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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욱: 농민이 잘 사는 농촌건설에 일조할 터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01 15:03:52 ] 클릭: [ ]

발명가 김태욱씨와 그의 안해 허명순.

[인류가 곡식의 씨앗을 심어 수확하는 농경생활에 참여한지는 벌써 만여년이 력사가 흘렀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4000여년전부터 밭을 일구고 김을 매기 시작하였으며 철기시대에 들어선 1400여년전부터는 철제도구와 길들인 동물을 리용하여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평원지대나 산간지대를 막론하고 벼, 옥수수, 콩 등을 주로 재배하는 동북지역 농민들은 이같은 농경생활을 수백년 해왔고 현대과학이 발전한 현재에도 전통방식으로 힘든 농업로동에 종사하고 있는 농민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환경속에서 농민들의 힘든 로동환경을 개변하기 위하여 묵묵히 농기계를 발명하고 보급하는 일에 앞장선 한 농민발명가의 일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혼자서 차거운 논에 들어가서 벼모를 하는 안해를 보기가 정말 안쓰러웠지요.” 연변태욱농기유한회사 리사장 김태욱(59)씨는 농기계발명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 듯 하얀 이를 드러낸다.

룡정시 태양공사 룡성대대(현재의 연길시 조양천진 태양촌)의 하방호(문화대혁명후기 농촌을 지원하고 간부들을 단련시킨다는 명목하에 농촌에 내려 보낸 5.7간부 가정을 일컫는 말)가정에서 태여난 김태욱씨는 태양에서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마치고 1978년부터 농업에 종사하였다.

일본류학까지 한 그의 부친은 해방전에 안도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해방후에는 화룡현 팔가자진 중남학교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룡정시민정국에 조동되여 근무하였다. 그런데 일본류학과 사립학교 운영 경력이 문제되여 문화대혁명시기 가족을 이끌고 룡성대대로 내려왔던 것이다. 후에 정책 시달로 원 단위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슬하에 6남매를 키우면서 생산대에 진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 그대로 농촌에 남았다고 한다.

“저의 부친은 말수가 적은 분이였는데 힘든 로동을 하는 농민들을 도와 화학비료 덩어리를 부수는 기계와 비닐박막을 씻는 기계를 만들기도 했지요.” 그의 기억에 아버지는 항상 근엄하고 속궁리가 깊은 분이였다. 김태욱씨가 태여날 때 마침 아침해가 솟아오르는지라 이름도 불끈 솟아오를 욱(旭)자를 붙여준 분이란다.

개혁개방으로 농촌에서 호도거리를 실시하자 동생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 한편 목기공장을 꾸려 수입을 올려 린근에 소문난 감농군이 된 김태욱씨는 한때 연길서시장에 가구매대를 앉히고 조선족옷장, 식장과 밥상과 같은 전통가구를 대량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맞춤식 가구와 복합가구가 가구시장을 점령하면서 목기공장의 경기는 하루가 다르게 썰렁해졌다.

김태욱씨가 나무재료를 리용하여 제작한 제3대 이앙기.

1987년에 이웃마을의 꽃같은 처녀를 안해로 맞은 김태욱씨는 목기공장을 접고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다가 로씨야장사길에 나섰다. 1991년부터 울라지보스또크, 하바롭스크지역에서 복장장사를 하다가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2년만에 안해를 고향에 돌려보낸 김태욱씨는 될 듯 말 듯한 장사를 5년간 더 견지하다가 결국 홀로 고생하는 안해를 돕기 위해 1998년 봄에 귀국한다.

“그때 그 많은 논에 홀로 손으로 벼모를 꽂는 안해가 불쌍하기 그지 없었지요. 그래서 논두렁에 앉아 어떻게 하면 쉽게 벼를 심는 방법이 없을가 궁리를 하게 되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농사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고 또 한헥타르 푼한 논 때문에 비싼 이앙기를 갖출 처지도 못되였던 터라 대부분 농민들은 손으로 벼모를 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겼었다. 거기에 개혁개방을 맞아 젊은이들은 도시로 외국으로 나가다보니 농촌마을은 로인들만 남아 힘든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논두렁에 우두커니 앉아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안해의 눈길이 고울리 없었건만 그는 끝내 뿌리치고 목공소에 돌아왔다.

‘내손으로 간단하면서도 실용성이 있는 이앙기를 만들리라!’고 생각을 굳힌 그는 이튿날부터 걸기와 번지를 놓고는 이앙기연구에 몰입했다. 련이어 며칠밤을 패던 그가 수동식 이앙기를 완성한 것은 꼭 열흘만이였다. 그것도 철제품이 아닌 목조품이였다.

“목공일을 하다보니 목제품을 가공하는 재간밖에 없었지요. 거기에 철제 부품은 가공하기도 힘들었고 재료도 얻기 힘들었어요.”

목제구조로 된 이앙기를 바라보던 안해는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강철로 만든 이앙기도 논에 들어가면 인차 고장이 생기거나 벼모가 제대로 심어지지 않아 보식을 해야 하는 판에 널판자로 만들다니…

“그런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논에 들어간 이앙기가 무겁지도 않았고 손으로 자전거페달을 슬슬 돌리면 나무저가락이 착착 벼모를 집어 논바닥에 령활하게 꽂는 거예요.” 평원지대인 룡성촌은 논배미가 커서 한배미에 벼모를 내는데 보통 하루해가 걸렸는데 남편이 나무로 만든 이앙기를 리용하니 반나절에 끝낼 수 있었고 서서 일하니 허리도 아프지 않았다고 안해는 자랑한다.

이앙기 모형으로 시연하고 있는 김태욱씨.

그것이 발단이였다. 자기절로도 희한한 일을 한 것 같아 연길과 룡정에서 물리교원으로 일하는 큰형님과 매형을 불러 이앙기를 자랑했다.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36개의 부품이 자그마한 공간에서 서로 자리를 피해주면서 12가지 민첩한 기계동작을 통해 벼모를 논바닥에 정확하게 꽂는 것을 지켜보던 큰 형님이 손벽을 치면서 이건 특허를 신청할 만한 성과물이라고 엄지를 내들었다.

그것이 힘이 되여 모철이 지나면 로씨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목공소를 실험실과 제작실로 삼고 이앙기연구와 제작에 빠져들었다.

“거의 매일마다 아침 일찍 나가서는 저녁 늦어서야 들어오군 하였지요. 때시걱을 에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고 눈에 쇠부스러기가 들어가 고생한 적도 많았어요.” 그의 안해 허명순씨는 둥글소같은 남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남들이 사온 신형의 이앙기를 참고하면서 만들면 될 일이 아닌가고 하면 남의 것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고 하면서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편을 그녀는 도무지 리해할 수가 없었다.

김태욱씨는 그로부터 10여년간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거쳐 각종 결함을 보완하고 새로운 공능을 가첨하는 등 개진을 거친 제6대 태욱호이앙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였는데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최종 길림농업대학에 기술양도를 하는 것으로 이앙기발명을 한단락 지었다.

“인젠 편한 날이 왔거니 생각했는데 또 작업실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는거예요.” 허명순씨는 남편이 10여년간의 노력으로 이앙기발명을 끝냈으니 인젠 발편잠을 자게 되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파종기를 만든다고 몇년간 고생했다고 토로했다.

2001년부터 그가 획득한 전매특허증서.

“수전농사나 한전농사나 막론하고 고양이손도 빌려쓴다는 때가 바로 파종철이거든요. 그만큼 사람의 일손이 많이 수요된다는 건데…” 김태욱씨는 고향을 지키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로인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어깨를 지지 누르는 로동강도를 덜어주고 싶었다고 해석했다.

밭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뿌리를 치고 비료를 내고 밭고랑을 짜개고 씨앗을 떨구고 씨앗을 묻고 다져주는 등 여러가지 환절때문에 많은 로력이 수요됨을 알고 있을 것이다. 김태욱씨는 이러한 환절을 하나의 기계가 완성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또 쉽게 지치는 사람이나 동물대신 농용뜨락또르를 리용하는 쪽으로 연구방향을 잡았다. 약 3년간의 연구와 개발을 거쳐 현재 그는 다공능정량시비선경파종복합기(多功能精量施肥旋耕播种一体机)를 만들어냈는데 그동안 8개의 전매특허를 획득해서 연구성과가 법률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김태욱씨는 자기가 개발한 파종기는 조작이 간편하고 공능이 다양한 것이 특점이라고 소개한다. 무릇 밭에 심을 수 있는 옥수수, 콩, 락화생, 녹두, 수수, 해바라기, 조, 깨는 물론 약재까지 파종할 수 있으며 종자와 비료의 량을 과학적으로 공제하기에 다른 파종기에 비해 종자와 비료를 절반이상 절약할 수 있다. 거기에 뜨락또르동력을 리용하고 혼자서 작업하기에 헥타르당 700여원의 각종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직도 언 땅에서 파종시연을 하고 있다.

“지난 3년동안 제가 파종기로 마을 농민들에게 파종해주면서 관찰하였는데 정량시비와 정량파종을 하면 전통파종에 비해 10%의 증산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난 2016년에 촌에 연길시5합농기계농민전업합작사를 설립한 김태욱씨는 자기가 제작한 파종기로 합작사의 농민들에게 무료로 봄파종을 해주면서 파종기의 각종 공능을 완벽하게 개진하였는데 지난해까지 자기가 설계하고 조립생산한 파종기 120대를 동북지역 여러 농촌에 판매하여 200여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지금 농촌마을들에서는 헥타르당 400~500원씩 내고 파종하고 있는데 지난해 저희 파종기를 구매하여 당해에 본전을 뽑고 수입을 올린 농민들도 여럿 됩니다.” 하루에 4헥타르 넘게 파종할 수 있는 이 파종기를 리용하여 지난해 봄에 100여헥타르의 면적을 파종한 훈춘시 하다문향 마적달촌의 한 한족농민은 올해에 파종기 두대를 더 구매하겠다고 하면서 예약금까지 보내왔다고 한다.

현재 국내외 대형농기계공장들에서 생산하는 최신식파종기들을 보면 주로 대형농장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대형기계들로서 가격이 비싼데다 컴퓨터화한 정밀조작으로 로인 위주인 조선족농촌마을들에서는 그닥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립중에 있는 파종기.

김태욱씨는 지난 3월초부터 송원, 길림, 녕안 등지의 한족 농민들에게 3차의 현장전시활동을 진행하였는데 보편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땅이 다 녹으면 파종철전에 연변지역에서도 이같은 현장전시활동을 하게 된다고 표시했다.

김태욱씨는 앞으로도 농민들이 잘 사는 농촌을 건설하는데 수요되는 농기계나 시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던 로력형 농민들은 농기계를 리용하여 힘든 로동에서 해방되여야 하며 과학적인 방식으로 농사일을 안배하고 수익을 제고할 수 있는 넓은 안광을 가진 젊은이들이 하루빨리 이런 대오의 빈자리를 메워 농업강주로 발돋움하는 새 연변건설에 힘과 지혜를 바칠 것을 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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