김춘범(왼쪽 앞줄 가운데)

차체공장, 김춘범의 제안으로 누구도 오기 싫어하던 공장이 ‘부자동네’로

김춘범은 1980년대 초반 차체공장(车身厂) 재무과에서 과장으로 일할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면서 이렇게 회억한다. 당시 제1자동차공장에서 생산한 ‘해방패’ 트럭이 고장나면 전국에 널려있는 자동차수리공장에서 제1자동차공장에서 생산하는 부품을 구매해 사용하였다. 김춘범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자동차수리공장이 약 140개였고 종사하는 일군은 5,000여명에 달했다.

부품 수요량은 갈수록 많아 지는데 자동차공장에서 제공하는 물량은 한정되여 있었다. 원인은 로동자들의 인건비가 제한되여 있기에 연장작업을 할 수 없어 생산이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번 회의에서 김춘범은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부품을 생산하는 원자재를 자동차수리공장에서 제공하고 대신 가공은 자동차공장에서 하는데 가공비용은 현금으로 받는 것이다. 이렇게 받은 가공비를 로동자들의 초과 근무 수당으로 지불해 생산량도 늘이고 돈도 벌며 또 전국 140여개, 5,000여명의 수리공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제1자동차공장에서 동사자들과 함께(뒤줄 왼쪽 첫번째 김춘범)

허나 이는 당시 재무규정에 어긋나는 처사였다. 그래도 로동자들의 수입이 늘어나고 자동차수리공장도 같이 살릴 수 있어 일거량득의 일이니 차체공장에서는 김춘범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김춘범은 재무기록을 빈틈없이 했다. 후에 이 일로 김춘범은 2달 동안이나 상급의 조사를 받게 되였다.

조사일군 앞에서 김춘범은 “재무제도로 봤을 때 확실히 문제가 있다. 처분을 해도 좋다. 하지만 이는 로동자들의 수입을 늘이고 수많은 수리공들을 위해서였다.”라고 해석했다.

조사 결과 자동차수리공장으로부터 받은 1,200여만원에 달하는 가공비가 일전 한푼 다른 곳에 사용한 적이 없었고 모두 로동자 초과 근무 수당으로 썼다. 깨끗한 재무기록과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상급부문에서는 김춘범에게 내리려던 처분을 취소, 그 후 김춘범이 제안한 이 방법은 상급 부문의 인정을 받아 공장에서 정정당당하게 실행할 수 있게 되였다.

“생산량이 올라가고 돈주머니가 불어나니 로동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 뒤로부터 차체공장이 제1자동차공장에서 소문났지요. 과거 거들떠보지도 않던 데로부터 너도나도 오고싶어하는 공장으로 탈바꿈했지요.”

길림성재정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앞줄 오른쪽 세번째)

김춘범의 제안으로 차체공장은 돈 한푼 팔지 않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 때 동료들이 저한테 붙여준 별명이 ‘털 끝 하나 뽑지 않는 구두쇠’입니다. 정말로 공장의 돈은 일전 한푼을 들이지 않으면서 면모를 개변시켰으니깐 말입니다.”

김춘범은 사업의 수요로 제1자동차공장당위 조직부, 당학교, 인사처 등 여러 행정부서에서 사업하였으며 공장의 조선족대표로도 있으면서 조선족들의 곤난을 해결하기에 앞장섰다. 1992년에는 제1자동차공장의 파견으로 료녕성 릉원자동차공장에 가서 재무총감을 담임, 1995년 퇴직후 공장의 수요로 2년간 더 근무하다가 1997년에 정식으로 퇴직했다.

/길림신문 리철수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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