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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4)-항일무장대오 건립을 위하여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16 16:36:05 ] 클릭: [ ]

용감하고 지혜롭게 일제의 무장을 탈취하고

토배기병기공장서 자체로 ‘연길폭탄’ 제조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공산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 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 후 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조선인)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 파견하였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 후인 9월21일,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 말았다.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동만 각 현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였던 것이다.

“당시 회의 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 리광, 채수항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중 리광, 량성룡, 오중화, 오중성, 김철 등은 왕청현 대표들이고 채수항, 김일환은 화룡현 대표들이며 오빈, 리청산 등은 연길현 대표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되는 점은 왕청현 대표인 오중화는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 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 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 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 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 데 관한 문제, 각급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 데 관한 문제, 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 데 관한 문제, 춘황투쟁을 준비할 데 관한 문제, 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 데 관한 문제 등 여러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의 의의에 대한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

 
 
 
유격대병기공장에서 사용하던 도구

무기탈취투쟁

추수춘황투쟁을 거친 연변인민들은 일본침략자와 싸우자면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무장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독립운동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로씨야로부터 얼마든지 무장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로씨야가 이미 사회안정이 실현되여 한창 사회주의건설의 열이 오르고 있는 때여서 무기를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사회환경이 아니였다. 또 중국정부의 공산당반대의 리념차이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 로 하여 무기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고 연변인민들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빈주먹 밖에 없어 군자금을 헌납할 힘도 없었다. 때문에 오직 두손으로 적들의 손에서 빼앗은 무기와 야장간같은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칼, 날창, 자작폭탄 같은 것이 유격대를 창건하는 최초의 무기가 되였다.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대책을 강구했는데 생사를 불문하고 지혜롭게 적의 무장을 탈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치로 군경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놓고 무기를 빼앗기도 했으며 고추가루를 놈의 눈에 쳐놓고 총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충진이라는 젊은 형제가 총을 빼앗은 이야기도 참 지혜롭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교수는 무기탈취를 위해 싸운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1931년 여름 어느 날 연집강부근의 밭에서 기음을 매던 충진의 형제는 순경 한놈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흔들먹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놈의 총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충진의 형제는 순경놈이 들으라고 우정 호미로 돌을 탕탕 치면서 인기척을 냈다. 강을 건느려고 주춤거리던 순경놈이 아니나 다를가 충진의 형제를 불렀다. 충진의 형제는 내키지 않은 척하면서 느릿느릿 순경놈한테로 다가갔다. 그 놈은 충진이더러 자기를 업어서 강을 건너라고 호령했다.

강심에 이르니 물이 넙적다리를 넘어섰다. 순경놈은 구두가 젖을가봐 몸을 솟구치며 두 다리를 곤두세웠다. 순간 충진이는 순경놈을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 후 한손으로 대가리를 눌러놓고 다른 한손으로 제꺽 권총을 빼냈다. 그리고는 강에서 나와 산으로 올리 달았다. 물참봉이 되여 강에서 기여나온 순경놈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였다.

충진의 형제는 그 길로 유격대에 찾아가 총을 바치고 유격대원이 되였다.

녀성들도 지략으로 무장을 탈취하였다. 1932년 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적보안단 졸개들은 늘 왕우구 토성촌에 와 행패를 부리군 하였다. 그날도 보안단 졸개 일곱놈이 마을 북쪽의 한 초막에 기여들었다. ‘삼동서’로 분장한 부녀회 회원들은 더운 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그놈들을 ‘열정’적으로 맞았다. 점심에 술까지 ‘대접’받고 거나해진 놈들은 저마끔 나자빠져 코를 골았다. 땅거미질 무렵 잠에서 깨여난 놈들은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삼동서’는 다시 주안상을 차려놓으면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극구 말렸다. ‘삼동서’의 ‘뜨거운 열정’에 입이 헤벌쭉해난 일본놈은 다시금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는 쓰러져 잤다. 이 때 짬을 엿보던 적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어 놈들의 총을 빼앗은 다음 ‘연길폭탄’으로 일곱놈을 몽땅 죽여버렸다.

‘베감투’이야기도 동만인민들 속에서 오래동안 류전된 전설적인 이야기의 하나이다.

개산툰지구에서 활동하던 지하공산당원 리동일은 총을 탈취해가지고 유격대로 급히 오라는 상급 당조직의 지시를 받게 되였다. 동지들과 토의 끝에 선구촌에 자리 잡고 있는 공안분주소를 들이치려고 작전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난데없는 상두를 멘 장례행렬이 선구공안분주소에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쓴 청장년 속에는 소년들도 섞여있었다. 상제, 복인, 조객들로 이루어진 이 장례행렬은 20여명 잘되였는데 상주인듯한 중년사나이가 맨 앞에 섰다. 사나이는 분주소에 들어서자 두손을 맞잡고 소장에게 인사하였다.

소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앉아 점도록 베감투를 눈빗질해보았다. 이 놈은 출출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육상에 파묻혀 썰썰이병을 떼고야 돌아서는 놈이라 장례행렬을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베감투는 소장놈이 지금 엉뚱한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도살세’를 바치러 왔다고 굽석거렸다. 그 때에는 관혼상제에 소나 돼지를 잡으려면 공안분주소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 소를 잡았습지요.” “제길, 소는 무슨 놈의 소란 말이야. 돼지를 잡아도 될걸.”

한창 점심때라 소장놈은 긴 하품을 늘이며 심술 배인 소리를 줴치다가 서랍을 들춰 도살세수고지를 끄집어냈다. 느적느적 필을 찾아쥐더니 수고를 떼느라고 머리를 테블상에 파묻었다. 이 때라고 생각한 베감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소장놈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궁둥이에 찬 권총을 잡으려 했으나 총갑을 열기도전에 잡힌 몸이 되여버렸다.그런데 갑자기 점심밥을 짓던 화식원놈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식칼을 든 채로 나타났다. 베감투는 잽싸게 몸을 홱 돌리면서 그놈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화식원놈이 나동그라졌다.

항두를 지키고 있던 장례군들은 불이 펄 나게 향두를 헤친 후 관덮개를 열어제치고 그 속에 숨겨놓았던 몽둥이며 괭이며를 들고 쏜살같이 분주소로 쳐들어왔다. 한창 낮잠을 자던 순경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웬 영문인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방안에 뛰여든 장례군들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벽에 걸려있는 총을 벗겨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장례행차로 가장하여 선구공안분주소를 쳐들어간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개산툰학성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이였고 베감투를 눌러쓰고 상주로 변장한 사나이는 학성적위대 대장 리동일이였다. 그 날 그들은 선구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보총 8자루, 권총 1자루를 로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연길폭탄’

동만유격근거지의 병기공장에서 만든 토배기무기중 유격대들의 환영을 각별히 받은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길폭탄’이다. 그러나 일본군경들은 ‘연길폭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했다.

1931년말, 중공 화룡현 다라즈구위 서기 김일환은 구위확대회의를 열고 항일무장대오의 건립과 무기해결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회의에는 금곡촌공산당지부 서기 손원금, 적위대 대장 장원, 금곡촌의 박포수 등이 참가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는 외에 자체로 병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여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하여 연길직업학교에서 로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손원금과 무기를 잘 다루는 박포수가 무기제조과업을 맡게 되였다.

손원금과 박포수는 남포의 원리를 리용하여 폭탄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두사람은 금곡의 매바위산에 올라가서 자그마한 막을 짓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였다. 이때로부터 금곡촌에는 설비가 보잘것 없는 병기공장이 생겨났다.

손원금은 공장의 전우들과 함께 폭발위력을 높이기 위한 방도를 여러 모로 연구하였다. 그들은 창호지를 구입해다가 장약함을 만들어 마침내 폭탄을 제조해냈다. 폭탄을 시험폭발해보니 위력이 괜찮았다. 빈집 안에서 터지는 폭탄소리는 요란했으며 집주위는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그들은 소리가 유별나게 굉장한 이 폭탄을 ‘소리폭탄’이라고 이름 지었다. 손원금은 본격적으로 ‘소리폭탄’을 생산하여 각 부락의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소리폭탄’은 위력을 보여주였다. 적들은 ‘소리폭탄’이 터지는 소리만 듣고도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도망쳤다. 그럴 때마다 적위대원들은 그 틈을 타서 놈들의 무기를 탈환하였다. 어느 하루 적위대원들은 반제거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한 적위대원이 불을 달아 던진 ‘소리폭탄’이 면바로 서장놈의 발밑에서 폭발하였다. ‘소리폭탄’은 이름 그대로 굉장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러나 경찰서 서장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결국 ‘소리폭탄’ 의 약점이 적들에게 탄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병기공장에 시급히 새로운 폭탄을 만들어낼 과업이 떨어졌다.

박포수가 ‘고추폭탄’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해왔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소리 잡으러 산으로 갔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오소리굴을 발견하고 연기를 피워넣었는 데도 오소리가 나오지 않자 아버지가 이마를 찡그리며 궁리하더니 굴어구에다 고추가루를 태우더라는 것이였다. 그랬더니 오소리는 매운 냄새에 견디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는 것이였다. 박포수는 화약에 고추가루를 섞어 폭탄을 만든다면 그럴듯한 ‘고추폭탄’ 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고 했다. 결국 ‘고추폭탄’을 시험제조하기로 결정 지었다. 그들은 시험 삼아 먼저 일정한 량의 화약에 고추가루를 섞은 다음 불을 달아보았다. 화약에 불이 달리면서 고추가루가 타기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지도록 매운 냄새가 풍기였다.

‘고추폭탄’을 만들어낸 손원금네는 어느 날 저녁 고석동 너럭바위골에서 새로운 폭탄시험을 하게 되였다. 벼락치듯한 폭발소리와 함께 독한 냄새가 확 퍼지자 모였던 사람들은 기침을 마구 하며 눈물 코물 범벅이 되여 쩔쩔 맸다. 대성공이였다. 병기공장에서는 일손을 다그쳐 ‘고추폭탄’을 생산해냈다.

‘고추폭탄’은 위력을 과시했다. 적위대원들은 선후로 내연평, 팔가자, 반제거우 경찰서놈들에게 ‘고추폭탄’ 벼락을 안기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1932년 봄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가 보편적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형세의 발전에 따라 ‘고추폭탄’도 자체의 사명을 다하게 되였다. ‘고추폭탄’ 역시 살상력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항일유격대에서는 살상력이 있는 폭탄을 요구하였다. 하여 ‘돌자갈폭탄’을 만들어 폭발시험을 했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돌자갈폭탄’은 가는 곳마다에서 일본군경놈들을 호되게 족치였다. 이렇게 되자 바빠맞은 놈들은 폭탄출처를 알아내려고 날뛰였다.

손원금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고 병기공장을 매바위절벽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옮겼다. 후에 동굴이 놈들에게 발견되자 매바위에서 동남쪽으로 15리가량 떨어진 곳에 옮겨가 무기생산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부단한 실천 속에서 ‘돌자갈폭탄’의 원리를 응용하여 ‘쇠쪼각폭탄’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병기공장에서는 솥이나 화로 같은 쇠붙이를 깨여서 돌자갈을 대신했다. 하여 폭탄의 위력을 높였다.

하지만 ‘쇠쪼각폭탄’도 때로는 불발사고가 일어나 유격전에 영향을 주었다. 손원금은 전우들과 함께 세심하고 반복적인 시험을 거쳐 폭탄이 습기를 막아낼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장약통을 양철로 만들고 밀페한 다음 화약을 재우고 양철통 겉면에 쇠쪼각을 붙였다. 그런 후 양철로 외피를 한벌 더 씌우고 철사로 그물처럼 얽어놓았다. 그랬더니 폭탄은 습기를 막아낼 수 있었고 불발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폭탄을 점차 자기의 위력을 발휘하여 전투원들의 사기를 고무하였고 일본놈들을 전률케 하였다.

동만 각 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쇠쪼각폭탄’에 맞아 ‘철벽진’이라고 자랑하던 놈들의 포대와 성곽들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내리고 수많은 병영들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수많은 일본군경들이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연길지방의 일본군경들은 이 폭탄에 어찌나 넋을 잃었던지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자체로 붙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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