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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1)—반 ‘민생단’투쟁 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5-20 15:18:06 ] 클릭: [ ]

무한히 확대되는 억울한 사건에 련루되여

원 조선공산당원 항일로간부 등 전부 숙청

파쟁주의자도 민생단으로 몰려

1933년 9월, 동만특위는 제1차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반‘민생단’투쟁을 새로운 고조에로 불러일으켰다. 확대회의의 결의문은 “조선인 파쟁주의자와 민생단분자들이 하나가 되여 당내에서 일본간세계통을 건립하고 공산당의 령도기관을 차지함으로써 중앙에서 온 편지(‘1.26편지’)에서 제출한 당면의 임무를 완전히 집행할 수 없게 하였으며 당과 혁명운동이 매우 큰 손실을 받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하여 과거 조선공산당 각파와 그 산하 반일혁명조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민생단과 동일시되여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령도기구도 개편되였는데 특위 조직부장 김성도를 ‘파쟁령수’로 지목하고 그의 직무를 해임, 총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반년전 만하여도 동만특위 순시원의 신분으로 화룡현에서 수십명의 조선인혁명동지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억울하게 죽게 한 김성도 자신도 결국은 마촌 남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동북항일혁명군에서 작성한 일본어로 된 선전문

1933년 12월 7일,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만주성위는 련합으로 〈일본강도의 간세인 민생단 및 파쟁을 반대할 데 관하여 한국민중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문장에서는 “파쟁분자들은 그 무슨 에멜파, 화요파, 상해파, 서상파, 고려공산청년단파 등으로 나뉘여져있다. 이런 민족주의의 파벌과 파쟁의 수령인물들은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주구, 간세들로서 사람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중국공산당, 반일유격대와 반일회 등 군중단체속에 섞여들어와 일본의 간세작용을 일으키고 중한민중련합반일의 민족혁명을 파괴하고저 한다. 일체 민족주의의 파쟁수령과 민생단은 모두 일본강도 제국주의의 간세이고 반혁명분자들이며 당신들 민족의 계급의 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흘 후인 12월 11일에는 동만당과 동만단 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당과 단의 계급성분과 민족성분을 전변시키며 기층간부까지의 모든 당, 단조직과 반일회, 농민협회, 농민위원회, 인민혁명정부, 유격대 등 일체 군중단체의 령도기관을 개조하여 파쟁분자들을 모조리 몰아내는 조직상의 철저한 전변”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지시정신하에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은 더욱 치렬하게 전개되는 수 밖에 없었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은 원래 신체가 허약한 편이였는데 민생단을 심문하느라 며칠간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각혈까지 하였다고 한다.

민생단에 대한 적발, 체포와 고문은 계속되였는데 간부 뿐만 아니라 일반군중과 군대 속에서도 살벌하게 진행되였다. 무슨 공작상의 착오가 있으면 민생단작용이 아닌가고 감시하였기에 일반은 공포에 떨었다. 이에 따라 군대의 전투력도 저하되였다. 체포될가봐 두려워 도주한 자도 있었다. 어떤 민생단사건으로 검거당한 자는 자수해야 산다는 호소 밑에서 체포된 첫날부터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백이라고 확인될가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고심초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과거착오를 민생단의 작용이였다고 밝히고 자기와 같이 공작한 동지들을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공술하였다. 과거의 민족주의자, 파쟁분자는 모두 민생단이라고 규정되였다. 민족주의자, 파쟁자와 민생단은 삼위일체라고 인정되고 한몸에 새개의 머리가 그려진 그림에 민족주의, 파쟁분자, 민생단이라고 글을 쓴 만화가 일시 성행되였다.

무한히 확대된 반 ‘민생단’투쟁

1934년 3월,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에서 각 현 유격대 책임자들이 참가한 련석회의를 소집하고 동만 4개 현의 유격대를 합편하여 통일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정, 원 연길현 유격대 대대장 주진(朱镇)과 정치위원 왕덕태를 사장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독립사 산하에 4개 퇀과 하나의 유격대대를 두었는데 무장대오는 900여명에 달하였고 군중무장으로는 청년의용군이 200여명, 반일자위대가 천여명이였다. 항일혁명대오내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민생단’투쟁이 매우 첨예하게 진행되였지만 독립사 퇀급간부 가운데는 대다수가 조선인이였다.

1934년 11월 초순, 공청단만주성위 순시원 종모모가 동만에 온 후 반 ‘민생단’투쟁은 두번째 고조를 맞이하게 되였다.

중공동만특위 ‘특별회의’는 2, 3일간 열리였는데 중공만주성위의 ‘10.1일서한’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만공산당내의 반‘민생단’투쟁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하였다. 최후로 주진, 리상묵과 훈춘현위 서기 최학철을 ‘민생단’의 두목이라고 토론 결정하였다.

주진, 리상묵 등을 체포하게 된 주요원인은 간도헌병대의 특무외각조직인 ‘간도협조회(间岛协助会)’가 1935년 1월 3일에 음모, 조작한 ‘사방대사건(일명 한영호사건) ’이다.

1935년 1월 3일, 간도협조회 공작원들이 공산당 지하공작원으로 가장하고 연길현 사방대유격근거지를 찾아왔는데 이들은 제1보초선에서 보초병과 한담하면서 유격구량식운수대장 한영호를 잘 알고 있는듯이 백초구일대에 공작하러 나간 “한영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보초병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갑자기 총을 빼앗아가지고 적구로 달아나버렸다. 불의의 습격에 무장까지 빼앗긴 보초병은 유격구 령도에게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게 되였고 령도기관에서는 한영호를 적들과 내통하는 민생단원으로 의심하게 되였다. 적구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사방대유격구로 돌아온 한영호는 인차 체포되였는데 심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한 채 자신이 민생단원임을 승인함과 동시에 독립사 사장 주진과 제1퇀 제3련장 박춘도 민생단원이라고 공술하였다. 주진, 박춘도 인차 체포되였는데 주진은 탈출한 후 변절하였고 박춘은 고문 끝에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도 민생단이라고 공술하게 되였다. 결국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은 민생단특위 서기로, 독립사 사장 주진은 민생단특위 군사부장으로, 훈춘현위 서기 최학철은 민생단특위 선전부장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리상묵이 도주하고 주진이 체포되였다가 탈출한 사실은 항일혁명대오에 일대 충격을 갖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선 주진의 부하로 있던 조선인간부 40여명이 민생단원으로 체포, 총살되였다. 그리고 주진, 리상묵 등 주요한 간부들의 도망과 변절로 하여 동만특위도 연길현 삼도만에서 왕청현 대1황구로 전이하게 되였다.

조선공산당 출신 항일로간부 전부 숙청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의 엄중성을 고려하여 만주성위 신임 대리서기 양광화는 중공할빈시위 서기 위증민을 전권대표로 동만에 파견하였다.

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 전권대표 위증민의 조직하에 왕청현 남하마탕 대황외에서 동만당단특위 제1차 련석확대회(대황외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동만특위를 철소하고 위증민을 서기로 한 새로운 특위를 조직하였으며 각 현의 현위를 특별지부로 개편하고 안도와 라자구에 두개의 특구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대황외회의는 반‘민생단’투쟁이 “네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살면 네가 죽는 생사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숙반위원회를 조직하여 인민혁명군과 유격구내에서 전문적으로 민생단과 반혁명분자를 진압한다고 하였다. 이미 500명 이상의 민생단을 체포하였지만 아직도 “볼 만한 성적을 얻지 못하였고” “지금 민생단이 매우 많다”고 인정하면서 “민생단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적지 않은 새로운 발전이 있게 되였다” 고 분석하고 있다.

새로 조직된 숙반위원회는 동만특위 상무위원3명(서기 위증민, 조직부장 리학충, 선전부장 리송일), 특위비서장 조아범, 공청단동만특위 서기 주수동,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위원 왕덕태, 독립사 산하 4개 퇀의 정치위원들로 구성되였고 주석은 리송일(조선족)이였다.

대황외회의부터 동만특위는 반 ‘민생단’투쟁을 동만의 사업중심으로 삼고 세개 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하였다.

제1단계는 먼저 민생단의 상급 령도기관을 일률로 체포하고 소멸하는 것이였는데 그 주요한 임무는 그들의 일체 상급 령도의 간부들을 완전히 소멸하여 그들의 하급들이 령도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였다. 민생단 조직계통은 공산당의 사업방법과 방식인데 민생단간세의 내용을 바꾸어놓은 것 뿐이며 민생단 수령들은 공산당에서 제발시켜 당단령도사업을 하는 적극분자들이기에 제1계단에서는 이런 자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만특위는 민생단의 ‘동만특위’ 와 각 현의 ‘현위’ 간부로 인정되는 25명(그중 특위간부 6명, 각 현의 현위간부 16명, 주요 교통원 2명)을 체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모두 총살하였다. 이들중에는 왕청현위 서기, 동만특위 숙반위원회 주석, 특위 선전부장인 리송일(민생단특위로 지목됨), 인민혁명군 독립퇀 퇀장 윤창범, 정치위원 김락천, 원 3퇀 퇀장 리남규, 원 공청단특위 서기 김창연(민생단청년특위 서기로 지목됨) 등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조직과 군대의 조선인간부들이 포함되여있다.

위증민의 보고서에 따르면 약 2개월전에 리상묵, 주진, 최학철 등이 ‘낡은 민생단총기관’이 중공당에 파견된 후 리송일이 민생단의 새로운 특위를 조직하려 하였고 리송일 스스로도 자신이 민생단의 새로운 특위 서기임을 승인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조직과 인민혁명군내의 조선인 주요간부들이 민생단의 상층 령도들로 인정되고 무자비하게 숙청당한 것이다.

조선인간부중 최고위급에 있던 리송일의 경우, 그는 원래 반‘민생단’투쟁에서 아주 적극적이였는바 민생단청산문제에서 엄격한 실행자로 이름이 나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민생단의 동만 총령도자, 민생단 최고수령이라는 있지도 않는 죄명을 쓰고 그가 죽인 많은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동지들의 손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리송일은 간도협조회가 조직한 ‘가짜편지’사건에 련루되여 죽음을 당한 것이다.

1935년 3월 13일, 간도협조회 본부 공작원인 강현북과 리동화는 항일혁명군의 활동구역인 왕청현 쟈피거우에 들어가 간도협조회 회장인 김동한의 이름으로 리송일에게 보내는 가짜편지(편지의 내용: 전번에 당신에게 부탁하였던 공산구역내 기밀보고 일은 본부에서 파견한 공작인원과 밀회하여 처리하기 바란다)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길가에 살포해놓았고 그 가짜편지를 발견한 공산당조직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리송일을 즉시로 체포, 총살하였다. 사형당할 때 리송일은 “정말로 민생단이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환영(幻影)이였댔는가?”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결국 제1단계의 투쟁을 거쳐 과거 조선 공산당출신의 로간부, 로항일혁명가와 소자산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전부 소멸하였다.’

제2단계는 민생단의 일체 주요령도기관이 모두 파괴되고 수령들의 10분의 7, 8이 이미 체포되거나 구축되였다고 인정한 상황에서 민생단의 중하급간부 및 하층군중들을 처리하는 것이였다.

제3단계의 주요한 임무는 최후로 유격구 밖에서 민생단의 조직을 소멸한다는 것이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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