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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구술시리즈-4] 북대황 기러기섬의 ‘김기술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17 11:00:28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 (김희관편4)

북대황 벼농사 개척의 첫삽을 뜬 ‘김기술원’ 김희관(앞사람)과 전우들.

저는 아버기께서 걸쳐준 두터운 군용외투를 입고 령하 30도를 넘는 북대황 땅을 밟았어요.

북대황에 배치받은 우리 4명은 우선 가목사에 있는 동북농업개간총국으로 갔지요. 총국은 나라에서 개발하는 국영농장과 량식창고를 관리하는 기관이구요. 그들은 우리가 북대황 국영농장에서 벼농사를 개척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요.

북대황의 벼농사 개척

우리는 1958년 항미원조전선에서 귀국한 철도병들이 집체로 전업하여 왕진장군의 지휘하에 일떠세운 국영 853농장으로 가게 된거예요. 지도에서 보면 삼강평원 한복판에 대하진(大和镇)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 부근이예요.

우리가 전혀 생각을 못했던 한가지는 그런 국영농장들은 이미 쏘련의 농업기계화를 따라 배워 기본상 또락또르, 파종기, 농업용 쌍날개비행기, 콤바인,옥수수 수확기 등 설비로 무장하여 밀, 보리, 옥수수, 콩을 재배하고 기계화, 화학화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것이였어요.

북대황의 일망무제한 벌판에서 기계화로 농사짓는 나젊은 농장인들.

1968년 1년 동안 우리는 853농장의 제3부속농장에서 농작물재배기술과 농업기계화 실습을 진행하였고 1969년 초부터는 서로 몇십리 떨어진 부속농장에 발령받아 각자 벼농사를 개척하게 되였지요. 저는 제4부속농장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기러기섬(雁窝岛, 영화‘북대황사람들’촬영지)에 배치받아 벼농사를 개척하게 되였어요.

1969년 3월 2일. 중쏘변경에서‘진보도사건'이 발생하면서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흑룡강성 농업개간총국을 중국인민해방군 흑룡강건설병퇀으로 전환시켰고 우리는 예비역부대인 흑룡강건설병퇀 제3사 21퇀으로 편성되였지요. 저의 소속은 21퇀 4영 2련이였구요. 저는 2련에 도착하자마자 종업원들로부터 ‘김기술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되였지요.

그때 주변의 농경환경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깜짝 놀란 것은 약 100리 밖의 대하진에 십여세대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었다는거였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벼농사를 하며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였어요.

제가 “언제부터 벼농사를 하였는가”고 물었어요. 그들은 “한 50년, 60년이 된다”고 하더라구요. 후날 력사자료를 찾아보니 19세기말부터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 하바롭스크, 우쑤리스크 등 일대로 이민갔던 조선농부들이 그쪽이 너무 추워서 남쪽으로 이사오다 보니 여기까지 와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고 씌여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그들의 벼농사는 직파 벼농사여서 무당 생산량은 아주 낮지만 다행이 논면적은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허허벌판이여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의 사망 부고

1969년 2월 21일 오후, 느닷없이 동생이 보낸 전보를 받았어요. 아버지가 서거했으니 급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였어요. 그 순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요.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그 군용외투를 입고 목단강을 거쳐 연길로 달려왔지요.

후날에 알게 된 것인데 그 당시 집권자들은 아버지에게 “너는 주덕해의 비서를 가장 오래 한 사람이다. 그러니 주덕해가 흑룡강성 밀산 시다린즈에서 체포되였을 때 변절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니 승인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해방을 받지 못할 것이다…”고 터무니없이 강요를 한 것이였지요.

1948년부터 주덕해동지의 비서가 된 아버지는 그런 위증은 절대 할수 없어 결국 결연히 창밖으로 몸을 던졌지요! 그해 아버지는 겨우 46세였어요. 말그대로‘비서의 죽음'인거지요. 그날이 바로 1969년 2월 20일이였어요.

어머니는 청천벽력을 맞은거예요. 겨우 45세 젊은 녀성으로서 5남매를 거느린 어머니로서 뜻밖의 날벼락에 억이 막혀 눈물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흑룡강 상지현 하동향에서 1948년도에 입당한 토개시절 당원이였어요. 어머니는 주위 문교서기의 부인이였지만 조직에서 공직생활을 권유해도 마다하고 5남매를 키우면서 연길시 신흥가두 판사처에서 월급이 없이 당지부 서기, 가두판사처 주임을 하며 시민들을 위해 많은 좋을 일을 하신 현명한 녀성이였지요.

며칠 후, 중앙인민방송에서 <진보도사건>을 보도하니까 저는 부랴부랴 북대황으로 떠나면서 우선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향의 큰집에 들려 <부고>를 전했지요. 그날 밤에 할머니는 <부고>를 들으시고 이불을 마구 덮어쓰고 기막히게 우시는 것이였어요.

1957년의 김문보 림분규 부부

그해 여름 어머니는 더는 연길에서 못살겠다며 셋째 희동이를 데리고 북대황으로 저를 찾아왔어요. 멀리 트럭 우에서 한 녀성이‘희관아!-’하며 소리쳤어요.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을 본 적 없어요. 45세밖에 안되는 어머니가 파파로친이 되였어요. 기차 타고, 버스를 타고, 트럭에 실려 수천리를 달려온 두 사람이 절망 속에서 마중나온 저를 보고 어떻게 소리를 쳤는지 목이 다 쇠였어요.

2련 지도부에서는 어머니의 방문을 아주 중시하여 여러가지로 배려를 해주었는데 참으로 감사했지요. 당시 2련에 내려와‘로동개조'를 하는 원 853농장의 농장장 마길상은 항미원조전선에서 싸우던 투사인지라 배장이 두둑한 분이였지요. 그는 ‘이런 세상이 너무 오래 가지 못하니까 기운을 내라.”며 많이 위로를 해주어 우리는 안정을 찾게 되였지요.

기러기섬의 청년축제

1972년도에 북대황에서는 모상판에다 벼모를 키우며 실험을 하는데 북경, 상해, 녕파에서 온 지식청년들이 저를 따라 그렇게도 열심히 일하던 모습이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 있어요. 당시 2련에는 지식청년들이 100여명이 있었지요. 그리고 로일대 농장원들 속에는 할빈군사공정학원을 다니다가‘학생우파'로 락인되여 2련에서‘로동개조'를 하는 쳥년도 있었구요. 1966년에 이미 이곳에 와서 정착한‘로북대황’북경지식청년들도 몇명 있었어요.

북대황의 청년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문화를 가르치던 ‘김기술원’ 김희관(앞줄 왼쪽 세번째).

지식청년들은 저를 대학생이라고 지식에 관한 얘기를 해달라고 청을 들군 하였어요. 그리하여 저녁에 소학교의 빈 교실에서 초불을 켜고 정치경제학에 관련한 얘기를 하게 되였지요. 경제기초란 무엇이며 상층건축이란 무엇인가? 그들 대부분은 초중학생들이였거든요. 그래서 흑판에다 그림을 그리면서 경제기초와 상층건축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우리는 지금 경제기초를 닦는 일을 하고 있는데 먹고 나머지가 있으면 팔아야 한다. 그러자면 장마당이 있어야 하고 은행이 문을 열어야 하고… 이렇게 설명해주니까 그게 재미있다고 파종이 끝나기 바쁘게 또 학교에 모여들군 하였지요.

삼국지 얘기도 했지요. 삼국지를 잘 아는 아이들을 선발하여 서로 이야기도 시켜봤구요. 다들 너무 좋아했어요. 그때 교단에 섰던 애들이 후에 교수가 된 이들도 여럿 있어요. 먼 후날 우연하게 북경 비행장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였는데 우리는 너무도 반가워 마구 그러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렀지요. 그날 저녁 우리는 더 많은‘북대황 전우들'과 만나 축배를 들면서 장밤을 지샜구요.

여름에 우리는 기러기섬에서‘기러기섬 청년수영절'을 쇠기로 하고 행사를 조직했지요. 혁명가곡을 부르면서 뜨락또르를 타고 여러 곳에서 몰려온 청년들은 호각을 불며 물에 뛰여들었어요. 굉장히 유쾌하게 보낸거지요.

그런데 며칠 후 생각 밖으로 해당부문의 조사를 받게 되였어요. 우린 자초지종을 얘기했지요. 이것은 청년들의 갈망이다. 순수한 문화행사를 조직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사건이 벌어지니 진춘원이라는 한 하방간부가 공정한 평가를 내렸지요. “청년들은 지식을 수요하고 문화를 수요하고 오락을 수요하고 체육활동을 수요한다. 김기술원이 그들을 계발하고 문화지식을 전수하며 청년들을 각성시킨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건 제창해야 할 바이다.” 참 고마운 사람이였어요.

그는 나보다 대여섯살 이상이였는데 저녁이면 팔짱을 끼고 우리 집에 와 한담도 하군 하던 사이였어요. 그 후에 이 일은 되려 잘한 일로 되여 《흑룡강농건병퇀일보》에까지 크게 실렸어요.

엄동에 피여난 사랑의 매화

그맘때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어요.“희관아, 우리 옆집에 한 영예군인이 이사를 왔는데 그의 조카 처녀가 아주 참하더라. 한번 선이라도 보면 좋겠구나.”

“어머니가 좋다면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저의 답장이였지요.

그래서 저는 벼씨도 구입할 겸 선도 볼 겸 연길로 왔지요. 저는 그녀를 만나 북대황의 얘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도 하면서 우리 집 형편을 있는 그대로 말하였지요.

그녀의 외삼촌은 항미원조전쟁에서 땅크병으로 돌진하다가 부상을 당한 1등 영예군인이였어요. 그는 조카에게 “그 청년은 아주 똑똑하니 전도가 있는 있는 사람이다. 꼭 따르도록 하거라.”라고 신신당부를 한거였어요. 그녀도 “삼촌이 좋다는 사람인데뭐…” 하면서 저한테 마음을 주었지요. 기차에 올라 북대황으로 떠날 때 그녀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저를 바라보며 애궂게 눈물을 짓고 있는 것이였어요. 그 장면이 지금도 영화처럼 눈앞에 선해요.

1970년 3월 15일, 우리는 한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였어요. 결혼식에는 상지에서 오신 큰어머니와 동창생 13명 그리고 동네에서 비밀리에 온 간부가족 아주머니 몇 분이 전부였지요. 그런 험악한 ‘계엄’속에서도 기어이 저를 따르겠다는 그녀 강금옥에게 무한히 고마울 뿐이였지요. 세울이 류수 같아 명년 우리부부는 ‘금혼'을 맞이하게 되였네요.

래년이면 금혼인 김희관 강금옥 부부, 꽃나무도 알뜰살뜰 키우며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결혼식이랍시고 치르고 북대황으로 가는데 짐이라고는 커다란 첫날 솜이불 뿐이였지요. 밤새 기차를 타고 영춘역에서 내렸어요. 또 뻐스를 타고 3시간 달려 853농장 본부에 도착해 초대소에서 하루 묵었지요. 안해가 이제 얼마를 더 가야 하는가고 묻길래 래일 점심 때면 도착할 것이라고 두리뭉실 대답을 했지요.

이튿날 아침에 대하진에 당도했는데 또 반나절 더 가야 한다는 말에 안해는 아주 놀라는 것이였지요. 드디여 2련에 도착하니 이쁜 색시 데려왔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어요. 후에는 “캉시부(康媳妇)가 고우니 키우는 병아리도 곱다.”며 북대황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해준 거예요. 우리는 그곳의 인품 때문에 정말 행복했어요.

안해 또한 생활을 깔끔하게 하면서 농장원으로 일했고 재미 있게 지냈지요. 1972년 5월 중순, 제가 논에서 벼씨 직파 파종기를 조절하는데 위생원이 뛰여와 “캉이모가 당장 해산하게 됐어요!” 하며 다급히 부르는 것이였어요.

집으로 막 줄달음쳐 갔어요.‘응아’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아버지는 가시고 새 생명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치더라구요.

그것이 1972년 5월 24일이였어요. 큰 딸을 보게 된거지요. 그 애가‘김단'이예요. 저는 후날 딸애에게 사진을 꼭 찍어줘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위생소 궁의사의 카메라를 빌려왔어요. 사진을 찍고 밤에 책자를 무져놓고 유리판을 올려 사진인화상을 만들고 김단의 첫 사진을 씻어냈지요.

그해 여름, 우리 부부는 할머니에게 김단이를 보여드리려고 연변으로 왔어요. 저는 어머니가 혼자 계시고 동생들이 어린데 집으로 돌아와야겠다고 조직에 제기했지요. 그리고 북대황 853농장 당위에도 편지를 보내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 했어요. 10월말, 요흔서기(전 연변주당위 제2서기)가 래년 봄에 연길로 돌아오라고 지시문을 전해주었어요.

그 통지를 받아쥐고 허겁지겁 뛰여와 집문을 벌컥 열어제끼는데 안해는 솜옷을 잔뜩 입고 아이도 숨뭉치처럼 꿍져 업고 쪽걸상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더군요.

“ 여보! 우리 집에 가게 됐어!” 저는 손에 쥔 통지문을 마구 흔들어 보이며 웨쳤지요. 우리 부부는 서로 막 붙잡고 눈물을 흘렸어요.

1973년 3월 1일, 우리 부부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속에서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북대황을 떠났어요.

/글 김청수 기자, 영상사진 김성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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