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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구술시리즈-3] 연변의 문교서기와 그의 아들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10 16:00:22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3 (김희관편)

아버지는 주덕해 주장의 비서로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수많은 일을 본격적으로 도와드렸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들인 사건은 바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을 위한 수많은 조사연구와 문건작성 작업이였어요.

자료사진: 1950년《세계평화선언》에 싸인하는 연변전원공서 주덕해 전원과 최채 선전부장,김문보 비서(왼쪽 첫사람).

연변대학 당위서기 및 연변주 문교서기를 겸직한 아버지

1953년에 아버지는 조직의 수요에 따라 비서직을 그만두고 연변주위 재정경제부장을 맡아 몇 년간 연변의 농촌과 기업, 광산 등 경제1선을 찾아 조사연구를 하고 당의 정책을 실천하는 사업에 몰두했지요.

1956년 음력설을 쇠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 주덕해 주장은 아버지를 불렀대요. “문보동무, 여기 좀 들어와요. 연변대학에 가서 당위를 세우고 당위서기를 맡아야겠어요.”

“연변대학은 학문의 최고전당이고 교수님들이 많은 곳인데 내 이 나이, 이 문화수준으로 어떻게 교수님들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무거운 철궤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말을 잇지 못했대요.

“그게 무슨 대수요? 당의 방침정책이 있는데. 그만한 재간이면 못할 것 없어요. 성당위에서 이미 비준이 내렸으니 그리하세요.”

조직담화가 있은 그 날 밤 아버지는 장밤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소리내여 울기까지 하였대요. 이렇게 33살 밖에 안 되는 아버지는 그해 년 초에 연변대학당위 서기로 임직했지요. 아버지는 로혁명가이며 연변대학의 부교장이신 림민호 선생의 도움하에 연변대학의 당총지를 당위로 승격시키는 사상,조직,기관 건설사업을 원만히 끝내고 당위사업을 시작했지요.

자료사진: 1956년, 공청단중앙 제1서기 호요방(앞 왼쪽)이 연변대학을 시찰할 때 림민호 부교장(앞 오른쪽)과 김문보 서기(뒤 왼쪽) 배동.

그해 여름 중국공청단 제1서기 호요방동지가 연변대학을 방문하시여 시찰하시면서 연변대학의 공청단사업과 대학생사업이 잘 진행되는데 대하여 칭찬을 해주시여 커다란 고무를 받았다고 해요.

그때는 대약진시기라 정치운동도 많았지요. 그 와중에 아버지는 연변대학이 조선민족대학으로서 대부분 교원들이 한어수준이 낮은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전교적인 '한어대약진' 운동을 일으켰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족은 쌍어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구요. 조선어도 배울 뿐만 아니라 한어도 잘 배워야 앞으로 중국 땅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잘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조였어요.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이 신조를 지켜 우리 다섯 자녀들에게 쌍어교육을 실시했지요. 그리하여 나는 1958년에 연길시제2중학교를 졸업한 후 한족학교인 연변3고중에 입학하여 한어로 고중교육을 받았어요. 그리고 둘째 희정이도 넷째 희련이도 다섯째 희덕이도 모두 조선족소학교, 중학교를 다닌 후 한족학교를 다녔어요. 셋째 희동이만 문화대혁명시기여서 그대로 조선족학교를 다녔을 뿐이였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었어요. 우선 꼭 조선어를 잘하고 조선민족문화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였어요.아버지는 우리가 어릴적부터 자식들과 함께 《춘향전》,《심청전》,《흥부전》등 조선문고전을 다 읽으면서 감동적인 대목에 가서는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기뻐하군 하였지요.

1956년 중공중앙 전국고급지식분자사업회의에 참가한 김문보(두번째줄 가운데 흰외투 입은 사람)

그리고 매일 아침 일찍부터 맑스-레닌, 모주석의 문화교육방면의 저작들을 열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문관지’ (古文观止) 등을 독학하면서 대량의 필기를 하였어요. 로신전집도 읽으셨고 당시송사(唐诗宋词)며 모주석의 시사(诗词)를 우리와 함께 읊조리며 중화문화의 깊은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주셨어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배려하게《삼국연의》,《홍루몽》, 《수호전》, 《서유기》 등 고전소설과, 고전들을 어린시절부터 읽었어요.

아버지는 주덕해어른을 배동하여 팔도에 하향가서 민간이야기군 황구연의 집에 들려 옛말을 듣기를 좋아했는데 리근전작가에게 글로 기록하도록 한 후 유인본 책자를 만들어 기관간부들에게 추천하기도 했지요. 그때 우리는 아버지가 가져다 주는 유인본 <황구연구전옛말집>을 잘 읽었지요. 지난 세기 90년대 새로 나온 《황구연전집》을 읽으면서 옛날에 유인본을 읽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1956년 겨울, 아버지는 당중앙에서 소집한 <고급지식분자사업회의>에 참석하여 중남해에서 모주석과 류소기, 주은래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도 누렸지요. 아버지가 연변대학에서 당위서기로 있으면서 고급지식분자양성사업과 쌍어교육에서 전국의 선진단위로 크게 표창받게 되였어요.

1960년 6월에는 연변대학이 전국군영단위(全国群英单位)로 선정되여 아버지와 당시 연대 력사학부 당총지 서기였던 박문일선생과 함께 전국군영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지요.

1956년 아버지가 연변대학 당위서기로 임명된지 40년후 저희 큰 동생 김희정이 연변대학의 당위서기로 임명되여 연변대학을 <211>대학반렬에 올려놓는데 기여를 한 것 또한 우리 가문의 경사였지요.

1961년초, 길림성당위에서는 또 아버지를 중공연변주위 서기처 서기(문교서기)로 임명하였지요.그때부터 아버지는 더욱 바쁘셨습니다. 그는 민족교육을 첫자리에 놓고 민족문화예술발전에도 심혈을 들였습니다. 그는 연변의 중소학교 교과서와 참고서를 열독하고 저희 동생들이 다니는 소학교, 중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의 강의를 함께 들으면서 민족교육사업, 조선족의 한어교육 등 과제들을 연구하였어요.

그리고 연변의 벼농사와 사과배 재배 등 분야의 과학기술발전에 커다란 주의를 돌려 경상적으로 신풍대대의 최죽송 농민의 벼풍산경험은 물론이고 안도현 만보촌 류창은 청년의 고산지대 우량 벼종자 배육과학실험현장을 찾아 새로운 경험을 모색하고 곤난을 해결해 주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렸어요.

자료사진: 1966년 봄, 안도현 명월구기차역광장에서 사회주의선전교육 관련 연설을 하고 있는 김문보(중간).

아버지는 문예전선일군들과 함께 하향하여 두터운 우정을 나누면서 가무창작지도를 하였어요. 60년대초 화룡현 로과촌 두만강변에서 조선의 기관사가 얼음물에 빠진 로과공사의 어린이를 구해준 사건이 발생한 후 아버지가 직접 가무단의 최삼명 작곡가와 방죽송, 김태갑 등 작사자들을 거느리고 당지에 내려가서 당사자들을 방문하면서 노래《 친선의꽃》 창작을 지도하였지요.

두만강 7백리 친선의 꽃이 피였네

두나라 인민들의 친선의 꽃이 피였네

이웃나라 조선형제 얼음 속에 뛰여들어

중국아동 구원하니 백설우에 친선의 꽃이 피였네

그리고 연변연극단의 극작가 황봉룡선생은 늘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와 함께 대형연극극본 《장백의 아들》을 수개하는 작업을 벌렸어요. 지금 보면 대형연극 《장백의 아들》은 중국조선족의 경전 연극작품이기에 손색이 없다고 봐요.

아버지는 문화예술일군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렸지요. 장고춤을 추는 리록순이 몸이 허약하다고 보신탕을 먹도록 배려해 주기도 했지요. 그리고 북경에서 거행된 <전국소수민족예술경연대회>때에는 연변가무단, 룡정현문공단, 화룡현의 문예일군들과 함께 한달씩 북경에 체류하면서 제일선에서 문예경연활동을 지도하군 하였어요.

1983년 9월, 제가 주문화국 국장으로 부임하여 여러 문예단체들을 방문하게 되였는데 로일대 문예일군들께서 아버지의 업적과 인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아 참으로 감동을 받았지요. 어떤 분들은 눈물이 글썽하여 아버지의 얘기를 꺼냈어요.

“야- 김서기는 그토록 자애롭고 문예일군을 존중해주고 문예일군들의 심정을 잘 헤아려 주었지요!"

"간부의 자제는 솔선수범해야"

내가 고중 때 어느 하루,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왔어요. 정판룡선생이 쏘련류학을 마치고 연변대학으로 돌아와 인사차 우리 집에 찾아오셨어요. 그도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이 고향이여서 나에게는 고향선배였어요. 그는 쏘련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하면서 《아﹒똘스또이의 3부작 <고난의 길>에서의 인민묘사원칙》에 대한 론문을 300여 페이지 집필하여 중국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쏘련문학과학부박사》학위를 취득하였어요.

정판룡선생이 우리 집을 방문한 그날부터 그는 나의 본보기가 되였지요. 왜냐 하면 그때 로어를 좋아하고 로씨야문학에 흥취가 많아서 우리 반에서 로어과대표를 했고 앞으로 대학공부도 로어와 로씨야문학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시절이였거든요.

그날 정판룡선생이 나더러 로어를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였어요. 내가 랑독하는 것을 듣던 그는 아주 발음도 좋고 잘 읽는다며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어요. 그때 아버지는 놀란 기색으로 나와 정판룡교수를 번갈아 보시는 것이였어요. 그의 출현으로 나는 로어를 더욱 잘해야겠다고 다짐하였고 앞으로 로어로 문학관련 연구를 하고 싶어 대학의 로어학부로 가기로 작심했어요.

1968년, 기념사진을 남긴 큰아들 김희관(가운데)을 비롯한 5명 자녀들(자료사진).

그러던 1962년 초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대화를 하자면서 나를 사무실로 불렀어요.

“어떻게 공부는 잘하고 있는 거니? 지망은 아직도 로어와 로씨야문학이겠지?”

“녜, 로어를 많이 공부하여 대학 로어계로 가려고요.”

“글쎄, 로어는 아무 때나 배울 수 있으니 과외로 배우는 걸로 하고. 당에서 지금 3년 자연재해후 ‘조정, 공고, 충실, 발전’의 8자 방침을 제기하고 있다. 농업을 중시하고 농촌을 중시하고 농업을 배울 것을 호소하고 있단 말이다. 북경시 시장 만리도 아들을 농촌에 보냈다. 너는 간부의 자제로서 솔선수범하여 농업을 배우면 좋겠다.”

아버지가 이렇게 정중하게 말씀하는데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와의 담화에 결국에는 승복한 거예요. 그래서 3개월 남겨두고 다시 자연과학분야의 시험을 준비했지요.

그때 전 주 대학생학생모집위원회 주임이 아버지였어요. 연변농학원에 나의 이름이 일찍 가 있었으니 어떻게 해요. 그때 아버지는 늘 “시험쳐 못 붙으면 농촌에 가 농사를 배워라. 안도 만보에 가 벼육종가 류창은의 학도로 되여 농업과학자가 되거라.”라고 당부하기도 했어요.

1962년 9월 5일, 저는 연변대학농학원에 입학하게 되였어요. 로어성적이 83점으로 우수했구요. 한어와 로어 두 과목을 청강하지 않게 되니 그런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로어와 인문학 공부를 마음껏할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학생회 주석도 하고 선전부 부장도 겸하면서 전교의 문화예술활동을 조직했지요.

그 시절 매년 <12.9 학생절>이면 전교 문예콩클이 거행되였는데 저는 우리 반 40명이 참가하는 한어<합창시>을 창작하여 매번 우승을 따냈지요. 그때 동창생들은 대부분이 한어를 잘 못하였는데 한어<합창시> 연습을 하면서 많이 배운다고 했어요. 대학시절 자기도 모르게 학생문예활동을 실천하면서 얻은 경험이 후날에는 문화사업의 밑거름이 되였지요.

그러다 문화대혁명이 터졌어요. 그 바람에 1966년 졸업생이 1967년에 졸업하고 휴식하다가 1968년 음력설이 지난 후 나와 3명의 동창생은 북대황 국영 853농장에 배치받아 가게 되였어요. 뢰봉을 따라배우는 시절에 입당한 학생당원으로서 가장 간고하고 먼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때 아버지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주덕해’의 보황파가 되여 중공연변지위 3층에 갇혀있었어요. 나는 북대황으로 떠나기전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어요.

“아버지, 저는 떠나갑니다. 허허벌판 북대황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허허벌판...”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더니 “그곳은 왕진장군이 개척한 나라의 량식창고인데 거기 가서 잘 배우거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더니 계속 말씀하셨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근심말거라. 종종 편지를 쓰거라, 특히 어머니에게. 그리고 한가지만은 잊지 말거라. 아버지는 당에 충성하고 주덕해동지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몇년 후에 만날 때에는 네가 농업과학기술자가 되여 만나자꾸나!”

복도에서 둘이 마주앉아 이러저런 말을 주고받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콱 끌어안는 것이였어요. 저는 이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품에 안겼지요. 아버지는 떠나는 이 큰아들에게 군용외투를 걸쳐주었지요...

며칠후 나는 동창생들과 함께 당당하게 떠났어요, 북대황으로.

/ 글 김청수 기자, 영상사진 김성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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