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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5)-일제의 집중영 ‘집단부락’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6-10 11:53:29 ] 클릭: [ ]

부락 주위에 높은 담벽 쌓고 깊은 도랑 파

밤낮 주민 감시 한사람 걸리면 10호 련좌

일제의 ‘채무농노’로

“일제는 정치면에서는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고 조선인들과 항일부대와의 혈연적인 련계를 단절, 유격구를 고립시켰으며 경제면에서는 조선인들을 ‘안무’한다는 미명하에 ‘반일적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집단부락정책’이거나 ‘안전농촌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의 이런 정책은 조선인들을 일본 독점자본에 예속시키는 ‘통제-안정방침’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통치정책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과 항일무장조직에 대한 ‘토벌’로 하여 수많은 조선인농민들은 집이 소각당하는 등 전쟁재앙을 입어 도처로 류랑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동북 각지에 피난민이 생겼는데 위만주국 민정부 척정사 제10과의 《간도집단부락건설개술》(1935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연변 4개 현의 피난민은 1,611호에 8,387명이였다.

 

지금의 안도현 복흥향의 동포이민집단부락.

일제는 피난민을 ‘구제안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총독부와 망철회사가 공동으로 투자, 동아권업회사가 경영하기로 하고 1932년부터 우선 남북만의 피난민을 안치하기 위하여 료녕성 철령현 락석산, 1933년에는 료녕성 영구현 전장대, 흑룡강성 주하현(현재 상지현) 하동촌, 1934년에는 흑룡강성 수화현 현성 부근, 1935년에는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각기 ‘안전농촌’을 건설하고 피난민과 류랑민을 수용하였다. 일제는 ‘안전농촌’을 경영하면서 “단순한 구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진일보 적극적인 지도하에 조선인의 모범촌을 건립한다.”고 하면서 1938년부터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하였다.

‘자작농창정계획’이란 일제의 투자하에 토지, 부락건설비, 가옥건축비, 농업경영비 등을 농민들에게 대여준 후 8푼의 리자를 가첨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매년 분년정기상환으로 10―15년간에 빚을 전부 상환하면 토지와 가옥 등이 개인소유로 되여 자작농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보기에는 농민의 경제적지위를 향상시키는듯한 정책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농민들을 ‘채무농노’로 전락시켜 동아권업회사의 토지에 속박되게 하여 자유로 이주하지 못하게 하며 농촌내에는 성경찰분서와 자위단을 건립하고 농민들을 감시함으로써 항일부대와 민중간의 련계를 단절시키자는 정책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안전농촌의 농민들은 해마다 빚을 상환하기는 하나 이듬해 봄이 되면 생활이 곤난하게 되여 또 회사돈을 꿔 그 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 또 빚을 더 지게 되는 처지에 빠지는 악성순환을 거듭해야 했다.

‘자작농창정’ 대상으로 된 조선인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본 식민회사에 빚과 리자를 상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가렴잡세도 납부해야 했다. 만약 제때에 규정된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면 이른바 ‘연장세’와 ‘계약위반금액’과 같은 추가금액을 내야 했다. 이렇게 되여 농민들의 빚은 해마다 늘어나 일본회사의 영원한 빚진 노예로 되여야 했다. 1935년 연길현 동성용촌에는 ‘자작농창정’ 대상으로 된 집이 42세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360정보의 토지를 부치고 있었다. 그 토지값은 도합 3만 5,500엔이였다. 1945년에 이르러 이곳 농민들은 이미 각종 세금 5만 7,300여엔을 납부하였으나 일본식민지회사에서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금후 4년 동안에 만 6,700엔을 더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제의 ‘자작농창정계획’은 일본식민주의자들이 략탈한 토지를 고가로 파는 고리대금 형식의 매우 간편한 방식에 의거하여 최대액수의 리익을 빨아내는 착취수단이였다.

‘보갑제도’ 실시

“1933년부터 일제는 연변지구에 이른바 ‘피난민과 빈곤호구제’의 명의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처음에는 원 지방으로 돌아갈 수 없는 피난민을 상대로 상주지 부근 또는 기타 ‘안전한 지대’에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안치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1차로는 북하마탕, 이란구 태양 등지에 9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했는데 855호에 4,470명이 수용되여있었고 1934년에 제2차로 연길현 금불사, 삼명월구 등지에 1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는데 수용되여 있은 농호는 478호, 인구는 2,557명이였다고 한다.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치안특별공작의 일환으로 삼았다. 항일유격구 및 항일근거지를 ‘토벌’, 소각한 후 근거지의 민중과 그 부근의 산재호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집단부락을 건립했다. 집단부락을 민중을 감시하고 항일유격대 및 기타 항일군과의 련계를 차단하는 즉 ‘비민분리’의 ‘치안숙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리용하였다. 일제의 1935년 12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에 건설한 ‘집단부락’은 121개이며 만 2,362호, 8만1,955명을 수용하였다.

집단부락과 농장.

1936년 8월, 일제와 괴뢰만주국정부는 〈재만조선인지도강요〉를 제정하고 연변 5개 현과 동변도의 18개 현을 조선인집거구로 지정하고 중쏘, 중몽 변계지구와 기타 산재지구의 조선인을 강박적으로 일제가 지정한 곳에 가서 집중거주하게 하였다. 일제는 ‘집단부락’ 건설을 위하여 농촌에 산재해있는 집들을 모조리 불 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한데 모아 저들의 통제와 감시 밑에 몰아넣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집단부락’의 구조는 1개 촌을 100호를 기준으로 하고 부락 4변 주위에는 2.5메터의 담벽을 쌓고 담벽 4각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며 대문은 한개만 내였다. 항일부대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담벽 밖에는 또 너비 3메터, 깊이 2메터의 깊은 도랑을 팠다. 부락 중앙에는 경찰분서 파출소와 자위단을 설치하고 부락 통용문은 자위단이 밤낮으로 보초를 섰는데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는 대문을 닫았다.

부락주민들에게는 ‘량민증’을 발급하여 ‘량민증’이 없는 자는 ‘반일분자’ 또는 ‘통비’ 혐의로 체포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5가작통’, ‘10가련좌법’ 등으로 불리우는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10호를 한패로 하고 촌 또는 이에 준할 수 있는 구역내의 패로 1갑을, 경찰서 관할구역내의 갑들로 1보를 조작하고 주민들사이에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하였다. 한사람이 ‘통비’혐의에 걸리면 본인은 물론 5호나 10호가 ‘련좌’되여 함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부락민들 끼리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1936년 3월말, 일제가 동만지방에서 ‘보갑제도’를 실시한 정황은 이렇다.

연길경찰청, 보 2개, 갑 44개, 패 429개,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화룡현, 안도현 등 다섯개 현에다 보 116개, 갑 523개, 패 7,278개를 조작했다.

가혹한 수용소

차조구 중평촌의 ‘집단부락’은 1934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 동안에 건설되였다. 이 ‘집단부락’은 연변에서 두번째로 건설한 36개 소의 ‘집단부락’가운데의 하나로서 당국에서 조작한 ‘방어를 위한 집단부락’ 규격에 의해 건설되였다. 부락의 형태는 정방형이였는데 포대, 토성, 전호, 전기철조망 등의 방어설비를 갖추었다. 포대는 진흙을 이겨서 쌓거나 토피로 쌓았고 포대와 포대 사이의 거리는 100메터이고 포대 안에는 방한설비로 온돌을 놓았다.

흙토성 높이는 3.33메터이고 밑너비는 1.98메터, 웃너비는 0.82메터이고 토성 우에는 14호 철사로 전기철조망이거나 가시철조망을 늘이였다. 전호의 표준은 웃너비 4.62메터, 밑너비 0.99메터이고 길이는 3.33메터 이상이였고 문 안팎에 약 2.62메터 높이의 철조망을 둘렀다.

‘집단부락’ 건설에 수요되는 설비는 비용만도 당시 시가로 약 11만 4,060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집단부락’ 건설에 동원된 로동력은 연인수로 3,300명이였는데 그것을 호당 풍기면 연인수로 28.6명이나 되였다. 공공시설비용과 영농자금, 가옥건축비는 호당 6,250원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한 이 금액은 새로 지은 자기의 가옥을 저당잡히고 4년을 환납기한으로 하고 현에서 대여받은 것인데 절대부분 농호들은 그 돈을 환납할 능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집단부락’에 들어선 첫날부터 채무자로 전락되였다.

중평촌의 ‘집단부락’에는 105호의 조선인과 5호의 중국농민이 수용되였는데 그들은 원래 241헥타르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호당 2.34헥타르였다. 그러나 ‘집단부락’에 수용된 후 경작지면적은 크게 감소되였다. 경작지를 1.7헥타르 이하 갖고 있는 농호가 이사하기전의 12%로부터 32%로 늘어났다. 자작농은 27.6%로부터 15.6%로 감소되였고 소작농은 51.7%로부터 59.3%로 증가되였다. 부락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밭을 부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먼곳의 밭들은 죄다 황무지로 변했다. 식량이 모자라는 농민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웠다. 그들이 들어있는 집은 헐망하기 짝이 없었다.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은 앓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집단부락’에서는 공무인원과 불구자를 제외하고 18세부터 40세 사이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자위단에 참가해야 했다. 부락내에 자위단시설이 설치되고 몇자루의 총과 탄알이 배치되였으며 단원들은 륜번으로 순라를 했다. 매호에서는 자위단비와 보갑비 등 경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집단부락’의 경비는 일본헌병대의 지휘밑에 위만군과 경찰 그리고 매 ‘집단부락’에 조직된 약 50―100명에 달하는 일반자위단 혹은 무장자위단이 담당하였다. 1935년 연변유격근거지 주변에 조직된 자위단은 241개였는데 그 대원은 7,146명이였다. 1936년에는 319개로 만 8,131명으로 증가되였다. 그중 직업무장자위단이 11개로서 141명이였다.

‘집단부락’에는 부락장과 부부락장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락장은 ‘보갑련좌법’에 의해 갑장을 겸하고 부부락장은 자위단장을 겸하였는데 만주국 현장이 그들을 임명하였다. 부락장은 현의 일반행정보조사무를 겸하고 부락민에 대한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부부락장은 부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자위단에 대한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였다.

부락민은 외출 시, 규정된 분량 이상의 량식과 물자를 가지고 다닐 수 없었으며 반드시 부락장 또는 경찰서의 허가가 있어야 휴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이 항일부대에 물자, 량식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하기 위해서였다.

“실제상 ‘집단부락’은 ‘집중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집단부락’의 전략적인 성적을 보고 이 정책을 1936년부터 전 동북에 보급하였습니다. 항일부대가 활약하고 있는 곳이기만 하면 강제로 ‘보급’하였는데 어떤 곳에서는 단독으로 ‘집단부락’을 건설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집가병촌(集家并村)’으로 산재호를 모조리 불 사르고 강제로 ‘치안이 확보된’ 부락에 집결시켰는바 ‘병촌’부락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한 부락에 수용하고 유격근거지나 유격구는 전부 소각 또는 파괴하여 ‘무인지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집단부락’정책은 중세기적인 야만적이고 가혹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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