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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구술시리즈-5] 문화전선을 향한 첫 걸음—신문사 기자로부터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24 14:28:20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김희관편5)

198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 현장을 찾은 길림성의 저명한 촬영가 랑기(郎奇,오른쪽)선생과 함께

1973년 3월 5일, 새하얀 봄눈을 밟으면서 연변일보사 농촌조에 첫 출근을 하게 되였어요.

연변일보사는 제가 문화전선에 뛰여든 준비단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요. 기자생활은 사회를 인식하기 아주 좋은 직업이였지요.

두발로 뛰여다니며 농부들과 만나고

저는 처음부터 도시와 멀리 떨어진 농촌마을을 찾아가기를 좋아했지요. 시체말로 하면‘원생태 농촌 체험’이겠지요. 몇 십리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즐겁기만 했어요.

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출발해 룡정에 도착해서는 다시 뻐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산길을 따라 삼합에 도착하지요. 거기서 량표 4량짜리(四两粮票)를 내고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신들메를 조이고 대소농장까지 근 30리 길을 걸어가는데 두만강량안의 풍경을 보면서 걸어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줄이야…왕청 대흥구에서 하마탕으로 들어가자 해도 뻐스가 없을 때가 많아서 역시 25리를 걸어서 하마탕 후하까지 걸어가기도 했지요.

지난 70년대, 훈춘에 취재를 가려면 우선 시공안국에서 기자신분을 근거로 <변경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지요. 그리고 훈춘 경신에서 방천까지는 뻐스가 아예 없었기에 걸어가야 했지요. 그래서 우선 훈춘 경신까지 뻐스로 가서 저녁에는 공소사 려관에서 자고 다음날 오전 일찍 20여리를 걸어서 방천을 찾아가지요.첫 방천길을 이렇게 걸었어요.

당시 방천으로 가려면 두만강변의 한구간은 쏘련땅을 밟고 지나가야 하기에 조심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지요. 지금도 그때 소문난 방천촌의 강태원서기네 집에서 두만강 붕어회에 소주를 마시던 점심이 생각나네요. 저는 북대황에서 대화진의 조선족농가를 찾아가듯이 저 멀리 농촌마을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고 계시는 농부들을 만나는 것이 그토록 즐거웠어요.

1973년 6월 연변일보사 농촌조 홍춘식(오른쪽)조장을 따라 유수천에 취재를 갔을 때 남긴 기념사진.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첫 기사로‘룡산아래 큰 그림을 그리다’라는 통신을 썼어요. 홍춘식 조장님이 저를 데리고 유수천대대에 내려가 취재를 했지요. 유수천의 최중묵 서기가 유수천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더운 페수를 파이프로 철관다리를 놓고 부르하통하를 건너 논에 들어오게 하여 벼농사를 지은 사적이였어요.

처음에는 소식을 쓴다는 것이 통신처럼 되였고 통신을 쓴다는 것이‘소설'이 되였어요. 홍춘식 조장님은 내가 쓴 초고를 보고 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소설을 썼구만! 신문원고는 어떤 문체든 반드시 진실한 사실만을 써야 하오.” 그러시더니 허구된 글구들을 깡그리 지워주셨어요.

3일간의 수개를 거듭한 결과 드디여 비교적 미끈하게 되였어요. 그것도 한문으로 쓴 원고였는데 박창윤선배가 조선문으로 번역하였어요. 통신은 조한문 신문에 제목삽화까지 배합하여 톱기사로 4단에 꽉 차게 나갔어요. 북대황에서 돌아와 기자가 되여 처음으로 쓴 기사였지요. 그때 본사에서는 조선 함경북도 신문대표단의 방문에 맞춰서 1면 톱에 배치했지요.

사장님이 “아주 잘 쓴 통신”이라고 칭찬을 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지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경축 현장에서 <<해방군화보>> 촬영기자를 접견하는 조남기 서기(좌2))를 모시고(좌1 김희관).

1978년 봄부터 저는 연변으로 다시 돌아오신 조남기 서기가 친히 령도하는 중공연변주위 <주덕해동지 명예회복주비소조>에서 림시 근무하게 되였어요. 조남기 서기는 1948년 아버지와 함께 주덕해 서기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우리 집에도 자주 오셨던 어르신이지요.

하루는 층계를 오르다가 조남기 서기님과 마주치게 되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어요. 조남기 서기님은 “이제 며칠 후이면 너의 아버지의 명예 회복의식도 하게 된다”고 하면서 나의 손을 꼭 잡아주시는 것이였어요. 조남기 어른의 손을 통해 전달되던 그 따뜻한 온기를 난 지금도 가슴으로 느끼고 있어요.

1978년 6월 20일 오전, <주덕해동지 명예회복대회>가 연변로동자문화궁에서 성대히 거행되였어요. 저는 그때 무대 뒤에서 봉사하면서 력사적인 장엄한 대회를 지켜보는데 저희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해주시던 주덕해 서기님의 영상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며 뜨거운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어요.

주당위 선전부 문화신문과 과장으로 사업하면서

1980년 6월, 저는 연변일보사에서 주당위 선전부로 정식 전근해 문화신문과 과장직을 맡게 되였지요. 그때로부터 저는 문화예술단체며 신문사, 방송사들을 많이 돌아다녀야 했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때가 되였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시 저의 업무는 주요하게 두가지였지요. 하나는 지난 10년 동란 세월에 연변의 문화예술사업이 입은 피해와 문화예술일군들이 받은 불공정대우를 조사연구하는 것이였어요. 둘째는 1982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이하면서 연변가무단,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 등 문화예술, 신문방송 단위들에서 진행해야 할 사업내용을 조사연구하는 것이였지요.

대형기록영화 <연변의 봄> 촬영제작조가 연변과수농장에서 촬영작업을 할 때 뢰진림(雷震林)감독이 중간에서 지휘하고 있는 장면.

조남기 서기의 사회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기념 경축 행사를 거행할 문화선전부문의 각 지도자들이 참가한 동원대회를 열었어요. 조남기 서기는 우리가 10년 동란 때문에 20주년을 못 쇴는데 20주년을 30주년과 같이 쇠야겠다고 하였어요. 여기서 주제는 뭔가 하면 번영하는 우리 연변 조선족의 성취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잘 제기해야겠다는 것이였어요. 그의 구체적인 지도하에 대회에 참가한 각 부문의 지도자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뭐라는 걸 알게 되였지요.

1982년 봄, 조남기 서기의 지시 하에 우리는 중앙기록영화제작소와 합작하여 기록영화 <연변의 봄>을 촬영하게 되였어요. 주당위 선전부 김영만 부장의 주도하에 나는 연변의 PD(제작인)가 되여 모든 촬영활동과 배우, 직원들의 행사를 조직하고 집행하는 임무를 수행했지요.

연변과수농장에서 사과배꽃이 구름처럼 활짝 핀 배경하에 가무프로를 촬영하는 그 며칠간은 새우잠을 자군 하였어요. 이른 새벽부터 촬영에 참가하는 배우들을 수송하고 현장에서 연습을 조직하면서 가장 바쁜 고비를 넘겼어요.

대형기록영화 <연변의 봄>의 야외촬영에 참여한 연변가무단, 연변연극단, 연변예술학교의 배우와 학생들이 촬영제작진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그때 장춘영화촬영소에서는 또 연변 농촌의 변화를 주제로 한 예술영화‘새봄'을 촬영하였어요. 그 시기 조남기 서기는 그토록 분망한 가운데서도 저녁이면 전인영 부서기와 함께 우리 <연변의 봄> 촬영현장이며 무용수들의 훈련장소, 연변가무단 악단, 연변연극단의 예술영화 <새봄> 촬영현장 등지를 찾아 고무해 주시였지요. 조남기 서기는 오래 동안 군부대에서 문예사업을 많이 지도해왔던 현명한 지도자로서 연변의 실정에 맞게 문예사업을 조절해 주시고 현지지도를 해주셨어요.

중공연변주위 조남기 서기(오른쪽 첫사람)와 전인영 부서기(오른쪽 두번째)께서 대형기록영화 <연변의 봄>에 출연한 가무배우들을 만나 격려해주시던 장면.

한가지 우리가 영원히 기념해야 할 것은 바로 연변의 8월 15일‘로인절'이예요. 1982년 여름, 조남기 서기님은 우리에게 모아산동남기슭에 자리잡은 동성용진에서 농한기마다 농부들의 운동대회며 문예활동 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며 그걸 잘 조사해보라고 지시하셨어요. 우리는 즉시 동성용에 가 조사연구를 하고 보고서를 올렸지요. 그리하여 결국 조남기 서기의 지시에 따라 연변에 <로인절>이 생겨나게 된 거지요.

‘8.15’ 로인절을 쇠고 있는 동성용진 로인회

198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30돐 경축대회가 연길시인민체육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였어요. 당시 저는 중앙텔레비죤방송이며 국제방송 등 전국에서 온 기자 60여명을 안내하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그 전해 상해영화촬영소에서 또 장백산에 와‘마음속의 현금’(心炫)이라는 항미원조시기 중조우의를 주제로 한 예술영화를 촬영하였는데 몇달간 도와주면서 쌓은 경험이 기록영화 <연변의 봄>을 촬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어요.

1981년 늦가을, 연변을 찾은 상해영화촬영소 예술영화 <<마음의 현금(心弦)>>의 배우 유평(俞萍, 좌3)과 보순(宝珣,우1)을 접견하고 있는 중공연변주위 김동기 비서장(좌2).

1982년 10월, 나는 연변의 문예전선과 신문전선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고 또 보고서를 올리게 되였어요. 그 주제는 목전 연변조선족 문예,신문전선의 가장 큰 문제는 인재의 대가 끊어지고 있다는 것이였어요. 그러니 인재고갈을 말한거지요. 또 한가지는 항일투사들의 후대들이 취직이 어렵게 된 것이 큰 문제라고 찍었어요.

김영만 선전부 부장님이 보고서를 보시고 “참 좋은 내용이요. 지금 연변도 전국과 마찬가지로 인재단층(断层)현상이 심각하구만.”라고 하였지요. 조남기 서기님도 “이 보고가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보고서에서 제출한 <연변대학에 작가, 신문기자 연수반을 꾸릴데 관한 방안>을 비준해 주셨어요. 물론 항일투사들의 후대들을 위한 연수반을 꾸리라는 지시도 하셨구요.

주당위 선전부에서는 각 현시의 선전부장, 문화국장들 회의를 소집하고 연변대학에 작가반, 기자반을 꾸릴데 관한 주당위의 지시문건을 전달하고 학생모집명단을 제출할 것을 당부했지요. 그리고 동북3성 민족사무위원회에 문건을 보내 조선족학생모집대상을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구요.

1983년 3월, 연변대학 작가, 기자 연수반이 개학을 했지요. 그때 연변대학 작가반, 기자반에서 공부를 한 인재들이 후날 연변의 작가, 기자 대오가운데서 맹활약을 했고 중견이 된거지요.

저는 현재 우리 조선족 문화예술, 신문방송 사업에서 또다시 인재고갈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실정을 알고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재양성은 백년대계이기에 미리미리 앞을 내다보며 그리고 유력하게 대책을 대야만 우리 문화예술사업이 차질 없이 발전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글 김청수 기자, 영상사진 김성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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