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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7)―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6-19 15:45:29 ] 클릭: [ ]

렬악한 환경 속에서도 군민이 혼연일체 되여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일제의 봉쇄 분쇄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위증민을 동만에 파견하였다. 위증민은 연길현 삼도만에서 얼마 동안 조사한 후, 2월27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대황외에서 동만 공산당, 공청단 특위 제1차 련석회의(세칭 ‘대황외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번 회의에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왕중산, 종자운, 주수동, 장창수, 리학충, 조아범, 리실일, 림수산, 최봉문, 강창연, 리동규, 김희문, 왕윤성 등 26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위증민의 사회로 진행되였는데 주요하게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 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지난 1년간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공작방침정책을 집행한 정황을 조사한 후 동만 당, 단과 군대의 공작방향과 긴급임무를 제정하고 당단특위 령도기구를 개조했다.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를 철소하고 위증민, 리학충, 리광림, 왕윤성, 왕정렬, 왕중산, 마진금 등으로 특위를 조직한 후 위증민이 특위서기를 담당했다. 공청단특위 서기는 주수동이 맡았다.

1937년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 제6사 조선인장병들(뒤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일성)

인민혁명군 건설공작을 강화할 데 대한 중공만주성위의 2월 1일 지시에 근거하여 1935년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련석회의(세칭 ‘요영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는 독립사 정위 왕덕태와 특위 서기 위증민의 사회로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독립사의 지도자들과 제 1, 2, 3, 4퇀의 정위, 공청단만주성위 특파원 종자운 및 공청단동만특위 책임자 등 도합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오는 4월에 동만항일련합군 총지휘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으며 〈인민혁명군정치사업조례〉, 〈인민혁명군전사대우조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제2군 독립사의 활동방향을 확정하였는데 원래의 항일근거지를 고수하는 동시에 수분대전자(왕청현 라자구지대)와 안도현 처창즈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군중기초가 두텁지만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교통이 불편한 돈화, 화전, 동녕, 녕안, 목릉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독립사 지도부와 각 퇀 간부들을 조절하였다.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리승규,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장봉운,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하덕윤, 정위에 왕윤성이 임명되였다.

회의 후, 동만특위는 수분대전자로 이동하고 독립사 본부는 처창즈 쪽으로 이동하였다. 왕청과 훈춘의 근거지 군민들은 수분대전자에 집결하고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근거지 항일기관과 군민들은 처창즈로 이동하였다.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부터 시작하여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에서 범한 ‘좌’경 착오가 점차 시정되기 시작했으며 진일보로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관철되게 되였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 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 후,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무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삼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 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이리하여 1935년 1월, 연길현과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 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 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 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 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 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 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 을 당하게 되였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 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 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 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 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기름 한방울도 없이 산나물만 먹었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 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 출판)에서도 그 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 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 후 돌 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려낸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이런 기아 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 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 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 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닥쳤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 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 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 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를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 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을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만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고 골수이며 반일정신이고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 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여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의해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 기관은 라자구의 사도하자로 전이해간 후 원유의 혁명적 군중에 의거하고 여러 갈래의 항일력량과 련합하면서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 확대했다.

2,600여호 거주민들이 살고 있는 라자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지키기 좋은 훌륭한 전략기지였다. 일찍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작일군을 파견하여 라자구에 공산당조직을 건립, 중공라자구구위를 설립하였다. 구위의 령도 아래, 삼도하자와 하동, 태평구, 신춘자, 로무주거우 등지에 7개의 기층 중공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부녀회 등 반일혁명군중조직이 결성되였다.

1934년 독립사가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사충항의 항일구국군 등 기타 항일부대와 손 잡고 라자구전투를 벌린 후부터 라자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구로 되였다. 하여 독립사 제3퇀, 제4퇀 장병들과 반일혁명적 군중들은 요영구, 탕수허즈, 금창 등지로부터 라자구에 모여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은 라자구의 사도하자에 온 후 원래 있던 공산당조직을 기초로 하여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를 건립하고 중공동만특위의 령도 아래에 두고 종자운을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5년 봄, 특위교통처가 설립되여 라자구항일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중공동만특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지도기구가 정식으로 건립되게 되였다. 근거지내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농민위원회를 설립한 후, 춘경생산을 내밀도록 군중들을 동원했다.

독립사 제3퇀, 제4퇀 일부 병력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면서 적군에 대한 와해공작도 벌리였다. 큰 전투는 별반없었고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 뿐이였기에 인민혁명군은 휴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부대는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에서 700여명 군중을 발동하여 진행한 ‘분량투쟁’과 ‘집단부락’ 건설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일본군의 ‘집단부락’ 건설계획이 1935년말까지 한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근거지에 대해 경제적 봉쇄를 하려는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렸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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